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스티브 잡스 이야기

2010.08.07 | 조회 2978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신념으로 세상을 바꿔라


 이명진 / 증산도 본부
 
 
 짐 코리건 지음 | 권오열 옮김 | 명진출판 | 308쪽 | 12,000원
 
 기술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혁명가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 스티브 잡스. 책 표지에서 살짝 보인 그의 눈빛과 미소에서 그의 번득이는 호기심과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팟으로 잘 알려진 ‘애플’(Apple)을 창업한 사람이다. 엄청난 부를 가졌지만 공식 석상에서 맵시 있는 슈트 대신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는 개성 강한 사람이다. 컴퓨터 마니아였고 20대에 컴퓨터 회사 창업자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IT 기업가라는 호칭 대신‘우리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우리들의 생각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세 가지 매체인 컴퓨터, 영화, 음악의 중심에 존재하는 그의 이야기로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엔지니어 아저씨들과 놀던 소년기
 어린 시절의 스티브 잡스는 텔레비전 보기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오늘날 미국 최첨단 벤처 산업의 중심지인 실리콘 밸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휴렛패커드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여러 전자회사에 다니는 유명한 엔지니어들이 옆집, 윗집, 아랫집 등 스티브의 바로 이웃에 살았다. 엔지니어 아저씨들은 총명한 스티브에게 전자 부품을 이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스티브에게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스티브의 양부모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뭘 원하는지, 아이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일찌감치 간파할 줄 아는, 좋은 부모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폴 잡스 부부는 스티브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총명하다고 해서 자기들의 바람대로 키우려 하지 않았고,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롤러코스트 같았던 사춘기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성격이었던 스티브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이였다. 열한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맹렬함과 의지는 어른 못지않았다. 맹렬한 집중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그의 천성은 이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티브가 처음 컴퓨터를 본 것은 열 살 때로 에임즈의 나사(NASA) 연구소에서 사용하던 단말기였다. 복잡한 계산을 한순간에 해내는 단말기에 그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이때는 전자 기술의 소형화에 혁신을 일으킨 집적회로 IC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집집마다 차고에는 예비부품들과 못쓰는 장치들이 넘쳤고 스티브에게는 언제고 숨어들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지트였다.
 
 스티브의 친구 페르난데스는 스티브를 자기네 집차고로 데려가서 워즈니악과 함께 만든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애플의 동업자가 된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스티브와 워즈는 실리콘밸리의 젊은 기술자들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컴퓨터 제품과 전자 제품 분야의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랐다. 두 사람에게는 컴퓨터가 애인이자 친구였으며 취미이자 장난감이었다.
 
 
 스무 살, 컴퓨터에 인생을 걸다
 스티브 잡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동업자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환상의 콤비였다. 워즈는 컴퓨터에 대한 천재적인 기술이 있었고 스티브는 그 기술이 세상에 어떻게 영향력을 미칠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시행착오 끝에 만든 블랙박스는 전화망을 해킹하는 행위로 전 세계에 공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걸 팔아 고등학생 신분으로 꽤 많은 돈을 만질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면서 합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었기에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획일적인 대학 공부에 흥미를 못 느낀 스티브는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했다.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의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스티브는 인도로 갔다.
 
 인도에서 그는 탁발승처럼 동냥하면서 여행했다. 그러나 여행이 계속될수록 차츰 인도의 실제 모습에 혼란을 느꼈다.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도 중요하지만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혁신이야말로 세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란 생각,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심장 한 가운데서 씨앗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인도에 다녀온 후 스티브는 휴렛패커드라는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던 워즈와 함께 동업하기를 원했다. 스티브의 지속적인 격려와 끈질긴 설득에 워즈는 굴복하고 말았다. 1976년 4월 1일 워즈와 스티브는 회사 지분을 똑같이 나눠가지며 마침내 회사를 창업했다.
 
 
 컴퓨터 마니아, 사업가가 되다
 스티브는 자신들의 회로기판에 인상적인 이름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오리건 주의 사과농장에서 선(禪) 애호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조용히 생각할 것이 있거나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사과농장을 찾곤 했다.
 
