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개벽뉴스

괴질, 1만년의 전쟁

2010.01.07 | 조회 5060


페스트·두창·에이즈·사스 등 인류 역사를 흔들어온 전염병들, 그 투쟁의 역사

1347년 흑해 중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카파. 동방에서 물밀듯 쳐들어온 타타르인들은 카파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타타르 군대 한 장수는 번뜩이는 꾀를 하나 떠올렸다. 무서운 괴질에 걸려 죽은 주검을 투석기로 성 안에 던져넣으면 성 안에 역질이 돌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이 괴질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주검이 성 안으로 들어간 지 며칠 지나자 성 안에서는 이 역질에 걸려 병사들이 하나둘씩 그리고 마침내 떼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카파 성주는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말았다. 타타르인들은 힘들이지 않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중세를 끝장낸 흑사병


사진/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 병원체. HIV(붉은색 T세포에 붙는 파란색 작은 입자), 소아마비 바이러스, 인플루엔자(맨위부터).


그로부터 얼마 뒤인 같은 해 10월, 당시 이탈리아 최대 항구도시인 제노아에는 12척의 배가 항구로 들어왔다. 모두 카파에서 온 배들이었다. 이 배들의 선원은 이미 괴질에 걸려 있었고 갑판 곳곳에는 주검들이 널려 있었다. 제노아시 당국은 놀라 배에 탄 사람들은 물론이고 짐도 부리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앓고 있는 선원과 여행객들에게 치료도 못하게 했다. 이미 카파에서 일어난 일을 소문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모두 헛수고였다. 해상 무역길을 통해 괴질은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불과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명을 몰살시킨 대역질 ‘흑사병’이 ‘괴질’이라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유럽 정복에 나선 것이다.

유럽인들은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감염됐는지도 모른 채 죽어갔다.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은 자에 견주어 처지가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죽은 자는 그래도 공포의 두려움에서는 벗어났지만 산 자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거리 곳곳은 주검들로 넘쳐났다. 형제간에도 서로 집을 오가지 않고 친척집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괴질이 공동체를 완전 파괴해버린 것이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괴질을 퍼트리는 소녀가 있다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설의 마녀’로 불렀다. 이 마녀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빨간 스카프를 몸에 두르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마녀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찾아다니면서 집의 창문이나 대문 앞에서 빨간 스카프를 흔들기만 하면 그 집은 역질에 감염된다고 믿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괴질을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내린 신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교회는 괴질 공포로 자포자기한 사람들의 도박과 과음, 농민들의 게으름을 비난했다. 사람들은 신에게 모든 죄를 자백하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을 기도했다. 그러나 이런 죄 고백과 기도도 괴질을 막지는 못했다. 그것은 신이 내린 형벌이 아니라 쥐벼룩이 인간에게 옮긴 여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세균에 의한 선(腺)페스트(가래톳형 페스트)였기 때문이다.


사진/ 지난 4월2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심사대에서 홍콩에서 온 승객들이 마스크를 쓴 채 검역질문서를 제출하고 있다.(이종근 기자)


당시 의사들도 이 괴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괴질을 치료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쓴 치료법은 사혈법, 즉 몸 안의 피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를 뽑으면 핏속의 나쁜 것이 함께 빠져나가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백약이 소용없자 금이나 가루를 낸 에메랄드를 함유한 약이 처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환자들에게 오히려 독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흑사병은 한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다. 중세 유럽 시대는 흑사병과 함께 역사의 뒷길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르네상스 시대가 차지했다. 흑사병의 대유행 전, 평민들의 생활 환경은 매우 불결했다. 이제 과거와 같은 삶의 방식은 영주나 농민 모두에게 버려야 할 짐이었다. 삶의 질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괴질은 엄청난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아즈텍 제국은 왜 멸망했나

인간은 지구상에 출현해 진화의 길을 걸어오면서 수많은 전염병과 싸웠다. 어떤 전염병 역사학자들은 인간의 역사는 전염병과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인간이 전염병에 시달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유행은 1만년 전 농경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시작됐고 몇천년 전 도시가 생기면서 가속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창(천연두)은 이집트 미라의 얼굴 자국 등에서 추론한 결과 이미 기원전 1600년께 등장했다. 이하선염은 기원전 400년께, 한센병(나병)은 기원전 200년께, 소아마비는 1840년 대유행을 했으며 에이즈는 1980년대 들어 대유행을 시작해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사진/ 지난 4월3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격리실에서 검역관들이 보호복을 입은 채 사스 환자 발생에 대비해, 비상점검을 하고 있다.(연합)


전염병이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1822~95)와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1843~1910)는 광견병 바이러스와 탄저균, 결핵균 등을 발견했으며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이전에는 질병 또는 전염병이 발생하는 것은 부패물질, 주검에서 나오는 불결한 냄새,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심지어는 병이 별똥 또는 지진 때문에 생긴다거나 악령, 신의 노여움 때문에 생긴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시대 등 옛날에는 두창을 ‘마마’(상감마마 등 극존칭인 마마라고 부르면 역질이 기분이 좋아져 환자의 몸에서 떠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붙인 이름임)라고 불렀다. 또 병이 나면 터줏대감의 노여움을 풀어주어야 낫는다고 여겨 ‘대감놀이’를 했다.

