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고구려를 길러낸 우리 뿌리 이야기

2009.11.09 | 조회 2669

글ㆍ강권창
 
저자 고동영은 40년간 상고사를 연구하였고 이와 관련된 책을 번역하면서 쌓은 학식을 토대로 누구나 쉽게 우리 상고사를 접할 수 있도록 이 책을 내놓았다.
 
책의 내용은 시대 순으로 78편의 단편이 이야기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책 속의 삽화는 『만화 한단고기』의 저자인 한재규가 그렸다.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 전문 지식이 없이는 접하기 어려운 상고사에 관한 고서들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할 우리 문화유산을 알기 쉽게 동화처럼 꾸며놓았다.
 
예를 들면 강강술래의 유래, 무궁화가 나라꽃이 된 유래,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한글의 기원 등 고구려를 길러낸 문화유산들. 나아가 우리 겨레를 이어온 뿌리 이야기들이 소개되어있다.
 
 
제1장, 돌면서 춤을 추며
 
인류의 시원 국가이면서 인류문명의 모태인 환국에 대해서 소개를 하였다. 인류의 최초 국가인 환국을 연 시조는 나반과 아만이라고 한다. 환국은 12개 연방국가로 되어 있다. 과학자들이 DNA 분석을 통해서 밝혀놓은 사실은 가장 오래된 계통이 아시아인이라는 것.
 
초대 환인이 즉위할 때, 돌로 쌓은 단 주위에 심었던 꽃이 무궁화라고 한다. 또 제5대 구을단군도 제천단을 쌓고 그 둘레에 무궁화를 심었다. 또한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무궁화를 꽂고 다녔다고 해서 ‘화랑’이라 불렸는데, 단군시대에는 ‘천지화랑’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내린 어사화도 무궁화다. 이처럼 무궁화가 우리 겨레의 꽃이 된 것은 아주 오랜 역사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그리고 환인이 즉위할 때, 모든 백성들이 환인의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며,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의 은덕을 노래하면 나라가 잘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이는 지금의 ‘강강술래’와 같은 놀이문화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제2장, 머리 땋은 사람들
 
2장에서는 환국에 이어서 배달국을 소개한다. 문자, 철학, 청동기 등 모든 인류문명의 핵심은 배달국에서 나온다. 배달국은 동양문명의 기초를 세우고 나아가서 인류문화의 기초를 세운 국가이다.
 
배달국은 서기전 3897년부터 2332년까지 18명의 환웅이 다스렸다. 이때부터 머리를 땋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생활에 필요한, 부부간, 형제간, 어른에 대한 예법이 있었으며, 의식주에 관한 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머리 땋은 사람들”을 제2장의 제목으로 내세운 저자의 생각은 머리 모양을 갖추는 것이 최상의 문명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예법과 문명의 기틀이 배달국에서 비롯되는데, 당대의 다른 민족과 머리모양의 차이가 확연했을 거라고 본다. 그럼 배달국에서 처음 나온 문명을 소개하겠다.
 
먼저 한자의 유래를 보면, 6천 년 전 배달국의 신지현덕이라는 분이 고안한 ‘녹도문’에서 유래 한다.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어서 ‘녹도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녹도문이 하나라 시대에 ‘갑골문’이 되었고 갑골문이 중국 한나라에 이르러 오늘의 ‘한자’형태로 발전되었다.
 
한자는 워낙 글자 수가 방대해서 어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6천년부터 계계전승하면서 한나라에 이르러서 완성이 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고조선시대에 제3대 가륵 단군 때에 을보국 박사가 처음 38자의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는데, 지금의 한글과 모습이 흡사하다.
 
<훈민정음> 첫머리에 ‘한글은 옛 글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가림토 문자를 말하는 것이다.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 때에 백성들에게 병들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으로 ‘삼신수행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인 태호 복희씨는 동양사상의 뿌리가 되는 하도와 팔괘를 그렸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14대 치우천황 때, 자부선생이 환역을 만들었는데, 이것의 역(易)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4대 치우천황은 갈로산에서 광물을 캐서 처음 청동기를 만들었다. 치우천황은 백전백승하는 전쟁의 신[軍神]으로 월드컵 붉은악마가 바로 치우천황을 캐릭터화한 것이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치우천황에 대해 “구리 머리에 쇠 이마”라고 서술하고 있다. 씨름의 유래도 치우의 놀이, 즉 “치우희”라고 해서 머리에 소뿔을 달고 서로 밀쳐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를 각저라고 하며, 고구려 각저총에 벽화가 있다.
 
