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수운과 화이트 헤드

2009.11.09 | 조회 2594




김상일 저/ 지식산업사/ 20,000원

 
 “열석 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수운가사》〈교훈가〉
 “시천주(侍天主)주(呪)에 큰 기운이 갊아 있느니라.”
 (道典 2:120:1)
 
이 책은 수운 최제우 대성사의 《동경대전》〈논학문〉에 나오는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중에서 ‘至氣’와 ‘天主’를 새로운 서학, 즉 신서학(新西學)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불리는 화이트헤드1)의 과정철학에서의 ‘창조성’(Creativity)과 ‘신’(God)의 관계와 서로 유비시켜 해석한 해설서이며, 동학의 시천주주(侍天主呪)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제시하는 논리학적·철학적 매스를 가지고 지금까지 동서양의 사상사에 흘러 내려온 신관을 거침없이 해부한 근래에 보기 드문 문명적 스케일의 역저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인류 문명사에서 논의되어온 신관을 인격[존재; 소유권]과 비인격[존재자체; 자체권]이라고 하는 음양적 구조로 분석하고 비판하였으며, 그 결론으로서 동양의 비인격적인 요소와 서양의 인격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나타난 것이 동학의 ‘21자 주문’이며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면의 제한으로 여기서는 이 책의 핵심 내용만 주제별로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1) A. N. 화이트헤드(1861∼1947)는 본래 영국의 수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로서 케임브리지대학 강사(1885-1911)를 거쳐 런던대학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1914-1924) 교수직을 역임하였고, 정식으로 철학교수가 된 것은 1924년 63세의 노령으로 미국 하버드대학의 초빙을 받고 철학교수가 된 것이 처음이었다. 수학과 물리학의 투철한 연구를 거쳐 과학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가지고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온 화이트헤드의 사상적 발전은 보다 포괄적인 형이상학 체계로서의 그의 <유기체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으로 꽃을 피웠다. 그는 『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25),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 『관념의 모험』(The Adventures of Ideas, 1933) 등의 중요한 철학적 저작을 출간, 독자적인 형이상학을 건설하였다. 그의 형이상학은 20세기의 상대성 이론 및 양자역학에 근거하여 자연과 인간사회를 포괄적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가설적 구도를 제시하려는 것이며, 그 치밀한 논리적 분석과 종합은 그의 깊고 풍부한 감각과 청순한 지조로 뒷받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오영환, http://whitehead.pe.kr/whois.htm)
 
철학의 출발은 자기언급으로부터
고대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든가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와 같이 철학적 사고는 ‘자기언급’에서 시작한다. 철학은 ‘타자언급’(other-reference)을 하느냐 또는 ‘자기언급’(self-reference)을 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삶을 중심으로 자기언급을 전개하는 철학을 ‘정신철학’(moral philosophy)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바깥 세계나 우주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타자언급의 철학을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자기언급’[近取諸身]과 ‘타자언급’[遠取諸物]은 바로 종교와 과학으로서 전개되어 왔다. 수운 역시 그의 동학사상 속에는 불교·유교·도교, 그리고 기독교의 사상마저 수용하여 통전적 철학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자기언급과 집단적 자기언급의 조화로 동학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구한말 한국 사회를 진동시킨 실천적 사상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一者’와 ‘多者’에 관하여
플라톤은 세계를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세계[多者]와 비가시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아의 세계[一者]로 나누었다. 서양의 존재론적 이원론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물리적인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파생된 세계로서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일자’(이데아)로서의 형이상학적 실체(substance)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서양사상사 속에서 ‘하나’와 ‘여럿’을 동시에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 이유는 철학에서 일자로서의 전체와 부분으로서의 다자가 되먹힘하는 데서 생기는 ‘역설’(paradox)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과학에서 카오스 이론과 홀로그래피 이론의 등장으로 이러한 부분 속의 전체 또는 전체 속의 부분이라는 되먹힘 현상이 실험으로 발견되고 있다.
 
A형 논리와 E형 논리
오랫동안 서양 철학사를 지배해 온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A형 논리)였다. 이원론, 선형적 사고방식, 실체론, 기계론, 환원론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 체계가 조장한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2500여 년 이상의 서양 철학사를 지배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지난 19세기부터 그 문제점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와서는 극복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현대과학을 포함하여 그 대안으로 나온 신서학은 그 기틀이 모두 E형 논리 즉 순환론적인 역설의 논리에 의하여 짜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분과 전체가 주객의 체용관계를 이루면서 서로의 역할이 전도되는 현상을 동양에서는 직관으로 파악하였다. 수운의 동학에는 바로 이러한 역설과 초월의 논리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한국사상의 3대 구성요소
필자는 한국사상의 바탕이 되는 삼대 구성요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동학사상은 전체와 부분이 되먹힘하는 논리인 ‘통논리’(通論理, Translogic)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한국사상에는 ‘인격신’(Personal God)인 ‘하나(느)님’이 있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이후 인격신이 사라지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인격신이 그 명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그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 19세기말 수운의 동학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세 번째로 한국사상을 특징 지울 수 있는 것은 동사 ‘하’에서 찾아야 한다. 우주의 궁극적 작용성인 ‘하’는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작용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작용성이며 신은 그래서 ‘하는님’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란 다름 아닌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다시 부분이 되는 작용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창조성과 인격신과의 관계를 수운은 ‘至氣’와 ‘天主’로,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Creativity’와 ‘God’의 관계로 자리매김해 놓았다. 지금까지 서양철학은 삼대 요소 가운데 통논리를 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철학과 불교는 인격신을 결여하고 있고, 기독교는 통논리와 신의 작용성을 결여하고 있다.
 
