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신화의 힘

2009.11.09 | 조회 2401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 고려원 / 10,000원


 되살아나는 신화
 지금 서점가에서는 신화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인터넷 검색에서도 신화가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신화가 문화의 새로운 조류로 떠오르고 있다는건데, 이를 통해서도 원시반본하는 후천가을 세상이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먼 선조들한테는 지금 우리가 신화라고 부르는 것들이 일상적인 만담漫談의 주제였을 터이다. 하지만 인지가 발달해 감에 따라, 용이 불을 뿜는 이야기나 신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야기들은 한낱 동화와 같은 유치한 수준의 이야기로 전락해 버렸다.
 
 이처럼 신화가 폄하당한 이후 이전에는 친근하기만 했던 하늘과 땅, 신과 정령, 그리고 빼어난 숫컷(英雄)들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우리는 현재 그 대가를 톡톡히 받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삶을 수천년 동안 떠받쳐 왔으며 가치체계를 틀지어 온 신화라는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지면서부터,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혼돈만을 양산해 왔다. 하지만 예전의 조화로운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금 신화가 들려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조셉 캠벨의 심오한 신화 이해
 무릇 신천지를 탐험하려면 안내 지도가 필요하듯이, 신화라는 미지의 영역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이에게도 그런 안내 책자가 필요하다. 신화에 대한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필자는 지난 85년과 86년 미국 PBS에서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 두 사람의 대담프로를 책자화 한 이 『신화의 힘』만한 책을 알지 못한다. 캠벨의 사상은 깊고 방대하지만 이 책을 통해 신화에 대한 어지간한 중요 개념은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캠벨은 ‘신의 가면’이라는 개념을 통해 본래 하나였던 신神이 어떻게 세계의 여러 문화권에서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신은 하나이되 현자는 이를 여러 이름으로 언표한다”는 『베다』의 구절을 빌어 선천 종교에서 각기 주장하는 신이라는 건 (한 유일신의) 메타포(은유)라고 하면서, 이러한 메타포는 각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즉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다 같이 삶을 신비에 이르게 하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깨치지 못한 인간들은 신의 참모습보다는 이름과 형상에만 집착함으로써 이 세상에 허다한 갈등과 분쟁만 일으키고 있다.
 
 “베이루트에는 서양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받고 합니다. 왜?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메타포에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폐쇄회로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싸움박질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평화의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캠벨은 지모신 가이아의 이름을 빌어 남신들의 투쟁의 마당을 평화의 꽃밭으로 바꾸어 놓으려 한다.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낡은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 것이지 우리 것은 더 이상 아닙니다.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는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인데, 유감스럽게도 서구에는 이런 것이 없어요.”
 
 메타포를 통해 인류의 누천년간의 대립과 분쟁을 종식할 그 날을 꿈꾸었던 캠벨은 좁은 학제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화인류학, 철학, 예술, 심리학, 역사학, 종교학, 물리학, 생물학 등 다방면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이런 캠벨이 여신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자.
 
 “여신女神에 대한 신화는 돌아오고 있어요. 요즘의 젊은 과학자들이 형상을 낳는 장이라는 뜻으로 형태발생의 장1)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던가요? 이것이 바로 여신입니다. 바로 형상을 낳는 장입니다. … 여신은 마르지 않는 생명의 근원인 심연입니다.”
 
 캠벨은 계속해서 왜 하필이면 인간을 타락케 한 주인공으로 뱀이 등장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뱀은 새 삶을 살도록 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뱀은 여자를 꼬드겨 남자로 하여금 사과를 먹게 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여성과 뱀이라는 왜곡된 등식이 성립됨으로써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여자는 뱀과 더불어 원죄의 주범으로 매도당하게 된다. 하지만 캠벨은 여성 또한 삶의 원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타락의 책임을 뒤집어 쓴 억울한 존재로 파악한다.
 
