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CEO 세종대왕

2009.11.09 | 조회 2095

CEO 세종대왕 인간경영 리더십
 
 정리ㆍ강권창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
 많은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세종대왕을 꼽는다.
 
훈민정음 창제와 측우기, 해시계 등의 많은 발명품을 남겼으며, 대한민국 만원권 화폐의 표지모델이기도 한 그의 훌륭한 업적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위업을 이룰 수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과연 세종대왕이 조선의 요순시대를 이룬 임금이라 칭송을 받고, 후손에게 길이 추앙받을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그의 시대에만 유독 뛰어난 과학자, 음악가, 장군 등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사에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는 없다. 그의 위업은 사람을 발탁하고, 관리하고, 적절히 배치하고, 육성하는 관리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라고 밝혀주고 있다.
 
세종대왕이 어떤 식견을 가지고 어떻게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젝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서양의 경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시대의 변혁을 꾀한 리더 세종대왕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불멸하는 추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세종대왕이 가슴속에 품었던 의지를 ‘긍정적인(포지티브한) 허무’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그가 국초 국말의 권력쟁투와 무너져가는 인간사의 허무에서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었고, 그것이 다시금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세종은 국초에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태종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세종의 심중에는 ‘적극적인 역사 개척보다는 허무에 기반을 둔 인간사와 인생에 대한 연민’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가 역사를 이끌어간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의 두 형들은 골치 아픈 왕의 자리에서 도망쳤다. 첫째 형은 미친 척했고, 둘째 형은 중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이 선택한 길은 노자의 도(道)인 ‘대은(大隱)은 어시은(於市隱) : 깊게 은둔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시장 속에서 세상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세종이 평생 실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와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함)은 또 다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으며, 말년에 지은 「월인천강지곡」에는 이러한 세종의 이상이 잘 녹아 있다.
 
 
세종은 무엇보다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탐색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뒤 인재 부족으로 인한 국정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수급과, 백성들의 새 왕조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 민생고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다. 세종은 태종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시대적 요구사항을 고민하며 준비해 나갔다.
 
저자는 “세종은 그 자신의 영달 때문에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피로 얼룩진 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스림의 요체는 마음을 닦는 것
 
백성과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심법으로 국가를 경영했는가.
 
`총명(聰明)하다’는 말에서 총은 ‘귀 밝은 총’ 자이다. 즉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의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세종의 강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군주로서 세종의 생활은 온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심성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노하지 않아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우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진정한 강자만이 약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세종이 황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물었다. “두문동에 머물러 있지 뭣 하러 세상에 다시 나왔는가?” 황희는 이렇게 대답한다. “일찍이 진리탐구에 열중할 뿐 과거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백성을 위하여 멸사봉공하는 것 또한 군자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일러주신 부친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애초에 황희는 태종의 사람이었고 양녕대군을 옹위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의 청렴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시자를 붙여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총명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고 서로를 믿었으면, 세종이 황희를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케 하고 20여 년을 정승의 자리에 앉힐 수 있었겠는가. 황희는 평생 세종의 정치적인 조력자이자 선생으로 묵묵히 세종을 보필한 신하로 남았다.
 
 
또한 세종은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경우 스스로가 누리는 왕위도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국가가 안정하게 존속하려면, 충분한 군사력[足兵], 충분한 먹을거리[足食], 그리고 백성의 신임과 마음[民信]을 모두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부득이 하게 이들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려야 하고, 다음은 먹는 것을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백성의 신임과 마음임을 강조한다. 세종은 백성들과의 마음의 화합이 더 본질적이요 더 우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려조가 망한 원인에 대해 세종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그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임금이 되었다.
 
 
인재 발굴만이 개혁의 힘이다
 
세종이 인재를 선출하고 키우는 과정에는 유난히 배울 점이 많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재능있는 부하에게 관대하였고 왕이라고 해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세종이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신하를 뽑는 과거에서 성삼문이 장원을 해서 임금 앞에 나섰다. 세종이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하자, 성삼문은 “어떤 배경인지만 하문하시니 적잖게 실망했습니다.”라며 직언을 올린다. 이때 대전 내시가 “쉬이∼”하며 주의를 주자, 오히려 성삼문은 “대전 내시 주제에 감히 신하가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는데 중간에 ‘쉬이∼’하고 나서다니”하며 호통을 쳤으며, 이에 세종은 “앞으로 과인에게 직언으로 대하고 많이 도와달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성삼문은 이 일을 통해 ‘이러한 군왕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하겠노라.’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종은 장영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도 고리타분한 신분론에 대해 일일이 반박해 신하들을 설복시켰고,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도 신하들의 반대 상소를 일일이 다 읽어가면서 논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왕의 신분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기에 당시 세종의 학식을 따를만한 신하가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태종은 즉위 기간 동안 총 학술 경연이 4회였던 데 반해, 세종은 총 1800회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았던 세종은 작은 재능이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신하를 훈련시킨 강유(强柔)를 겸비한 임금이었다.
 
 
훌륭한 리더는 훌륭한 인재를 경영할 뿐
 
세종이 인재를 발탁하는 요령은, 최종적으로 발탁할 때까지 비밀에 부치고 인재들 간에 경쟁심과 긴장감을 유발시켜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는 신하들의 자발적인 열의를 이끌어내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러면서도 노신(老臣)들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 장단기적인 목표를 세워 두고 노장청(老長靑)의 조화를 잘 이끌어내었다. 저자는 이러한 세종은 인재관리법이 한국인의 특색에 적합한 방식이라 평한다.
 
 
또한 세종은 일회적인 목표 제시로 끝내지 않고, 끊임없는 사후점검을 통해 아랫사람들을 독려하였다. 그는 상급 관청과 하급 관청에서 점검과 잔소리에 지쳐서라도 일을 이행하게 만드는 임금이었으며, 부하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부 보고자들의 은밀한 비공식 보고에도 귀를 기울였다.
 
새벽경연은 신하들에게 늘 바늘방석이었다. 아침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대신들에게 공부를 안 한다는 잔소리를 해대고 닦달하였으며, 지각을 하는 신하에게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통을 쳤다.
 
세종은 부국강병을 위해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고양시키기 위해 늘 고민했다. 또한 왕실의 종친이라도 사사로이 특혜를 주는 경우가 없이 늘 공변되게 인재를 관리하였다.
 
 
역사가 요구하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천하사를 하는 자는 항상 생각이 멀고 깊어야 하고, 불시의 일에 대비하여야 하며, 경계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도전』 8:56) 하신 증산 상제님 말씀처럼, 조선의 임금인 세종은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문제를 먼저 자각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서 파수꾼처럼 늘 깨어있는 임금이었다. 논쟁에 있어서도 모르는 것이 없어야 했고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임금은 또 아파서도 안되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와 늦은 밤 호흡을 가다듬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정신수양을 통해서 임금의 사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와 힘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일생을 백성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훌륭한 임금이었고, 또한 국방에 임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는 사령관이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엄격한 지휘관이었고, 신하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열정과 깊은 겸손의 덕으로 한없는 본보기가 된 국가의 최고 경영자였다.
 
무엇보다 세종은 시대정신을 읽을 줄 아는 임금이었다. 국초 국말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은 시대를 다스려야하는 군주에게 어떠한 형극의 길이 펼쳐질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시대의 요구를 결코 회피하지 않은 천명에 눈뜬 임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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