경운동 주변의 신관논쟁
최근 경운동 수운회관 주변에는 동학측 이세권 등이 천도교의 ‘인내천’ 교리는 일제가 하날님 신앙을 뿌리채 뽑아 버림으로써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의욕을 약화시키려는 간교한 음모에 동조된 손병희에 의해 날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운이 말한 ‘하날님’ 또는 ‘천주’는 하늘 위에 있는 절대전능한 존재로서 동학교도들이 아침마다 청수 떠놓고 소원성취를 빌 수 있는 강력한 신앙의 대상인데, 인내천은 사람이 하늘이라고 함으로써 결국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신앙 대상을 제거시켜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侍天主 신앙인 원래의 ‘동학’으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천도교측은 수운이 사용한 ‘하날님’은 하늘 자연신에서 파생된 말이며, 철학적 의미에서 볼 때도 수운이 비록 ‘하날님’이란 명칭을 사용했지만 ‘한울님’이 훨씬 진보된 신 명칭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동학측과 천도교측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초월신관(시천주)과 내재신관(인내천)에 대한 논쟁은 서양 학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필자는 지적한다.
 
신의 초월과 내재의 문제
동학의 신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모든 신관에서 그러한 바와 같이 신의 ‘초월’과 ‘내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김경재는 그의 논문 〈동학의 신관〉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수운의 신관의 첫째 특징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궁극적 실재’는 단순한 천(天), 천명(天命), 이법(理法), 도(道), 법(法)이 아니고 ‘한울님’ 곧 ‘천주’라고 고백하고 체험하는데 있다. 한국인의 종교심성 속에 흐르던 인격적 한울님 신앙이 지표를 뚫고 다시 솟구쳐 나온 것이다. ‘시천주’의 해설에서 수운은 ‘모신다’는 의미 해설을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했다. 이 해설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한울님을 모신다’는 상태에서 인간과 한울님이 ‘주체-객체’의 대좌구조라는 분립상태이거나 법적 관계이거나 인과율적 역학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몸 안에서, 몸을 생물학적 분자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신령한 생명체로 형성하면서 불가분리적으로 현존하는 ‘내재적 초월자’, ‘초월적 내재자’」라는 뜻이다.
 
신관의 탈서구화
전형적인 유신론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세계에 대한 창조주로서 이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을 상정하고, 그는 전지전능하고 영원하며 자존하는 신인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유신론은 이원론을 조장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신의 인격성에 너무 과부화가 걸리게 되어 결국은 터져 버린 것이 19세기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 유신론의 사망선고이다. 이는 서구 신관의 탈인격화와 서구 논리의 탈서구화로 이어지고 결국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동양적 세계관으로 회귀하게 된다[화이트헤드의 신관]. 신은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서 자기완성을 지키는 독존적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신론에서처럼 신은 세계의 일부분도 아니다. 신학자 틸리히는 유신론의 초월주의가 문제라면 범신론의 내재적 자연주의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본질과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자체(Being-itself)이다.”라고 하여 전통신학을 지배해 오던 A형 논리를 버리고 E형 논리의 신관을 도입하였다. 필자는 여기서 ‘존재’와 ‘존재자체’의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물과 물고기의 예를 든다. 물은 물고기에게는 대상적 실체가 아니다. 물은 물고기에게는 ‘존재자체’가 된다. 물고기가 물을 자기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할 때를 ‘존재’라 하고, 물과 하나라고 생각할 때 물은 ‘존재자체’가 되는 것이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존재로서의 인격적 ‘God’에 대비해서 존재자체인 비인격적인 보편적 초월자로서 ‘Godhead’(神性)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존재의 자체권과 소유권
종래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은 존재의 자체권과 소유권을 구별하지 않은 데서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자체권과 소유권은 ‘제 자신의 성격’이 있느냐 없는냐에 따라 구별된다. 그래서 자체권과 소유권은 같은 범주에 넣어 생각할 수 없다. 종래의 존재론이 범한 과오란 바로 이 둘을 같은 존재론의 범주에 넣어 생각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둘을 최초로 다른 범주로 넣어 다룬 철학자는 화이트헤드이다. 그는 자체권을 ‘창조성’이라 하여 ‘궁극성의 범주’로 그리고 소유권을 ‘존재의 범주’로 각각 분류했다. 수운의 ‘至氣’에서 ‘至’가 갖는 의미는 결국 존재의 범주를 넘어서는 궁극성의 범주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수운은 ‘至氣’를 ‘虛靈’이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아무런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했다. 수운은 ‘至氣’를 통해 순수 자체권을 회복시키며 ‘天主’를 통해 소유권의 위치도 찾으려고 했다.
 

