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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75억 인류는 대재앙의 시간으로 걸어가고 있다

2020.01.23 | 조회 1223


지금 75억 인류는 대재앙의 시간으로 걸어가고 있다


프레시안 2020.01.21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작년 가을에 시작돼 해를 넘긴 지금까지도 꺼질 줄 모르는 오스트레일리아 산불은 묵시록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탔으며, 푸른 풀이 모두 타 버렸습니다."("요한 묵시록" 8장 7절, <공동번역 성서>) 그리고 그 나무, 풀과 더불어 살던 짐승들이 죽어간다. 또한 겨우 목숨만 구한 인간들 역시 속절없이 떠돈다.


남반구에 여름이 오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늘 산불이 났었다 한다. 날은 더운데 건조해 산불 나기 딱 좋은 날씨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대륙 전체를 덮으며 끝없이 불길을 이어간 적은 없었다. 전문가들이 여러 원인을 짚지만, 누구도 근본 원인이 기후 변화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건조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름이 점점 더 더워지고 길어지니 산불의 규모와 지속 기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화석 자본주의의 온실 가스 대량 배출 때문에 시작된 지구 평균 기온 급상승이 묵시록이 전하는 "천사의 나팔 소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첫째" 굉음일 뿐이다. 묵시록에 따르면, 나팔 소리는 아직 여섯 차례나 남아 있다. 과학자들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번 산불로 최소 4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됐다. 작년 세계 탄소 배출량의 1%에 해당하는 규모이며,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해 배출량에 맞먹는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늘어난 이산화탄소는 기온 상승을 더욱 부추길 것이다. 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되먹임 효과'다. 이런 일이 빈발한다면, 2050년까지 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묶는다는 목표는 일찌감치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다가온 2020년대의 첫 번째 얼굴이다. 이는 '기후 위기'라는 말로도 충분히 형용할 수 없는 파국의 형상이다. 이제껏 기후 '변화'라고 태평히 지칭되다가 1, 2년 전부터 기후 '위기'라 불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기후 '재앙'이라 해도 다들 이상하다거나 과장이라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 지금 75억 인류는 대재앙의 시간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전시 동원 상태"가 필요한 기후 위기 대응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미 전에 없던 더위와 추위를 겪은 데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가을 태풍에 시달린 나라인데도 그렇다. 한국인들이 기후 위기보다 더 중요시하는 미세 먼지 문제조차 기후 변화 탓에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바뀐 탓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총선을 몇 달 앞둔 한국 정가에서는 기후 위기를 진지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기후 위기는 여전히 '외신' 면 소재다. 우리는 지구 대기 바깥에 사는 외계인들인가?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지하고 연대 의식이 넘치는 이들조차 손사래를 칠지 모른다. 삼성의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를 응원하는 집회에서, 현 정부가 임명한 공기업 사장의 노동 탄압에 맞서 지금껏 투쟁하는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혹은 날마다 전해오는 빈곤층 가족의 동반 자살 소식에 가슴 아파 하는 이들 곁에서 기후 위기를 강조하면, 마치 응급 처치 현장에서 양생법을 설파하는 것처럼 황당해보일지 모른다. 더 급한 일들 천지인데, 고담준론이나 읊는다고 할 수 있다.


실은 한국만 이런 것도 아니다. 어느 나라든 좌파는 기후 변화와 사회 불평등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곤 한다. 둘 다 자본주의 탓이지만, 선거에서 공약을 내거나 정부에서 정책을 논의할 때는 어쨌든 어느 쪽을 먼저 다룰지, 어느 쪽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지, 선택의 순간에 부딪히곤 한다. 이럴 때마다 선택하는 대상은 확실히 '기후 변화' 쪽은 아니다. 좌파정당의 명망가든 노동조합원이나 분노한 시위대이든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작년에는 프랑스에서 노란 조끼 시위까지 있었다. 물론 부유세 인하 같은 다른 요인과 함께 봐야 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기후 변화 대응을 빌미로 한 유류세 인상이었다. 이 조치에 누구보다도 중소도시의 소외된 계층이 격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착취와 수탈, 불평등과 배제가 더욱더 증대하는 사회에서 기후 재앙에 대응하기 쉽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인데도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작년 말에 한 유럽 매체와의 대담에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려면 "전시 동원 상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www.euronews.com. 2019. 11. 18). 전시 총동원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해야만 기온 상승 속도를 늦출 정도로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가 "전시"라 말할 때 염두에 둘만한 전쟁은 십중팔구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때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싸우면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연합군 진영의 병기창 역할을 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미국이 매년 GDP의 1/3을 전쟁 수행에 쏟아 부었다고 평가한다. 작년 미국의 명목 GDP는 대략 21조 달러였다. 그 중의 1/3이면 7조 달러, 우리 돈으로 8천1백조 원이 넘는다.  