제8대 안부련 환웅시대에 신농씨가 백초를 맛보아서 약초와 독초를 가려내는 등 동양의학의 시초를 열었다. 또한 신농씨는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농업의 시초가 되는데, 서울 청량 근방에 있는 종암 초등학교에 사방 4미터가 되는 돌로 만든 단이 있는데, 이것을 “선농단”이라고 한다. 이는 신농씨의 업적을 기리는 단이라고 한다.
 
임금이 이곳에 와서 제물을 바치고 직접 밭을 갈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의 중요성을 깨우쳤다고 한다. 제사가 끝나고 소를 잡아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것을 “선농탕”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제3장, 도산에서 만남
 
고조선은 18대 거불단 환웅과 웅족의 황후 사이에 태어난 단군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하였다. 이때의 유적으로 마리산의 참성단과 정족산의 삼랑성이 남아있다. 단군조선 시대는 2096년 동안 47대의 단군왕검이 재위를 했다.
 
제1대 단군왕검 때에 동양에서 9년 홍수가 있었는데, 오행치수법을 써서 재해를 막았다. 그런데 당시 우순은 치수법을 몰라서 물난리를 겪었다. 그때 순임금의 부탁으로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보냈는데, 그 장소가 바로 도산이었다. 여기서 부루 태자는 순임금의 신하로 온 우에게 오행치수법을 전했다. 그래서 동양의 최초 외교회담이 바로 ‘도산회의’라고 한다.
 
단군왕검 때 농사를 맡았던 ‘고시’라는 신하가 있었다. 고시는 백성들에게 철 따라 곡식을 심고, 때 맞춰 거둬들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수확이 늘어나고 사람들은 고마움의 마음으로 들에 나가서 밥을 먹을 때, 첫술을 떠서 “고시례!”하며 주위에 뿌리게 되었다.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인 부소는 쑥을 가지고 쇠와 돌을 부딪쳐서 불을 내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돌은 부싯돌, 쇠는 부싯쇠, 쑥은 부싯깃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우리 민요에 보면 “어아~”라는 감탄사가 있는데 어아 노래는 고조선부터 큰 행사나 제천의식 같은 데서 반드시 불렀다고 한다.
 
제3대 가륵 단군 때 고설은 『배달유기』라는 동양 최초의 역사서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소실이 되었으며,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에 소개되었다.
 
제5대 구을 단군 때는 혼천기를 만들어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 때 천문을 관측하는 감성관에 있던 황보덕이라는 사람이 환역을 토대로 해서 농사에 알맞도록 역법을 만들었다.
 
13대 흘달 단군은 마을마다 소도를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이 하늘에 제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9대 종년 단군 때는 닥나무 껍질을 가지고 종이를 만들었다.
 
후한의 채륜이 처음 종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고조선 때 종이가 나왔다. 예로부터 종이와 인삼을 중국에 수출했었는데, 종이의 원조가 사실은 우리 나라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역사 찾아야
 
이처럼 찬란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상고사는 크게 왜곡되고 은폐되었다. 나당 전쟁 당시 사서가 대량 불탔고, 고려 원종 때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또다시 사서를 소각했다.
 
결정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사서가 불타버렸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우리 상고사는 철저히 왜곡되고 말았다. 그 병폐는 아직도 남아있어서, 중국이나 일본이 상고사를 조작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방비도 못하고 있다.
 
지금 나라안팎이 역사왜곡 문제로 들끓고 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일본에서는 다케시마의 날을 지정하면서 우리역사, 우리영토가 이리저리 채이고 멍들어 가고 있다.
 
그 모든 왜곡을 바로 잡는 길은 상고사를 당당하게 복원해내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역사의 뿌리 왜곡도 부족해서 줄기역사까지 도난당할 판국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사학자들조차도 상고사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우리의 상고사인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역사가 인정되지 않는 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각기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별개의 국가가 되고 만다. 공유되는 역사적 문화적 근거가 없는데 같은 민족, 같은 뿌리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반박도 못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 우리민족이 향유하는 모든 문화적 요소는 뿌리가 미약한 것이거나 외래에서 유입이 된 것으로 전락하고 우리 민족은 주체성 없는 민족이 되고 만다.
 
양식이 있는 역사학자라고 한다면, 지금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그냥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는 문제에 대해서 게을리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로 굳히면, 2차적으로 고조선과 그 이전도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중국 역사학자의 손에 의해 중국의 역사로서 고조선의 실재가 증명되고 공인 된다면, 유물과 사료부족, 민족주의 색채가 강해서 또는 학술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연구를 기피해 온 한국 역사학자들은 무엇이라 변명할 것인가? 그때 가서 중국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이미 빼앗긴 고조선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할 것인가?
 
이 책의 제목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 반박하여,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 근거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즉, 고구려를 길러낸 우리 뿌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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