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연금술과 求道의 길

2009.11.09 | 조회 1856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글: 손 현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에 자주 간다. 약속시간을 기다리며 서점을 배회하던 날, 마침 인상적인 표지의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둥그런 달 아래 온 우주의 광명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기자의 피라미드와, 그 피라미드를 멀리서 보고 있는 한 탐험가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베스터셀러’ 코너에 꽂혀 있기도 했지만, 그 표지에 씌어진 ‘내 안의 神을 찾아가는 영혼의 연금술’ 이란 책의 카피가 내 눈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연금술사』, 나는 결국 이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영혼의 연금술’이라는 신비스러운 느낌과 함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진리는?
파울로 코엘료1)라는 브라질 출신의 작가가 쓴 이 작품은 전세계 120여 개국에서 번역되어 지금까지 2,700만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신부(神父)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선 청년의 험난한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면서, 삶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위대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양에 살건 서양에 살건 간에 ‘우리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고, 결국 우주의 명(命)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원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이제 『연금술사』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양치기 산티에고는 종일 양을 치고, 한 권의 책과 한 잔의 포도주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산티에고는 한 아이가 자신을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데려가는 꿈을 며칠간 반복해서 꾼다. 다음날 그 꿈이 현실화되기라도 하듯, 그에게 홀연히 한 노인(살렘의 王)이 나타나서 산티에고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산티에고의 양의 1/10을 주면, 피라미드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길을 알려주겠다는 것.
 
마침 그 순간 행운의 표지(象)인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두 사람 사이로 날아 들어오면서, 산티에고는 운명처럼 노인에게 값을 치르고 그에게 흰색과 검은색 보석 ‘우림과 툼밈’을 받아든다. 그리고 산티에고는 ‘자아의 신화’(다른말로 使命)를 찾기 위해 정처 없는 사막의 여행길에 몸을 싣는다.
 
산티에고는 여행 도중 참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참혹한 전쟁의 진상, 그리고 한 영국인으로부터 들은 연금술사 이야기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여행 중, 사막의 도적들을 만난 그는 목숨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 ‘바람’으로 변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산티에고는 늙은 왕이 자신에게 해준 ‘자신이 소원하면 전 우주(宇宙)가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는 말처럼 우주를 관통할 정도의 일심(一心)으로 간절한 기도를 한다. 사람이 어찌 바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마는 그 순간 사막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한 ‘모래 폭풍’이 일어난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그는 진정한 ‘바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아의 연금술을 찾아가는 인생
우리에겐 누구나 어린 시절 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 우리에게 그 꿈, 즉 자아의 신화를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열 사람 중 아홉은 우리의 꿈과는 조금 비껴난 지점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엘료는 그 ‘자아의 신화 찾기’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며, 자아의 진정한 연금술은 곧 우주에 대한 자아의 사명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는데,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에서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의무라네.” (본문 47쪽)
 
‘일심이 없으면 너도 없고 나도 없다’는 상제님의 바로 그 말씀처럼, 이 책의 컨셉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 곧 일심(一心)의 경계와 천명(天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우주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 이 천지(天地)의 마음을 실현하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맡은 ‘의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자아의 신화(神話)’라는 말로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있지만, 스스로도 ‘의무’란 표현으로 구체화했듯이 보다 정확한 표현은 ‘자아의 사명(使命)’ 정도가 되겠다. 옛 성인들은 그것을 일러 ‘천명(天命)’이라 하여 인간 삶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이 책에서 참 재미난 부분은 끊임없는 ‘표지(象)’에 대한 나열이다. 저자는 삶의 모든 것은 ‘표지’라고 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단어는 ‘예감’이란 말로 대체하기도 한다.
 
