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지킴의 염원이 서린 산, 남산(南山)을 가다

2011.08.10 | 조회 3153


남산


순결한 애국의 성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옅은 황사가 낀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늘은 남산(南山)을 찾아가는 날.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서울 어느 곳에서도 늘 보이는 곳에 남산이 있다. 그리고 그 정상에 우뚝 솟은 남산 타워는 과거에도 그래왔지만 지금도 서울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 남산이 최근 대대적인 공원화 작업으로 시민들의 소중한 휴식처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남산(南山)
옛적에는 인경산(仁慶山)이라고 불렸던 남산은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한양 남쪽의 산이 되었다. 풍수지리상으로는 안산(案山)에 해당하였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국사당이 있었던 남산은 그 본래 이름이 목멱산(木覓山)이다. 목멱산이란 옛말 ‘마뫼’에서 유래된 것으로, 남쪽을 뜻하는 본래 우리말인 ‘마’에 산의 의미가 있는 ‘뫼’가 합쳐진 것이니 본래부터가 그 이름이 남산이었던 것이다. 남산은 경복궁 뒤 백악산, 사직공원 뒤 인왕산, 성균관 옆 낙산 등과 함께 겹꽃모양으로 어우러져 조선의 명당 한양을 일으킨 명산이자, 또한 나라 지킴의 염원이 담긴 산이기도 하다.


사부작 사부작거리며 올라가는 남산 길은 편안하다. 최근 웰빙문화의 확산으로 전국적으로 걷기열풍이 한창인데, 서울에서는 걷기운동에 추천할 만한 명소 중 한곳이 이 남산길이다. 남산을 올라 처음 찾은 곳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 의사 기념관은 남산 타워로 올라가는 길에 만나는 남산 도서관 옆에 위치해 있다. 1970년 10월 26일에 개관한 이곳은 지난 2010년 10월 26일, 안 의사 의거 101주기를 맞아 산뜻한 모습으로 새 단장이 되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외부에는 안 의사의 문기(文氣) 서린 유묵들이 돌에 새겨져 전시되고 있었다. 한 자 한 자 관심을 기울이며 읽어 내리다 보면 안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과 순결하면서 혼일한 의지를 느끼게 된다. 유묵을 읽다보니 어느덧 눈시울이 젖어들고 가슴속에서 뭉클한 무언가가 요동쳤다.


남산2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안 의사의 유묵이 음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냥 스쳐 기념관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역시 글자체에 서린 그 기상과 정신을 음미하며 발길을 옮겼다. 이 모습을 유심히 보던 관계자가 다소 놀랍다는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이곳은 저희가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조성한 곳인데, 선생님처럼 꼼꼼하게 보시는 분은 처음 봅니다.” 필자도 망설임 없이 응대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유묵들에 담긴 정신을 가슴에 새겨야죠!”


안 의사는 문무를 겸전한 분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글을 가까이한 문인이라기보다는 무인으로서의 기질이 더 강했다. 그러다보니 유묵에 새긴 글자체도 그다지 명필이라 볼 수는 없으며, 오히려 당시 조선의 최고 명필은 매국노 이완용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오늘날 이완용의 명필 글씨를 소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글씨는 예술이기 이전에 그 인물의 혼과 인품이 담긴 그릇이기 때문이리라.



기념관에서 만나는 안 의사의 발자취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깔끔하였다. 티 하나 없다고 해야 할까. 나라사랑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준절한 생각을 그대로 엿보게 했다. 건물은 통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겉에서 보면 세 개의 독립된 건물이 배치된 형상이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12인을 상징하는 12각 형태의 건물인 본 기념관을 건립하는 데에는 국민들이 정성스럽게 모아준 성금이 쓰였다고 한다.


기념관 초입에는 순국 직전 어머니(조 마리아)가 지어준 명주 한복을 입은 모습의 안 의사 동상이 있다. 그 뒤에는 단지 후 ‘대한독립’ 글귀를 피로 새긴 태극기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전시실 내부는 안중근 의사의 유품과 자료를 토대로 하여 출생에서부터 순국까지 일대기가 구성되어 있었고, 곳곳에 친절한 자원봉사자들의 안내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지식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삶은 그 자체가 나라사랑과 나라지킴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구한말 혼란한 국내 정세 속에도 나라를 위한 모든 활동(교육사업, 국채보상운동,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더 놀라운 것은 안중근 의사 집안이 대대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내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안 의사 기념관을 직접 방문한다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안중근 의사의 애국충절은 넷째 손가락을 끊으면서 그 절정에 다다랐다. 1909년 초 11명의 동지들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일심 단체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단지(斷指)동맹을 맺었고, 그 해가 가기 전 만주 지역 지배권 획득을 위해 하얼빈으로 온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다.


의거 직후 담담히 체포에 임한 안 의사는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을 위해 의거했음을 역설하고, 자신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적국과 교전 중 포로가 된 군인신분으로 대우해 주길 요구했다. 그러나 간악한 일본은 이 모든 요구를 거부하고 민간변호사에 의한 변호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인들만의 재판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은 안 의사는 1910년 경술년 3월 26일 비 오는 날 아침에 순국하였다.



남산3



안 의사는 자신의 유해가 하얼빈 공원에 가장(假葬)된 뒤 조국 해방 후 고국으로 안장되길 원했으나, 일본은 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안 의사의 묘역이 독립운동의 성지(聖地)가 될까 두려워한 그들은 유해를 내주지 않았고, 현재는 묘역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순국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다만 서울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 선생님이 마련한 삼의사묘 옆에 그 허묘가 남아있다.


