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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보다 잔혹한 ‘천연두’ 대습격

2010.01.07 | 조회 5226


[한겨레] 1521년 코르테스는 300명 정도의 에스파냐 병사와 일부 현지인 동맹군으로 아스텍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석 달 뒤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었고 황제 몬테수마와 그 계승자를 포함한 주민의 절반이 죽었다. 점령된 도시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운하가 주검들로 가득 찼으며 “주검을 밟지 않고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고 당대 기록은 전한다. 그런데 사실 이 많은 희생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코르테스의 공격 그 자체보다도 천연두라는 전염병이었다(원래 우리말은 ‘두창(痘瘡)’이고 ‘천연두’는 수입된 일본어이다). 이 병은 본디 아메리카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던 병으로서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건너올 때 병원균이 함께 묻어와서 퍼진 완전히 새로운 병이었다. 그 때문에 아메리카 주민들에게는 이 병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어서 한번 병이 돌자 걷잡을 수 없이 퍼졌던 것이다. 코르테스 군대가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할 무렵에는 이미 이들보다 먼저 병원균이 들어와서 천연두가 심각한 상태로 발병해 있었다.

유럽인들에 의해 아메리카로 건너간 각종 전염병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멕시코를 덮친 천연두는 18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이들의 3분의 2가 또다시 홍역으로 죽었다. ‘전염병의 세계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인간과 사회는 질병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병원균이 인체에 들어오면 우리의 면역 시스템이 이것을 막아낸다. 그러면 다시 병원균도 이에 적응하여 변이(mutation)를 거듭한다. 이런 식의 상호 적응 과정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이 경과하면 결국 인체 면역 시스템과 병원균은 ‘적절한 균형 상태’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그 지역 내에 일부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 면역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병세가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뜻하며, 또 이런 경우 해당 사회는 대개 그 병에 대한 치료책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각 문명권은 그 나름의 질병들과 그에 대한 의학 체계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원격지간 소통이 그리 활발하지 않던 시기에는 각 문명권마다 상이한 질병 풀(pool)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에 해양을 통해 문명권 간 소통이 급격하게 진전되면서 병원균들이 전 지구적인 차원으로 퍼져갔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낯선 병원균 때문에 충격적인 양태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사실 한 지역에서 면역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거의 해가 되지 않던 병원균들이 이웃 지역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사태는 역사상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서 이집트에서 주변 지역으로 이주한 현상은―종교적 의미를 빼고 순전히 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면―나일 강 문명권의 병원균을 잔뜩 몸에 지닌 엄청난 숫자의 ‘숙주’들이 몰려와서 초원과 사막 지대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에게 가공할 전염병을 퍼뜨린 사건이었다. 이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미국의 역사가 맥닐의 이름을 따라 이런 사태를 일반적으로 ‘맥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콜럼버스 이후 구대륙과 신대륙 사람들 간의 조우이다. 전염병 발발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유럽인들의 해외 진출은 “생물학적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엄청난 사건이었다. 구대륙 유라시아로부터 신대륙 아메리카로 들어간 각종 전염병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엄청난 피해를 가져 왔다.

1518년부터 천연두가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이 병은 에스파뇰라 섬의 아라와크 원주민의 절반을 죽였고 곧 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희생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름집이 덮여서 움직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생존자들은 곰보자국이 남거나 장님이 되었다. 천연두가 다른 병보다 더 큰 전염력을 가진 것은 이 병의 특성 때문이었다. 천연두는 발병할 때까지 10~14일 가량의 잠복기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건강한 피난민들도 증상을 보이기 전에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1530년대부터 천연두는 팜파스에서 오대호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뒤덮듯이 퍼지면서 유럽인 정복자들의 앞길을 터주었다. 한 추산에 의하면 16세기에 멕시코에서는 천연두 한 가지로만 180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1999년 유엔 발표 자료에 의하면 1500년대 세계인구는 약 5억명으로 추산되는데, 의학사가들이 이 시기에 천연두로 인한 사망자 수를 8천만명에서 1억명 사이로 계산하고 있으므로, 천연두는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불행의 목록은 천연두 하나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1529년 쿠바에 들어온 홍역은 천연두에서 겨우 살아남은 주민의 3분의 2를 죽였고, 그 후 온두라스와 멕시코를 덮쳐 엄청난 피해를 입힌 다음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잉카 제국까지 공격했다. 볼거리,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인플루엔자, 디프테리아, 성홍열 등이 뒤를 이었다. 콜럼버스 이전 신대륙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지만,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1억명이라는 추산이 맞다면 각종 질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 비율이 90%가 되는 셈이다. 이는 아마도 세계사에서 가장 참혹한 인구 감소의 사례라 할 것이다.

물론 급격한 인구 감소의 원인이 전적으로 전염병에 의한 것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유럽인들이 저지른 폭행과 살인, 이에 따른 유산, 집단 자살 등의 요소들도 함께 작용하였을 것이다. 유럽인들의 착취에 따른 기아와 과로는 그 자체도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만 인체를 약하게 만들어서 질병에 걸리기 쉽게 만들므로 간접적으로 전염병 원인과 다시 연결된다.

전염병은 유럽인들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하는 데에 결정적인 효과를 낸 것이 분명하다. 이는 우선 아메리카 기존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쓰러뜨림으로써 권력 구조를 뒤흔들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침략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심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공할 질병이 원주민에게만 발생하고 백인들은 멀쩡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 당시 상황에서 유럽인들은 정신적 우월감을, 원주민들은 열패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전염병 발발을 그들의 신앙 체계 속에서 왜곡하여 이해했다. 1548년 산토도밍고의 총독은 이 섬의 100만 인구가 500명으로 줄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신도 그런 못생기고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을 것이다. 그들이 죽은 것은 신의 뜻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메리카의 비극을 병원균 하나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근대 이후 세계화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현상 중의 하나로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전염병의 세계화’이며, 이는 현재에도 진행 중인 문제이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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