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FLU 독감

2009.11.09 | 조회 2524

독감 Flu : the story of the great influenza pandemic of 1918 and the search for the virus that caused it
 
지나 콜라타| 안정희 역| 사이언스북스| 2003.12.15 | 438p | ISBN : 8983711426


① 페스트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나?
"법과 질서 무시, 오직 자신의 안전과 쾌락만 추구"
지나 콜라타의 ‘FLU 독감’ 中에서

2009-09-04 16:00:57 [ 조명희 기자 ]

기원전 아테네에서 발생한 공포의 질병. 아테네를 덮친 공포의 전염병…투키디데스의 기록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로 유명한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장군 투키디데스는 연대기에 기록된 전염병 역사의 서두를 장식할 만한 무서운 장면을 저서에 남겼다.

투키디데스는 BC 431년 경 아테네 시민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에 **가는 모습을 묘사해 놓았다.

젊은 투키디데스는 “어느날 갑자기 건장한 그리스 젊은이들이 심한 고열에 시달렸다. 눈과 목구멍, 혀 등이 붉게 충혈되더니 각혈을 하고 숨을 내쉴 때 마다 악취가 풍겼다”고 당시 상황을 적어 놓았다.

환자들은 모두 심한 기침을 했고 가슴에 통증을 느꼈고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내장이 경련하는 동안 헛구역질을 했고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열이 오르자 환자들은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움과 갈증을 참지 못해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의사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지만 어떤 물약이나 연고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었다. 환자들과 접촉한 의사들조차 전염되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이번엔 신전으로 몰려 들었다. 하지만 그 또한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놓아버린 체 죽음을 기다렸다. 공포에 압도딘 사람들은 이 병의 처음 증세인 콧물이나 두통이 나타나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병에 걸릴 것을 염려한 건강한 사람들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고 환자들은 친구, 친척, 이웃들의 무관심속에 **갔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면서 안 보이는 곳에서만 몰래 하던 나쁜 일을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행하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신들이나 법에 대한 두려움이 더 이상 사람들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신들을 숭배하든 숭배하지 않든 모두가 똑같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았는데 신들을 숭배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죄를 지어도 법정에 불려갈 만큼 오래 살지도 못할 텐데 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염병 이후 아테네는 예전과 달라졌다. 쾌락을 가져오는 모든 일들이 유용한 가치로 여겨졌다.

‘FLU 독감’의 저자 지나 콜라타는 “투키디데스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연맹과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가 바로 전염병 때문이라고 암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일 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테네 사람들의 생명을 포함해 그들이 정성들여 건설한 사회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황폐화 시켰던 괴물 같은 전염병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천년 후 다시 공포의 괴질이 나타나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증세는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나타난 환자들과 비슷했다.

‘흑사병을 몰고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년 작품 (사진 : Wikipedia) 중국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진 흑사병

오랜 전염병의 역사 속에서 빼놓고 지나갈 수 없는 공포의 전염병이 또 하나 있다. 그 질병의 정체는 바로 흑사병이다. 흑사명은 1331년 중국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다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당시 흑사병은 중국 인구 절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교역로를 따라 이동해 15년 후인 1346년 크림반도에 도착했다. 이후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으로 세력을 넓혔다.

흑사병은 아테네에서 발생했던 증상과 아주 유사했다. 흑사병이라고 명명된 그 이름이 말해주듯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는 그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궁쥐의 몸에서 사는 벼룩이 옮긴 페스트균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시궁쥐는 배를 타고 항구에서 항구로 이동했고 쥐벼룩들은 사람들을 물어 페스트균에 감염시켰다.

하지만 만일 쥐벼룩에 의해서만 전파된 것이라면 인류가 그처럼 심각한 타격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몸에 침입한 세균은 허파를 감염시켜 폐렴을 일으켰고 감염된 사람들은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켰다.

흑사병이란 사신이 찾아오기 전까지 유럽은 300년 동안 비교적 질병에서 자유로웠다. 인구가 3배로 늘어난 유럽의 문명은 한창 번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죽음의 그림자기 깃들자 1347년과 1351년 사이의 짧은 기간에 유럽인구 1/3이 어떤 저항도 못한 체 생명을 잃었다.

당시 이탈리아 시에나 시에는 인구 6만 명이 거주했지만 절반이 사망했다. 시에나 시에 살았던 아뇰로 디 투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희생자들은 거의 즉시 사망했다. 겨드랑이 아래와 음부가 퉁퉁 부어올랐고 멀쩡히 말을 하다가 꼬꾸라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이를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으며 형은 동생을 버렸다. … 사람들은 시에나 곳곳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수많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파묻었다. … 구덩이가 다 차면 더 많은 구덩이를 팠다. … 하도 많이 **서 사람들은 모두 세계의 종말이 온 것이라고 믿었다.”

<데카메론>의 저자 조반니 보카치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썪어가는 시체에 의해 감염되는 것이 두려워 한 사람들이 시체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쓰레기처럼 치워 가도록 문 앞에 버려두었다고 썼다.

보카치오는 당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부류는 사회와 자신을 격리시키고 외부인과 만나지 않았다. 집안에서 맛좋은 음식과 값비싼 와인을 적당히 소비하며 부음이나 아픈 사람들에 대한 전갈도 거부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고안해 낸 갖가지 오락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한 부류는 흥청망청 환락을 즐기며 자신이 원하는 모든 욕망을 채웠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청거리며 갖은 방법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부동산, 재산을 버리고 도망쳤다. 농부들은 밭을 갈지 않았고 가축도 보살피지 않았다. 그제야 마치 더 이상은 감염시킬 여력이 없다는 듯 흑사병은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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