“예감. 예감이란 것은 삶의 보편적 흐름 가운데 있고, (중략) 그것은 천지의 모든 일이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본문 127쪽)
 
“상(象)과 철학은 불가분의 양자(兩者)인 것이다. 사물의 象을 연구하는 목적은 철학적 진리를 탐색하며 명(明)을 양(養)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우주변화의 원리』대원출판, 174p)
 
 
산티에고에게 계속 나타나는 ‘예감’과 ‘표지’는 과연 무엇일까? 그에게 미래를 짐작하게끔 하는 ‘현재의 표지들’이란 말 그대로 상(象)이다. 우리 삶은 끊임없는 ‘상(象)의 연속’이며 그 상(象)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파악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가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주는 현명한 산티에고에게 우주의 마음을 끊임없이 상(象)으로 보여주며, 그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물 흐르듯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산티에고는 사막여행 도중 잠을 자다가, 순간 매들의 비행에서 갑자기 어떠한 ‘환상’을 접하게 된다. 바로 우주의 마음이 그에게 보여주는 ‘미래의 상(象)’이었다. ‘만물의 정기(精氣)’속으로 한없이 빠지다보면 종국에는 만물의 실체(實體)를 ‘보는 것’인데, 바로 수많은 옛 성인들이 수도하여 얻어낸 도통의 결과가 바로 그것이 아닐런지.
 
 
미래를 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옛 선지자들은 미래를 상상으로 가늠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이기에 그들은 다가올 그 미래를 항상 준비해왔고, 그 미래를 후세에 알려왔다.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한 인류의 성자(聖子)인 예수, 석가, 공자를 비롯하여, 미래의 스크린을 보아온 격암 남사고나 노스트라다무스 등의 예언자들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은 ‘사물의 정기를 꿰뚫어보는 방법론을 발견해낸 사람들’인 것이다. 요컨대 만물의 정기의 궁극은 ‘자신의 마음(心)’이라 표현하면서, 결국 이 마음이 우주보다 크다는 상제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다.
멋진 말들은 계속 이어진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 이 지구는 살아 있는 존재니까. 정기를 가진 땅덩어리란 얘기야. 우리는 그 정기의 일부분이고. 아주 가끔은 우리도 그 정기가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지.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네가 그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크리스털 그릇들 역시 자네의 성공을 위해 애를 썼을 거란 거야.” (본문 134쪽)
 
“천지의 모든 이치가 역(易)에 들어 있느니라.” (도전 2:20)
 
역(易)의 제1조건, 바로 변역(變易)의 논리를 꿰뚫고 있다. 이는 세상 만물은 매순간 개벽(開闢)을 반복하며 변화한다는 제1의 명제이다. 인간의 들숨과 날숨, 하루일과의 변화, 춘하추동 사시의 변화, 선후천개벽까지 단 일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만물의 운동 시스템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지구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인데, 굳이 생태학까지 가진 않더라도 아무리 둔한 인간이라도 ‘숨쉬는 지구’를 가끔 느끼기도 한다.
 
코엘료는 한술 더 떠서 만물의 언어(象)를 찾으려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까지 알려주고 있다. 바로 용기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는 판이 넓어서 성과 웅을 합하여 쓰지 않으면 능히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느니라”(도전 4:5)라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아는 것과 실천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
 
‘모르는 것(無知)도 죄(罪)’라는 사부님의 말씀처럼 무관심하고 무력한 자에겐 그 만물의 언어를 찾을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법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아주 걸작으로 꼽는 <넘버3>란 영화에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송강호의 명대사가 하나 나온다. “잠자는 개에겐 결코 햇빛은 비추지 않아!”
 