 “수메르의 봉인에는 뱀과 나무와 여신女神과 남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나그네인 남자에게 생명의 과실을 주고 있지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무대로 나올 수 있으며 - 여자가 사람을 낳는다는 상제님 말씀을 생각해 보라 - 이는 다시 말하면 대극對極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담자인 모이어스는 캠벨에게 이 ‘대극’에 대해 묻는데, 이에 대한 캠벨의 답변은 뱀에 대한 상징과 더불어 기독교의 신관, 인간관, 시간관, 윤리관, 구원관이 가진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동산이라고 하는 꿈의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낙원에서는 하느님과 인간도 실제로는 같습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兩極)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이 두 사람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식하게 되어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신과 인간)입니다. 하느님과 악마(선과 악)는 제3의 대극이고요.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단지 이원성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대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신의 첫 저서의 제목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으로 삼았듯이 그는 신화 모티프 중에서도 영웅의 삶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캠벨은 세계의 많은 종교, 신화, 전승에 나오는 영웅의 행적을 분석하면서 영웅 신화는 한마디로 “자신을 버려 보다 높은 목적이나 타인에게 주는 삶”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종교가 싸구려 기복신앙으로 전락하게 된 오늘날에는, 영웅의 여정은 엄청난 시련으로 점철되었으며 극기克己와 대가의 지불 없이는 상도 없다고 가르친 고대의 메시지를 까맣게 잊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캠벨이 홍익弘益에의 탐색이라고 부른 이러한 영웅의 여정은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보다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보다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어떤 것을 만난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 모세, 붓다, 예수, 무하마드와 같은 인물들이 그 전범典範으로서, 그들은 앞에 가로놓인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메시지를 갖고 돌아와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고, 새로운 도시를 세웠으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웠다(신화학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한 인물을 특히 문화영웅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러한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캠벨은 그대의 천복을 찾아내되, 그 천복에 따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내가 어떻게 그걸 할 수 있겠어요” 하고 반문하는 사람은 자기 내부의 용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며(용은 분석심리학에서는 우리의 잠재성을 억누르고 있는 자아와 탐욕을 상징한다),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밝은 광명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기 때문에, 신화의 메시지를 따르는 이는 용의 속박을 깨뜨리고 보다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고 가르친다.
 
 캠벨은 영웅의 모험을 이야기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한다. 그는 살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 직면해서 그것을 이겨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용變容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그 변용의 방법으로써, 고통을 경험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의 고통에 참여하라고 권하고 있다. 니체의 말처럼 주어진 운명을 긍정하고 그것을 사랑(아모르 파티, 운명에의 사랑)하면서 그 상황을 극복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진다는 것이다.
 
 캠벨에 따르면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의 하나되기(at-one-ment)여야 한다. 캠벨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냐”고 묻는 모이어스의 말에 대해 그것이 곧 초대 기독교 영지주의靈知主義와 대승불교의 관념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자기와 자기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사실은 하나임을 깨달은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힌두 경전에 있는 “오직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을 통해 신을 경배하자면 나 자신이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따르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캠벨은 원圓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원에는 공간적 측면과 시간적 측면이 있다. 원은 공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체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시간적인 측면으로 보면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원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오직 돌고 돌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캠벨은 자궁womb과 무덤tomb의 신비에 대한 놀라운 성찰을 던진다. 즉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재생을 위한 준비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과정이요, 탄생은 죽음을 향한 과정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툼tomb과 움womb이라는 말 맞춤을 통해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이라는 주제로 가보자. 힌두 신화에 따르면 이 세상의 종말이 오면 비쉬누는 무서운 괴물로 나타난다. 그는 우주를 쓸어버리는데 처음에는 불로 그 다음에는 물로 쓸어버린다. 남는 것은 재밖에 없다. 캠벨은 이런 파괴자 역할을 맡은 신을 이야기하면서, 이 상황에서는 윤리적 판단이나 도덕적 교훈이란 사치스런 소리라고 일갈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은 오직 사랑이고 용서라고 하는 기성 종교의 허망한 관념을 일거에 뭉개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심판의 날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캠벨은 자신의 생명이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을 다음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예수가 이 세상에 가지고 왔다는 칼은 생명을 에누리없이 거두어들이는 칼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우리의 자아를 자르는 칼이라는 것이다. 즉 이 칼은 현세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의 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는 그러한 시간의 장場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의 장에는 영원의 원리가 스스로 드러난다. 즉 영원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은 둘이 아니기에 분별의 지혜를 체득한 이는 이 현세 안에서 영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며, 이로써 그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머리에는 해골과 초승달을, 양손에는 영원에 대한 앎을 가로막는 째깍거리는 조그마한 북과 시간의 너울을 태우고 우리를 영원으로 열어주는 불꽃을 들고 있는 저 유명한 시바의 이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바의 이미지에서 춘생추살하는 우주의 공의를 집행하는 상제님의 이미지가 떠올려지지 않는가!
 
 
 제3의 초종교를 염원하며
 조셉 캠벨이 융의 심리학에 경도傾度되었다고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필자는 이 캠벨만큼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언어로 신화 메시지를 들려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더군다는 필자는 지난 95년 텔레비젼에서 캠벨을 화면으로나마 직접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였다. 필자는 그 때 캠벨의 온 몸에서 풍기는 은은하면서도 따뜻한 느낌과 특히 지혜로 가득 찬 그의 사랑스런 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선천 종교의 한계를 극명하게 깨우쳐주는 캠밸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본고를 맺기로 한다.
 
 “해탈을 지향하는 인도의 요가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빛의 단계에 이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출처: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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