이를 그대로 한국 상황에 대입하면, 625조 원 가량을 기후 위기 대응에 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의 대한민국 재정 규모(2018년 총수입 447조 원)보다 더 큰 액수다. 너무 커서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만큼을 기후 위기 대응에 쏟아 부어야 한다면, 다른 급한 일들, 그러니까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고용 증가나 복지 확대 같은 과제들은 어찌한다는 말인가? 이 모두를 희생한 채 기후 문제에만 매달려야만 한다는 이야기인가?



"전시"는 거대한 전환의 시기이기도 하다


스티글리츠라면, 누구보다 불평등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학자다. 그런 그가 기후 위기 대응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현실의 다른 중요한 문제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만도 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일종의 "전시 동원 상태"를 통해서만 기후 재앙에 맞설 수 있다는 말은 난마처럼 얽힌 21세기의 사회 문제들이 더욱 궁지에 빠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불평등 위기와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해결될 기회가 열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러한가?  


20세기 전반은 공황과 전쟁, 학살로 점철된 어두운 시대이기도 했지만, 냉정히 뜯어보면 인류사에서 전례가 없는 진보의 시대이기도 했다. 다른 무엇보다 인간 사회의 불평등 문제가 크게 개선됐다는 점에서 그랬다.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보통선거제도가 실현됐다. 모든 시민의 정치적 평등이 보장된 것이다. 다시,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복지국가의 토대가 구축됐다. 정치적 평등을 넘어 사회적 평등을 향해 한 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 두 시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세계 전쟁 직후라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자 그간 정치 참여에서 배제됐던 노동계급과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됐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나자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 고용과 보편 복지가 민주주의 국가의 의무가 됐다. 세계 전쟁과 이런 대대적인 개혁 사이에는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었다.


이런 상관관계의 중심에는 총력전이라는 새로운 현실이 있었다. 그 전에도 자본주의 아래서 전쟁은 많이 있었다. 아니, 자본주의 자체가 늘 크고 작은 전쟁과 함께 했다. 그러나 이전의 전쟁은 국내 사회 개혁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국내 사회 개혁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 전쟁은 달랐다. 총력전이었기 때문이다. 참전국이면 어느 나라든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성인 남성을 최대한 징집해야 했고, 전방에서는 높고 낮은 여러 계급이 함께 부대끼며 적군과 싸웠다. 남성들이 징집돼 생긴 생산의 구멍은 여성들이 채웠고, 전쟁 수행 필요성 앞에서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온갖 구닥다리 제약은 삽시간에 힘을 잃었다. 군수 생산이 급한 정부는 그간 탄압만 해온 노동조합에 손을 내밀었고, 당연한 듯 천문학적 국채가 발행되고 계획 경제 체제가 들어섰다.


이런 변화를 이미 겪은 대중에게 정치적 평등의 인정이나 복지국가 수립은 너무도 당연한 최소한의 성과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실현되는 꼴을 보지 못할 것 같던 엄청난 목표들이었는데, 총력전 형태의 세계 전쟁을 겪고 난 뒤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상 시기에는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제도의 변화, 사회 세력관계의 변화, 사람들 마음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슬픈 진실이지만,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진보는 이렇게 두 차례 세계 전쟁을 거치며 실현됐다.  


전쟁을 예찬하자는 게 아니다. 불평등의 해소 같은 대대적인 개혁은 결코 '일상' 시기에는 이뤄질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자본주의 구조가 평화롭게 작동하는 일상 시기에는 개혁은, 그 말에 값할 정도로 대대적이고 실질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아주 어렵다. 이런 시기에는 오히려 불평등 구조가 확대 재생산되기 쉽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70여 년 간 세상의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경향이었다.  


