일본열도를 뒤흔든 일본침몰
감독: 히구치 신지 | 주연: 토요카와 에츠시, 쿠사나기 츠요시, 다이치 마오
김연주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땅이 들어올려졌다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강한 충격과 함께 책장 위에 올려놓은 꽃병이 떨어져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이 깼다. 곧 이어진 심한 요동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비상벨 소리에 ‘지진이닷!’ 하고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마음과는 달리 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 고베대지진은 이렇게 아무 예고 없이 일본생활 5년째인 나를 불쑥 찾아왔다. 당시의 그 끔찍했던 공포와 불안에 떨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한 편의 영화가 2006년 일본열도를 뒤흔들고 있다.
유난히도 무덥던 올 여름에 개봉된 〈일본침몰〉. 이 영화는 1973년 3월에 출판되어 400만부 이상 판매된, 일본 SF문학의 거장 코마츠 사쿄의 베스트셀러 동명소설을 같은 해 12월에 개봉하여 65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동명영화의 리메이크판이다.
1973년 당시 〈일본침몰〉 소설과 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켜, 주식이 폭락하고 이민자가 속출하는 등의 사회현상을 낳기도 했다는 소문을 듣고 개봉 첫날 영화관을 찾은 나는, 통로까지 꽉 들어찬 폭넓은 관객층을 보고 이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늘어난 지진발생 횟수나 각 방송사의 지진관련 특집방송을 통해 지금 일본 땅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음을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지구 지각판의 대규모 변동으로 일본 각지에서 규모 8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나 일본 전역이 공포에 휩싸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40년 안에 일본이 침몰할 것이라는 미국학회의 발표에 의문을 품은 타도코로(토요카와 에츠시 분) 박사는 독자적 조사활동을 통해 남은 기간이 불과 1년임을 알게 되고….
처음엔 박사의 경고를 무시하던 일본정부도 결국 여러 나라에 자국민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공황상태에 빠진 국민들 역시 하늘로 바다로 피난처를 찾아 떠나느라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잠수정 파일럿 오노데라(쿠사나기 츠요시 분)와 고베대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소방대 구조대원 레이코(시바사키 코우 분)를 중심으로 인간드라마가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의외로 단순한 스토리의 이 영화가 일본영화 역사를 뒤집을 정도로 대대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에선 지진에 관한 얘기가 농담이 될 수 없듯, 외국인에겐 황당무계하거나 SF적인 요소로 인식되는 이 영화의 설정이 일본인들에겐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일본 최고의 특수효과팀을 동원하여 거대한 지진으로 땅이 솟아오르고 고층빌딩이 무너지고 화산폭발로 격렬한 폭풍과 불길이 넘실대며 일본열도 전역이 파괴되어 가는 참혹한 모습을 실제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 즈음엔 고베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여주인공 레이코의 슬픔과 두려움이 그대로 느껴져 어느덧 나 자신이 레이코가 되어 폐허로 변한 도쿄 한가운데 서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듯했다.
내 생활터전인 도쿄의 화려한 위용이 후지산 분화 앞에선 무력하기만 하고, 오사카의 정들고 친숙한 곳들이 완전히 물에 잠겨 자취를 감춰버리고, 추억 속의 교토·나고야 등지의 낯익은 명소들이 차례로 파괴되어 가는 광경에선 극도의 허탈감마저 느꼈다.
특히 대형 모니터에 비춰진 일본지도가 각지에서 일어나는 규모 6, 7의 지진 강도를 나타내는 붉은 전광숫자로 빼곡이 채워지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
한편, 영화 종반에 일본을 구할 유일한 방법으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 폭탄 N2를 일본열도와 플레이트 사이에 투여해서 인위적으로 분리시킨다는 ‘너무나도 영화적’인 발상에 이르러선 막판에 거품이 빠진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킨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영화의 작품성이나 완성도 따위는 논외로 하더라도 뛰어난 특수효과에 비해 허술한 구성과 내용은 ‘재해 따로, 드라마 따로’가 되어 아쉬움으로 남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일본인에겐 분명 호소력 있는 영화임이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한 설정과 실감나는 영상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반응을 보였고, 일부 젊은 층에선 주변국들이 일본 난민을 수용하는데 인색한 설정이 더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영화에서 1억 3천만 인구 중에 1억 이상이 일본 땅덩어리와 함께 가라앉을 수밖에 없음이 기정사실화되어 가는 가운데, 일본정부의 한 각료가 “그냥 이대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택하겠다”라고 말하자 일본수상이 “나도 그 생각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일본인뿐일 게야.”라고 답하는 대목을 가리켜 ‘일본인의 독특한 미학’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일본 땅에 살고 있는 한 그 누구도 지진이라고 하는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일본인의 국민성이나 정서에 잠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일본의 숙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영화와 비슷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일본만의 문제이겠는가. 특히 인접한 한국의 경우는 어찌 무사할 것이며, 세계경제는 어찌될지 한번 생각해 보라.
〈일본침몰〉 1973년판에서는 세계 각국이 나서서 일본인 구출에 전력을 다한다는 설정이, 2006년판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그려졌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세계정세가 그때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음은 물론,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이 닥치면 자국민을 보호하기에도 벅차 다른 나라에 인도주의적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원작자 고마쓰 사쿄는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일본땅을 버렸다”는 말로 자신의 작품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침몰〉을 통해,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와 사람들의 위기의식,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책상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긴급보도에 의하면 진원지는 도쿄 인근으로 규모 4.7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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