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논쟁으로 밝혀낸 우리 고대사의 진실

2009.11.09 | 조회 2615

『고조선 사라진 역사』의 저자인 성삼제는 2001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에서 근무하였고 현재 교육인적자원부 지방교육재정담당관으로 있다.
일본교과서 왜곡대책반의 주업무는 일본 우익단체의 ‘위험한 교과서’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 역사교과서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대책반 실무반장직을 맡으면서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을 샅샅이 조사한 저자는 각계각층으로부터 일본뿐 아니라 우리 역사교과서와 역사학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실상 우리 국사교과서는 머리 부분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다. 특히 고조선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을 빚고 있는 재야·강단학계의 주장을 엉성하게 절충해놓고 미봉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그는 당초 예상했던 간단한 보고서로 끝낼 수 없었다. 교과서에서 불분명하게 서술된 고조선사를 밝히기 위해 국내외 도서관을 돌며 관련자료 수집에만 3년 이상 매달렸고 최태영 박사 등 원로 학자들로부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왜곡대책반은 해산되었지만 저자는 그동안 쌓인 자료를 바탕으로 본서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을 내놓은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조선 논쟁은 ‘다빈치 코드’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 딸과 그 또래 청소년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지만, 나처럼 학창시절 일그러진 고조선 역사를 배운 어른들도 함께 봤으면 한다.”
이 책에서는 고조선사의 쟁점 9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
한국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국조는 단군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던 교사가 중학교 국사시간이 되면 단군신화라 해서 돌연 한국사람 조상이 아니라 신이 돼버린다.
 
단군을 소개할 때도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능동태가 아니라 ‘나라를 세웠다더라. 건국되었다’는 인용 혹은 수동태로 남의 나라 역사인양 모호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사실상 단군을 국조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현직 교사들이 현재 교과서의 대안으로 내놓은 책이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이다. 거기서도 교사들의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국가는 청동기시대의 산물이다. 국내 청동기문화 개시연대는 기원전 10세기 경이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은 국가가 성립될 수 없는 신석기시대이므로 단군 기록은 어디까지나 신화이며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언제부터인가
이와 같이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이유로 단군은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교육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말았다. 물론 고증을 거친 학술적 성과라면 그들의 입장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란 어디까지나 진행형일 뿐이지 고정불변이 아니다. 눈만 뜨면 뒤집히는 게 고고학이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청동기물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아 단군은 물론 고조선 전체가 부정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 하나둘 발견되더니 최근에는 한일 고고학계가 공동 연구하여 방사성연대측정 기원전 18세기경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지역은 옛 고조선의 심장부가 아닌 변두리였음을 감안할 때 한반도 북부와 만주 요서의 청동기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시작되었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단군의 건국은 과학적 근거를 갖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며, 단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청동기 유적이 기원전 18세기일 뿐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가성립연대인 기원전 10세기는 폐기돼야할 80년대 이전 자료를 토대로 만든 억설이며 중국 은나라 멸망 이후 시점에 끼워 맞추는 사대주의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고인돌에 새겨진 역사
고인돌은 청동기문화로 시작된 고조선시대의 지표유적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물론 고조선에 유행하던 묘제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고조선의 정치·문화적 영역은 고인돌유적 분포 범위보다 더 광대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역사학계는 앞서도 말한 대로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기원전 10세기를 넘지 않으므로 고인돌 유적도 그 시점을 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 권위를 가진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무려 기원전 2665∼2140년 것들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양수리 유적은 하나의 표본이라고 볼 때 고인돌 묘장법이 시작된 것은 그 이전으로 소급되고 청동기개시 연대도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변광현 교수의 ‘고인돌의 한반도 기원설’을 소개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고인돌이 한반도에서 시작되었고 어쩌면 청동기 문명도 한민족이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단군릉과 단군 뼈의 진실
지난 1993년 북한에서는 단군릉 발굴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단장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민간에서 단군릉으로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 묘제는 틀림없는 고구려식 무덤이었으나 안에서 발견된 유골은 북한 학계의 조사결과 약 5011±267년 전의 것이었다.
 
남한 학계에서는 주체사상을 내세우는 북한 역사학계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북한에서 시행한 최신 연대측정법인 전자상자성 공명연대측정 결과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연대 측정 결과를 조작한 것인가? 아니면 측정 오차인가? 아니면 단군의 뼈인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조작을 할 거라면 처음부터 단군의 생존시기인 기원전 2333년 이후로 맞췄어야 한다. 따라서 조작한 것이 아니라 화석화되어 측정오차가 생긴 사실을 모르고 연대측정 그대로 발표한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남북 공동연구를 제안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재조사를 하면 될 것을 ‘조작이 의심된다’는 식으로만 결론을 내리는 것은 누가 봐도 불합리하다.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나
저자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한사군 논쟁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얼버무리기 서술로 일관하는 국사교과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차라리 다양한 설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방법이 합리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가 아닐까
일반적으로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명도전이 발굴된 지역은 고조선 영역과 중첩돼있다. 연나라가 교역한 나라가 비단 고조선만은 아닐 텐데 연나라 중심부와 황하일대는 소량 발견되고 대부분 고조선 강역인 요동, 요서지역에 집중된 것에 대해 저자는 고조선 화폐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서》 〈지리지〉의 고조선의 8조 법금 가운데 “도둑질 한 자는 50만 전을 내야한다”는 구절을 상기시킨다.
 
 
일본은 《삼국유사》를 변조했나
저자는 조선총독부 어용학자 이마니시류가 국보급 고문서인 《삼국유사》 〈고조선〉 기록을 날조했다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변조한 것은 객관적 사실로 판명났다. 문제는 《삼국유사》 임신본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남본에는 ‘國’자가 알기 어려운 한자로 표기돼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因’의 이체자라고 주장과 ‘國’의 이체자라는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여 《삼국유사》 변조 논쟁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위서 논쟁 속에 묻혀버린 고조선
고조선 역사를 합리적이고 매우 구체적 사실로 기록한 문헌이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다. 그러나 양 사서는 후대의 위서로 취급받고 있다. 대체로 근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술어들이 많다는 것을 근거다. 그러나 저자는 몇 개 용어에 매달리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단적인 예로 위서론자들이 제기한 ‘문화’라는 단어는 근대적 용어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나타나며 오늘날 통용되는 문화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현상
저자는 《환단고기》가 과연 위서인지 여부를 판별해주는 결정적 단서를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주장한 《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현상인 오성취루(五星聚婁)와 10개의 일식현상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천문학적 검증을 통해 위서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고조선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고조선 논쟁은 그 결과를 떠나 그 자체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조선 역사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문예부흥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예술로부터 형성되었던 것처럼 한민족 고대문화는 그 자체가 값진 유산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응하여 침략의 빌미를 차단, 동북아평화를 위한 근본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도 논쟁은 계속되어야 하고 조선총독부가 왜곡 말살한 역사를 일제강점기 이전의 원형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도 그것은 계속되어야 한다. 저자는 동북아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항구적 평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한 유럽연합도 가해자, 피해자간 역사 공동연구가 촉매역할을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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