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조선 상고사

2009.11.09 | 조회 3425

한기배

 
계몽사상가, 독립운동가이며 역사가였던 실천적 지식인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
그의 대표적 저술인 『조선상고사』는 그가 일제에 의해 여순감옥에 투옥 당한 뒤인 1931년 103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조선사’로 연재하여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글을 묶어 편찬한 민족역사서이다.
역자인 박기봉 사장(비봉출판사)은 30여 년에 걸쳐 『조선상고사』 원문의 고어체를 현대어로 바꾸고 한문으로 된 인용문을 순우리말로 바꿔 출판하였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박하는 논리는 이미 70여 년 전 단재 선생이 다 해 놓았다”며 “그런 선생의 책을 우리 세대가 읽을 수 있도록 풀어놓지 않은 것은 국사학자들의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말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감추어지고 삭감돼버린 우리 상고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보길 바란다.
 
 
미완의 민족역사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사』는 총론을 시작으로 수두(대단군조선)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는 선생의 순국으로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해오던 ‘조선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단재 선생은 1910년의 국치를 미리 예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10년 동안 고대사 유적을 답사했는데, 이전부터 갖고 있던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더욱 공고히 한 시기였다. 중국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는 등 많은 인고와 노력을 기울여 『조선상고사』를 구상, 집필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 유적지에 대해 일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었으며 그 웅장한 면모를 한번 보는 것은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한 선생의 일성은 그의 기개를 판단하기에 족하다.
 
단재 선생의 일념은, 첫째는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된다면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서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의 서문 중에서)
 
단재 선생이 30여 년의 인고 끝에 준비한 조선의 역사는 민족정기의 올바른 인식과 민족주체성의 맥을 잇는 것에 있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방향과 이론을 정립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에게 ‘국가는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다.
 
그와 같은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랑스럽고 웅대한’ 역사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으며, 그러한 역사를 찾기 힘든 이유를 잦은 외침과 전란으로 고유 문헌이 소실되고 사대주의적 유학자들로 인해 자주적 역사가 전해질 수 없었던 점, 후 왕조가 전 왕조를 미워하여 서적과 유적을 유실시킨 것에서 찾았다.
 
 
역사란 무엇인가
단재 선생은 총론을 통하여 역사란 무엇이며, 어떻게 실증하여 다뤄야 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선생을 한국 근대 역사학을 완성시킨 역사가로 평가하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 나)’와 ‘비아(非我, 나 아닌 나의 상대)’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또 “역사에는 두 개의 속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상속성(시간적으로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과 보편성(공간적으로 영향이 파급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역사란 인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선생의 적확하고 천재적인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다양한 역사서에 기록된 우리 고어와 이두문자를 재해석하여 역사서에서 그 사라진 것을 찾아서 기워 넣고, 빠진 것을 채우며, 사실이 아닌 것을 빼버리고, 거짓 기록을 판별하여 완벽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밝혀나갔다. 또 신화에서 사실을 찾아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위서(僞書)에서조차도 진실을 찾고자 하였으며, 자신의 궁핍한 생활에서도 10여년 간의 유적 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은 특히 관심을 갖고 고증에 심혈을 기울여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종래의 국통 인식체계를 비판하고, 수두(대단군조선시대)-전후 삼조선시대-부여-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되었다는 국통맥 체계를 수립하였다.
 
 
민족정신의 맥 - 수두·승군·화랑·선인
단재 선생은 책의 각 편마다 그 시대의 바탕을 이루는 맥을 짚어냈으니, 그것은 수두·선배(선인)·승군·화랑 등에 대한 깊은 인식이었다.
 
선생은 ‘대단군’을 제사장, ‘수두’를 신단이라 보았다. 고대의 모든 제도는 수두에서 시작됐으며, 일체의 풍속도 모두 여기서 비롯했다고 보았다. 수두에서 삼신(三神) 오제(五帝)가 나왔고, 삼신 오제를 거쳐 3경 5부가 나왔다는 것이다. 즉 ‘삼신사상’을 민족정신의 핵심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선생은 ‘승군’을 승려들의 군대가 아니라 고구려의 ‘조의선인’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단군에게 제사지내는 데서 기원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조의선인의 도움으로 연개소문이 당을 격파하고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선생은 또 신라의 화랑제는 진흥왕이 고구려 조의선인 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 보았다.
 
 
삼신사상과 삼조선
단재 선생은 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이 조선의 국가경영 원리였음을 밝혀냈다. 종래의 학자들이 남삼한(후삼한)만 거론할 뿐 북방에 원래 위치했던 조선의 북삼한(전삼한)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관계도 명백히 하지 못했다고 했다.
 