아마 진정한 도(道)에 접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용기’이자 ‘실천’이 아닌가 싶다. 삼생(三生)의 인연이 아무리 끓어 넘쳐도 인간 스스로의 실천이 따라주지 않으면 매사가 허사인 것처럼, 굳이 증산도를 떠나서도 ‘성웅(聖雄)을 겸비한 실천력’은 삶을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자, 성공을 향한 가장 빠른 길이라 볼 수 있다.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는 스승을 찾은 우리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바로 산티에고의 삶의 방향을 일깨워준 ‘주군(主君)’2)을 만나는데 있다. 그에게 ‘우림’과 ‘툼밈’이라는 보석 2알을 건네고 사라진 ‘살렘의 王’이란 사람이다. 그 늙은 노인은 산티에고가 인생에서 비연속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자, 그가 일생 중 만난 최고의 위대한 대인(大人)으로 그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산티에고는 다른 모든 양치기들은 거부했던 이름모를 나라의 왕(王)을 첫눈에 알아보고 그에게 엎드려 경배를 드렸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그 왕은 산티에고 삶의 전 과정을 이미 알고 있었고, 산티에고 역시 그가 진정한 왕이자, 현명한 왕’임을 고백하고 있다. (본문 110쪽)
 
공자가 한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이견대인(利見大人)-훌륭한 스승이나 친구를 만나면, 인생이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삶의 목적은 ‘성인(聖人)’을 만나는데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우주의 비밀을 꿰고 있는 ‘우주의 절대자’를 바로 직접 대면하면야 좋겠지만, 수천억조 인류 중 단 몇 사람만이 고된 삶의 과정 끝에 친견한 그 분을 우리가 만나기란 쉽지 않다. 아마 공자님의 말씀 또한, 인생의 궁극의 목적은 성인(聖人)을 통해 우주의 절대자, 상제(上帝)님을 만나는 것으로써 마무리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증산도인들은 참으로 복(福)에 겨운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상제님 태모님의 천지(天地) 안에서, 우리들의 주군되시는 일월(日月)이신 태사부님 사부님의 명(命)을 받들면서, 천지일월(天地日月)이 바로 우리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시니 천하에 무서울 것이 뭐가 있으며 못 이룰 일이 또 뭐가 있을까.
 
5만년 동안의 진액이 압축된, 거룩하고 위대한 진리를 너무도 쉽게 만나 아직 무아지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도들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산티에고보다 훨씬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하여 우주적인 ‘사명’을 실천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꿈과 비전속에 담긴 진실이란
지금의 인류는 원초적이면서도 원대한 꿈을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 나 개인이 반문하건대, 어린 시절 내 꿈이 무엇이었을까? 혹은 그보다 더 앞서 전생의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또는 더 거슬러 올라가서, 태고적 인류의 꿈과 그 비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컴퓨터 등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21세기의 일상(日常)이 너무 복잡다단해서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 그 원대한 꿈과 이상을 애써 지우며 살아가기에 급급한 건 아닐까!
 
그러나 복잡할수록 그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다보면, 의외로 삶은 단순하고 하나의 ‘게임’과도 같은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수명(壽命)이란 말이 있지만, 단순함의 극치는 바로 이 ‘명(命)’대로 사는 것이다.
 
“우주의 마음을 실현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바로 우리의 임무(命)라는 걸세.” (본문 47쪽)
 
“일꾼은 천명(天命)을 받아 천지사업에 종사하여 광구천하의 대업을 실현하는 자니라.”(도전 8:1)
 
나에게 주어진 천명(天命). 내 삶을 통해 내가 일구어야할 사명은 무엇일까? 돈? 배우자? 명예? 도대체 그 실체는 무엇일까?
 
저자는 어렴풋이 결과를 열어놓고 있지만, 이 우주의 하추교역기에 우주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각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천명은 그리 먼데 있지 않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하고 쉽다. 코엘료가 우주의 마음을 실현하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의 의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 올바른 ‘명(命)’을 찾고 올바로 ‘명을 받들’(奉命) 때만이 인간완성을 향한 첫 걸음마를 떼는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참 재미있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 세상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는구나. 이렇게 책으로도, 과학으로도, 예언으로도 알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절감한다. 천지일월을 든든한 백그라운드에 두고, 살릴 생(生)자를 두 손에 쥐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더 주저하고 있는가! 백날 천날 천명을 자각해봐야 하나의 실천력에도 미치지 못함을 생각하며,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우리에겐 오로지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수족(手足)이 없는 우주가 우리에게 바라는 유일한 바램과 요구가 아니겠는가. 마크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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