 그날도 사과농장에 다녀오는 길에 애플을 떠올렸다. 실제로도 사과를 좋아한 스티브는 워즈의 동의를 얻어 결국 회사이름을 자연친화적인 애플로 정했다. 애플의 로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 입 베어 문 사과모양인 바이트 애플(bite Apple)이다. 바이트(bite, 베어 물다)는 컴퓨터의 비트(bit), 바이트(byte)와 발음이 유사해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도 바이트 애플은 애플을 상징하는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애플의 첫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칠 즈음, 사회는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경쟁업체들과 겨루기 위해서 자신들의 약점인 마케팅 전략을 보완하고자 최고의 광고맨을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열정을 다해 설득하고 감성에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든든한 지원군과 자금력을 갖추게 된 애플은 탄력을 받아 눈에 띄게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자본금 1,000달러로 애플을 세웠다. 워즈의 기술과 스티브의 야심만으로 4년 뒤 소유재산 2억 달러가 넘는 재산가로 우뚝 섰다. 애플의 놀라운 성장은 월스트리트 기업 분석가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스티브는 20대 초반에 거부가 되었으나 비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서서히 애플사의 내부에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애플 컴퓨터는 사실상 경쟁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으로 완벽한 컴퓨터를 만들려다 보니 천문학적인 가격 수준의 애플Ⅲ와 리사 프로젝트의 결과는 절망적이었고 애플사에도 큰 위기가 찾아왔다. 애플사는 펩시의 최연소 사장인 스컬리를 리더로 내세웠고 스티브는 다시 매킨토시 컴퓨터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스티브는 팀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는 했지만 “우주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컴퓨터를 만들자!”고 팀원을 독려했다. 터무니없이 무모한 목표였지만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엔지니어들에게 그 말은 더 할 수 없는 용기와 사명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1985년 매킨토시 판매는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다. 스티브의 말만 믿고 회사의 사활을 매킨토시에 걸었던 애플사는 스티브의 독선적인 경영 방식이 회사에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스티브는 더 이상 애플 컴퓨터에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애플을 떠난다는 것은 명백한 실패를 의미했다.
 
 
 회사를 잃었다고 꿈조차 잃을 순 없다
 나중에 스티브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시기는 제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애플에서 쫓겨난 경험은 매우 쓴 약이었지만 어떤 면에서 환자였던 제게는 정말로 필요한 약이었죠.”
 
 그는 곧 새 컴퓨터 회사를 차렸고 이름은 넥스트(NeXT)로 지었다. 소문자 e는 교육(education)을 의미했는데 그것이 바로 넥스트가 겨냥한 새로운 시장이었다. 넥스트의 투자자들 중에는 GM의 이사였던 텍사스의 억만장자 로스 페로도 있었다. 일본의 거대한 프린트 제조사인 캐논도 이 시류에 동참했다. 스티브의 열정과 재능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에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넥스트에서 한창 고성능 컴퓨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스티브는〈스타워즈〉의 감독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컴퓨터 그래픽 부서를 팔고 싶어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스티브는 이 천재들에게 단숨에 매료되어 루카스와의 승부수를 띄워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 그래픽 팀과는 공동 창업주가 되어 픽사(pixar)라는 이름을 붙였다.
 
 픽사의 그래픽 팀은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틴 토이〉를 탄생시켰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거머쥐게 되었고, 스티브는 제작자의 자격으로 시상식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실리콘밸리의 유명인사 자리에만 만족했던 그에게 할리우드는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넥스트에서 스티브가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고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가격은 천정부지로 높아졌고, 그것이 제품의 경쟁력을 잃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었다. 스티브는 넥스트와 픽사를 운영하면서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스티브는 회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또 한 번의 승부
 픽사가 거둔〈틴 토이〉의 성공은 디즈니를 불러들였다. 스티브에게 디즈니와의 계약은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그 계약은 스티브는 물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더 큰 성공을 불러왔다. 픽사는 존 래스터 감독으로 하여금 〈토이 스토리〉라고 불리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했다.
 

 1995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개봉된 〈토이 스토리〉는 미국에서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역사상 100대 영화의 대열에 올랐다. 스티브는 조지 루카스로부터 애니메이션 그룹을 사들인 후 9년 동안이나 픽사를 힘겹게 이끌어왔다. 하지만〈토이 스토리〉가 성공한 이상 픽사는 더 이상 돈먹는 공룡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번 억만장자가 되었다.
 