또 각 사서에서는 삼조선을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대(王代)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며, 사실은 ‘신·말·불’의 세 ‘한’(왕: 단군)으로 분립한 것이라고 밝혀냈다.
 
‘신한(진한)’은 북부여·양 동부여3)와 고구려로 분립되었는데 그 영토가 지금의 중국 길림·흑룡성과 연해주 남단이었으며, 요동반도는 ‘불한(번한)’, 압록강 이남은 ‘말한(마한)’의 소유였음을 밝히고 있다.
 
삼한에 대한 왜곡은 후에 동북 부여·고구려·신라·백제 등으로 계승된 국통이 삼신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교문화임을 알 수 없게 했다고 개탄하였다.
 
삼한은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의 삼신사상에 의해 성립된 나라였다. 삼한을 대표하는 ‘신한’은 하늘(天一)보다 높고 땅(地一)보다 큰 우주 유일신(太一)을 신앙해 왔고, 때문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 등의 열국시대 도래의 직접적인 원인은 외세의 침략보다 삼신사상의 파탄에 있었다고 결론내렸다.
 
선생은 특히 고구려를 외세로부터 우리민족을 보호하고 대외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상적 국가로 인식하였다. 고구려 기원에 대해 『삼국사기』는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200여 년이 삭감된 것으로 사실 고구려는 900년 간 존속했다고 기술하였다.
 
따라서 서기 150년경에는 벌써 강국이 된 고구려가 한무제와 대결한 세력이었으며, 한사군의 설치 및 영역 또한 실재한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하고 있다.
 
또 선생은 주몽과 소서노의 관계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배경을 살폈다. 백제가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대외 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면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려고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광활한 고구려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쓰는 것
종래의 조선역사서는 왕위 계승만을 기록하거나 새 왕조의 등장을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서술된 왕조사이며 정치사였다. 단재 선생은 이와 같은 왕조중심의 역사와 민족사로서의 ‘국사’는 엄연히 다르다고 하였다.
 
국사는 민족정신의 계통을 중심축으로 서술돼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정신의 계통은 국조(國祖) 단군을 출발점으로 부여-고구려를 거쳐 신라 화랑도로 이어지는 국선(國仙)의 전통이었다고 보았다.
 
선생은 이런 국선의 전통이 단절됨으로써 민족사의 상실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를 김부식의 『삼국사기』 저술로 인식하였다. 무(無)정신의 역사가 시작되는 전통이 확립된 것으로 본 것이다.
 
선생은 『삼국사기』를 해체하여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재설정할 목적으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유일한 정사로 만들기 위해 옛 기록을 궁중에 비장(秘藏)하거나 소실시켰다고 꾸짖었다. 이후부터 개인의 역사편찬은 금지당하거나 야사(野史)로 취급되었다.
 
왕의 명령으로 편찬된 역사만이 정사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정사란 기본적으로 조선과 중국을 조공과 책봉 관계로 규정하는 중화사상에 근거한 사대주의 역사서로 전락했다.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조선사의 시작을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기에 그 무대도 한반도와 만주일부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국가라는 몸체는 빼앗겼지만, 역사라는 정신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주독립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역사를 연구했다. 따라서 그는 역사를 위해 민족을 연구하는 역사가이기 이전에 민족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 애국지사였으며, 그 덕분에 한국 근대 역사개념이 성립할 수 있었다.
 
 
가신 님 단재의 영전에
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태도가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보고자 했던 단재 선생의 역사인식이 지금은 민족사관이라 하고 혹은 고증이 덜 되었다 하여 식민사관에 물든 절대다수 역사학자들에게 비판받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과연 지금의 역사학자나 지식인들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단재 선생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가족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누르고 독립운동에 몸 바친 큰 인물이었다. 선생은 공자의 조선, 예수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공자와 예수를 만드는 것이 민족의 주체성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이 한자를 수입한 것이라 단정하고 이두문을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해 만든 문자로 인식한 점,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쓴 장본인을 불교도인들로 잘못 인식하고 조선 이전의 환인-환웅 시대의 역사를 당시에는 실증하지 못한다 하여 상고사에서 제외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희망과 큰 슬픔을 아울러 하여 너를 이 세상에 보내노라. 원하노니, 장수하라. 큰소리치라. 유수(流水) 같을 지어다”라는 선생의 곡성과도 같은 울림이 이 책을 통해 올바로 전달되었으면 한다. 책의 부록에 수록된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와 지인들의 선생에 대한 단상이 가신 님을 더 애석하게 한다.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48개(6/7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