몫 없는 자들이 사회의 중심에 진입하는 그런 변화는 지극히 비일상적인 시기에 이뤄진다. 큰 변화는 커다란 격동이 이미 시작된 사회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럴 때에만 중간층은 현상유지보다 변화 쪽에 함께 하길 선택한다. 그럴 때에만 지배층은 기존 지배 방식이 더는 통할 수 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때에만 몫 없는 자들의 도전이 '일상'이 된다.  


슬프게도 20세기의 인류는 오직 전쟁, 그것도 세계 전쟁을 통해서만 이런 비일상성의 시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더는 반복되어선 안 될 비극적인 상황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반복될 가능성도 없다.  


그러나 세계 전쟁의 가능성이 닫힌 이 세계에서 지금 우리는 또 다른 형태로 비일상성의 시간에 진입해야 한다는 요청을 마주하고 있다. 스티글리츠 같은 이들이 "전시 동원 상태"에 준하는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기후 위기가 그것이다. 이번에는 강대국과 강대국이 서로를 죽이려는 전쟁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함께 살기 위해 문명을 혁신하려는, 전에 없던 공동 시도다. '전쟁'은 이것과 가장 거리가 먼 경험이겠지만, 이제까지 인류 경험 속에서 이와 비슷한 어떤 상태를 환기시킬 수 있는 말은 역설적으로 "전시 상태"뿐이다.


기후 재앙에 맞서는 전혀 새로운 "전시 상태"에서 어떻게 인류 역사상 최대로 심화된 불평등이 흔들리고 뒤집힐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분석과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예외 상황에서 각 나라의 재정 규모와 그 지출 구조가 어떻게 변화하도록 허용할지 혹은 변화해야만 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일자리의 대대적인 변동 속에서 20세기의 완전 고용-보편 복지와 그 형태는 다르면서도 내용은 근접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어떻게 뜯어고쳐야 하는지 따져봐야 한다. "전시 동원"이 전체주의나 권위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미국의 뉴딜이나 영국의 보수당-노동당 거국내각을 훨씬 넘어설)와 결합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하지만 어쨌든 "전시 상태"라는 말이 환기시키는 비일상성의 가능성이 이런 논의와 실천의 의지와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기후 위기 대응은 단지 위기일 뿐만 아니라 크나큰 기회이기도 하다. 지구 어느 곳에서나 세습 자본주의라는 말기적 단계에 접어든 이 자본주의 질서를 반전시킬 기회 말이다.  


 

녹색 전환은 이제 모든 정책의 대전제  


그러나 기후 재앙은 전쟁과는 다르다. 적국의 공격을 못 알아챌 이는 없겠지만, 지구 생태계의 신음은 지나쳐 버리기 쉽다. 많은 이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산불이나 일본의 태풍을 남의 일 취급하고, 우리가 겪은 이상 기온조차 잊곤 한다. 우리들 사이에, 지구의 반격을 '해석'해주는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이미 비일상적 시간에 진입했음을, 다만 일상의 질긴 관성 때문에 이를 애써 부정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지금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외치는 '그린 뉴딜'은 단순히 환경 분야 정책이 아니다. 기후 위기 대책과 일자리 정책의 결합만도 아니다. 기후 재앙에 맞서는 가운데 미국 자본주의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외침이다. 그런 그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적어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만이라도 한다면, 2020년대가 스티글리츠가 말하는 "전시 동원 상태", 그러니까 위대한 전환의 시대에 가까워질 가능성은 결정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이러한 메시아적 계기를 기다리기 전에 해방의 몸짓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가올 총선에서 이런 목소리가 울려 퍼져야 한다. 이제 녹색 전환은 단순한 한 분야의 정책이 아니라 모든 진보적 정책의 대전제이며 세습 자본주의 타파의 출발점이라는 목소리, 매번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원론이 아니라 2030년까지 10년 동안 시급히 실현해야 할 계획으로서 녹색 전환과 한국 사회 양대 불평등(부동산과 교육)의 구조 개혁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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