 스무 살 인도에서 돌아오면서 막연히 꿈꾸었던 것,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애플에 이어 픽사의 애니메이션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즈음 스티브의 안목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돌리면서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용자, 즉 관객의 경험이었다. 그것이 곧 콘텐츠였다. 이제 스티브는 픽사를 통해 기술이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픽사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
 
 
 좌절 속에 넥스트가 다시 일어나다
 픽사의 예술가들이〈토이 스토리〉를 만들 동안 넥스트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 그의 컴퓨터들은 하나같이 실용적이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그는 컴퓨터를 살 때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디자인보다는 가격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넥스트 컴퓨터가 제대로 팔리지 않는 이상 방법을 바꿔야 했다. 스티브가 가까스로 넥스트의 파산을 막아내고 있을 즈음 애플은 점점 시장 점유율을 잃어가고 있었다. 애플은 새로운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대신 다른 회사에서 좋은 운영체제를 구입하기로 결정했고,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넥스트 스텝이었다.
 
 애플이 넥스트 스텝에 관심을 보인 것은 스티브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굉장한 기회로 다가왔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 그리고 자기를 쫓아냈던 회사 애플이 넥스트 스텝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유배당한 지 20년 만에 숱한 고초를 겪던 그가 다시 애플로 돌아왔다.
 
 
 10년 동안 애플은 달라질 대로 달라지고
 스티브는 냉철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애플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저는 스물셋이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스물넷에는 억만장자가 되었고, 스물다섯이 되었을 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더군요. 저는 돈을 위해서 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로지 잠자기 전에‘우린 놀라운 일을 해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사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느 해 맥월드 기조연설에서 스티브는 이렇게 말했다. “날마다 회사에 가면, 애플이든 픽사든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일입니다.”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 우주에 충격을 주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일, 그런 일들이야말로 스티브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었다.
 

 애플에 다시 복귀한 스티브는 과거의 실수를 통해 배워나갔고, 1998년 출시된 아이맥은 1년 동안 200만대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스티브는 상품에 영혼을 불어넣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회사에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았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만들고 싶고 그것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는 스티브의 오랜 열망은 아이팟(iPod, mp3플레이어)을 등장시켰다. 2001년 당시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에서 가히 혁명을 일으킨 제품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휴대전화 기능을 갖춘 아이팟으로서 아이폰(iPhone)이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그는 애플의 제품을 단순한 전자 제품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스티브의 이러한 품질에 대한 열정이 바로 애플의 성공을 이끈 초석이었다.
 
 
 눈부신 성공과 함께 주어진 또 한 번의 고통
 애플로 돌아와서 승승장구하던 스티브 잡스는 20대의 벼락 성공 이후 인생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하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췌장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다행히 수술 후 회복되었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티브는 성공과 실패로 점철된 오랜 세월의 비즈니스 경험을 통해 리더가 가져야 할 덕목들을 차근차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갔다. 무엇보다 스티브의 가장 훌륭한 자질은 목표를 추구할 때 대담성과 끈기를 가지고 임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목표달성을 위해서라면 대담한 모험도 기꺼이 무릅썼다.
 
 2009년〈포천〉지는 스티브 잡스를 미국 기업을 바꾼 최근 10년간 최고 CEO로 인정했다. 한때 약점 투성이로 평가되었던 그의 진정한 실력을 세상이 다시 인정한 것이다. 그는 불굴의 의지와 자신감으로 눈부신 업적을 쌓아왔고, 신이 그에게 시간을 허락하는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살아가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이 책을 통해 필자는 스티브 잡스 역시 인류를 새로운 문화의 시대로 인도하는 사명자로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혁명적 구도자로서의 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열쇠를 손에 쥔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되려면,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창의성과 열정, 대담성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스티브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입양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감과 베짱이 두둑했으며, 뭐든 원하는 대로 목표를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늘 아이디어가 번뜩였고 언제나 창조적인 에너지가 따라다니곤 했다. 스티브의 생각은 이랬다. “실패? 그거 좀 하면 어때. 결국 최후의 승리가 중요한 거 아냐?”
 
 나이에 상관없는 영원한 청년의 모습, 약점이 많지만 그것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쿨~한 스티브! 그가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차가운 전자기기에 따뜻한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고, 완벽하지 않아도 자신의 꿈을 이루며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매일 매일이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과학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고 있다. 스무 살 때 스티브는 기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컴퓨터와 기술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 역시 기술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주 가을 진리, 증산도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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