 

기독교와 불교의 소유권과 자체권의 문제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와 예수를 일치시켜 본다. 즉 불교가 말하는 법과 불의 문제를 동일시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세 공관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역사적 예수의 삶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예수와 로고스를 일치시켜 보면서 예수가 없으면 로고스가 있을 수 없으며 로고스 보다 예수를 더 강조한다. 이로 인해 진리자체(로고스)가 인격화된 신(예수) 밑에 종속되어 버렸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로고스를 깨달은 자가 아니라 진리자체이고 하나님이며, 예수(하나님)가 진리자체보다 더 선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쉽게 신격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기독교와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즉 붓다는 단지 진리를 깨달은 자일뿐 붓다 지신이 진리자체는 아닌 것이다. 실제로 붓다는 자신보다 자기의 말인 법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폈다.
 
기독교 신관의 왜곡
유대교 전통에서 유일신 개념이 처음 나타난 때는 모세부터이다. 모세가 본 야훼신은 엄연한 초월적이며 객관적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의 신관이 모세의 그것과 다른 점은 바로 그가 말한 “I and my Father are one”〈요한복음 10:30〉이란 말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예수의 법신적 신관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정립된 기독교는 4∼5세기 무렵부터 그들의 신관을 그리스 철학을 빌려서 다시 모세적 신관으로 후퇴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수가 발견한 법신적 신관을 기독교 신학 속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도리어 이단시하고 말았다. 서양 기독교 즉 서교는 2천여 년 동안 보신적 종교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은 균열되어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동양의 선택은 이와 반대였다. 법신이 보신을 배제시켜 왔다. 동양의 유교나 도교 그리고 불교는 인격적(보신적) 신으로서의 ‘상제’보다 비인격적(법신적) 측면의 ‘氣’나 ‘道’그리고 ‘空’을 더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수운은 ‘天主’와 ‘至氣’를 동시에 강조하여 보신과 법신의 조화를 이루는 신관을 제시하였다.
 
氣와 Creativity, 그리고 天主와 God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우주론에서는 서양의 존재론적 신학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이며 초월적인 의미를 갖는 신을 부정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 신은 현실적이면서도 비시간적인 존재로서, 무규정적인 창조성과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 ; 理)들을 매개함으로써 이 창조성을 규정된 창조성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을 갖는다2). 신은 창조성에 포섭되기는 하지만 거기에 종속되지는 않는다. 신과 창조성은 ‘내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성은 우주로 하여금 새로움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게 하는 힘이다. 우주는 至氣로 가득 차 있으며 天主는 거기서 창조의 재료를 가져온다. 천주는 모든 사실존재들 가운데 ‘주된 표본’으로서의 ‘主’일 뿐이지 결코 창조자나 초월자로서의 主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연의 창조성을 신의 전유물로 배속시켜 버렸다. 수운은 氣에 ‘至’를 첨가하고, 天에 ‘主’를 첨가함으로써 전통 氣나 天의 개념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려 했다. ‘氣’에 ‘至’를 첨가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더 철저하게 氣를 비인격화한 것[至者는 極言之爲니 至氣者는 虛靈이 蒼蒼하여 無事不涉하며 無事不命이라]이라 할 수 있고, 그와는 반대로 ‘天’에 ‘主’를 첨가한 것은 天을 더 철저하게 인격화한 것[主者는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요]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수운의 주문 속에는 철저한 인격화와 비인격화가 동시에 양방향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인격과 비인격의 두 요소를 모두 살려내는 방법으로 신관의 새로운 탈출구를 찾았다.
 
글을 마무리하며
우주가 분열의 선천시대와 통일의 후천시대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창조적 전진을 해나가듯, 학문 또한 분석과 종합이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그 창조력이 생긴다.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흘러 내려온 동서양 신관을 일관된 논리구조로써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수운과 화이트헤드의 신관을 통해 새롭게 종합하려는 필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필자는 수운과 화이트헤드의 만남이 앞으로 ‘세계철학’(World Philosophy)을 구축해 나가는 데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동학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사상이라고 자부하는데 조금도 서슴지 않는다.


글·박현호

출처: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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