효창공원 삼의사묘(三義士墓) : 백범 김구 주석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치신 세 분을 위해 조성한 묘역이다. 일본 천황을 죽이려한 이봉창 열사,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요인들을 척살한 매헌 윤봉길 의사, 우당 이회영 선생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한 구파 백정기 의사 이렇게 세 분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마지막 추모실에 걸린 조지훈님의 시를 음미하며 짧게 묵념을 드렸다. 안 의사의 순결한 삶과 나라사랑에 대한 피 끊는 정성, 일심어린 빨간 마음[丹心]을 잊지 않겠노라고.



와룡묘에서 신교의 흔적을 엿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나와 다시 이어지는 산책길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차는 전혀 다닐 수 없고 다만 도보만 허락되는 곳이다. 5월의 봄바람에 떨어진 형형색색 꽃잎들이 쌓인 탓에 아스팔트길은 꽃길이 되었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사이 어느덧 남산의 또 하나의 명소 와룡묘(臥龍廟)에 이르렀다.


와룡묘
중국 삼국시대 당시의 정치가였던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38년(1605) 평안도 영유현에 공식으로 와룡묘를 짓게 하였고, 그 후부터 왕들이 관원을 보내어 제를 올리거나 제문(祭文)을 지어 보낸 예도 있으며, 사액(賜額)의 예도 전하는데, 이 와룡묘와의 연관성은 확실치 않다.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로, 내부로 들어가면 2m 크기의 제갈공명 석고상과 함께 2.5m 높이의 관운장의 석고상이 있고, 그밖에 대북·소북·종 등 의식용 악기들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고종의 후궁이 된 엄상궁이 처음 세웠다고 전하는데, 1924년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1934년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단군묘(檀君墓), 제석전(帝釋殿), 약사전(藥師殿), 삼성각(三星閣), 요사(寮舍), 문신각(文臣閣) 등이 함께 있어, 와룡묘가 중국 도교계의 신령을 모신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신앙과 결합된 유적임을 보여준다. (참고:문화재청 홈페이지)


남산 북녘에 위치해 있는 와룡묘는 바위와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위치한 탓에 약간 음습한 느낌도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내하시는 여성분이 한 분 계셨는데 이곳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다른 방문객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문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와룡묘라는 현판과 함께 팔각지붕으로 된 건물이 보이며, 건물 밖 기둥에는 제갈량의 삶과 업적을 소개한 글귀들을 만날 수 있다.


사당 내부에는 와룡묘의 주인, 제갈공명 상이 조성돼 있고, 그 옆에는 관운장의 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제갈공명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대로 신선같은 풍모에 학창의를 입었으며 깃털 부채를 쥔 모습이다. 그리고 관운장은 붉은 얼굴과 길게 난 수염에 손에는 『춘추』를 들고 있으며, 옆에는 제사에 쓰이는 기물과 청룡언월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와룡묘는 여러 신앙문화가 복합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제갈공명상은 도가적 풍모를 보여주며, 관성제군은 무가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그리고 사당 외부에는 부처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와룡묘보다 좀 더 높은 곳에는 단군성전이, 그리고 더 위에는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유불선 삼교의 뿌리가 되었던 한민족 고유의 신교문화의 종합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장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와룡묘의 제갈량과 관운장
제갈량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에 그 평이 극과 극을 달린다. 그 이유는 그를 다룬 두 가지 서적에서 평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흔히 우리가 아는 제갈량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삼고초려, 조조의 천하통일 전략을 무너뜨리기 위해 적벽대전에서 남풍을 불린 사건, 조조를 화용도로 몰고간 일, 남만정벌의 칠종칠금의 고사, 육손을 팔진도로 길을 잃게 하여 선제 유비를 구한 일 등, 신묘한 계책은 지략가의 대명사가 되게 하였다. 하지만 진수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군사적 전략적 재능보다는 뛰어난 관료로서의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위 어떤 기록을 보더라도 제갈량의 주군에 대한 충성과 나라사랑 정신과 비범한 능력은 그대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위나라에 대한 북벌 전 올린 <출사표>는 ‘이를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명문장이다. 제갈량이 평생 품은 이상이 자신의 주군에 대한 충성, 그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뜻이었으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음을 엿보게 해준다.


그러면 촉한의 명재상인 제갈공명과 명장 관운장이 왜 이곳에 모셔지게 되었을까? 


본격적으로 와룡묘가 조성된 것은 대한제국 말의 일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 되자, 당시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귀비가 예부터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해온 이곳에 제갈공명의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이는 무속의 힘을 빌어 일본의 침략의지를 막고자 함이었다. 제갈공명은 후한 왕실 후손인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제위까지 오르게 하였고, 아들 손자 때까지 대를 이어가며 충성을 바친 당대 최고 충신이었다. 또한 후한을 연 초대 황제 유수(劉秀)의 연호가 대한제국의 연호인 광무(光武)로 같았기 때문에 이곳에 제갈공명의 사당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음력 6월 24일 이곳에서는 제갈량과 관운장에 대한 제사가 봉행된다.


남산을 내려오며
남산을 내려오며 안중근과 제갈공명, 관운장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이분들의 생애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제갈공명의 경우 그가 남긴 출사표에는 그의 검박한 삶을 묘사하는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가 나온다.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남겨 식솔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여 그의 청렴함을 묘사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소열제 유비의 패업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화는 충성을 바치고 일을 도모함에는 한 치의 사심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분들은 나라사랑의 충절과 의로움에 있어서는 한 올의 티끌도 없는 순도 100%의 새빨간 혈심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분들과의 재회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참된 충(忠)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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