과학과 의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은 괴질의 대유행을 보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2003년 3월과 4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유행 소식을 들은 지금의 지구촌 사람들이 가지는 공포는 우리 조상들이 괴질의 대유행을 보고 가졌던 공포에 견주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코르테스는 1520년 멕시코에 있는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단 600명의 군사로 수천만명의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실은 두창 덕분이었다. 스페인 군인들은 괴질에 끄떡없는데 아즈텍 제국에서는 황제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괴질의 희생자가 됐다. 1531년 피사로가 168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백만 인구의 잉카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페루 해안에 상륙했을 때 이미 잉카 제국은 1526년께 육로를 통해 들어온 두창의 대유행으로 인민들이 대부분 죽고 없었다. 두창 바이러스가 피사로에 앞서 잉카 제국을 정복해버린 것이다. 이 밖에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퍼뜨린 두창·인플루엔자 등으로 공포와 고통 속에 수없는 사람들을 잃어야만 했다.

LA에서 발견된 희한한 ‘게이병’

20세기 들어서도 괴질은 인간을 괴롭혔다. 1918년 늦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스페인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전염병이 돌았다. 이 유행병은 두통과 요통, 피로, 고열, 식욕부진 등의 증상을 보였다. 이 전염병은 그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지구적 유행병으로 자리매김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는 이 인플루엔자는 전 세계적으로 2164만2274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총과 포탄에 맞아 숨진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당시에는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의사들이 할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당시 각종 질병 치료에 쓰였던 온갖 방법들이 동원됐다. 키니네 알약, 아스피린, 담배, 뜨거운 목욕, 찬물 목욕, 사혈(나쁜 피 빼기), 모르핀 등. 물론 이런 약제와 치료법들은 별로 효험이 없었을 게 뻔하다. 극장·교회 등은 문을 닫았고 대중집회는 금지됐다. 사람들은 외출할 때 항상 마스크를 하고 다녔다. 스페인 독감 대유행 이후 독감은 인간에게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다. 21세기 들어서도 독감이 유행한다는 발표가 있으면 어린이와 노인, 환자 등은 물론이고 건장한 청년들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독감은 여전히 노약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전염병이다.


사진/ 사스 공포로 괴로운 항공사. 지난 4월2일 인천국제공항의 한 항공사 카운터에서 몇 사람들만이 표를 구하고 있다.(이종근 기자)


198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몇몇 병원에 청년들이 서로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질환으로 입원했다. 일반적인 세균성 폐렴과 달리 이들은 원충에 의한 폐렴에 걸렸다. 이들의 면역기능은 모두 크게 떨어져 있었다. 다른 도시 지역에서도 유사한 환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한결같이 남성 동성애자인 게이들이었다. 그래서 이 희한한 병은 ‘게이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게이뿐 아니라 여성에서도 환자가 발생하고 게이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환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수는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아졌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유명배우와 무용가, 운동선수 등도 희생자가 되면서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미국뿐 아니라 1~2년 사이에 유럽, 아프리카, 아이티 등에서도 환자가 줄을 이었다. 이 지구 대유행병은 다행히 일찍 감염경로가 파악되고 정체가 드러났다. 이 전염병에는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이라는 이름표가 붙었고 원인 바이러스도 밝혀냈다. 하지만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모기가 전파할 수 있다’, ‘악수만 해도 걸린다’ 등 온갖 풍문이 나돌아 사람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지난해 말 현재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 수는 모두 4185만명에 이른다. 2002년 한해 동안에 새로 감염된 수는 500만명가량이다. 또 에이즈로 숨진 사람은 2002년 한해에만 307만명이나 된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도 왜 전염병들이 수그러들지 않고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1973년 이후 지난 30년간 밝혀진 주요 전염병만 20여종에 이른다. 이들은 대개 강한 독성이 있어 치사율도 높다. 또 과거 유행했다 사라진 것으로 여긴 전염병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의 질병예방통제센터는 △병원체를 지닌 동물과의 접촉이 잦아지는 생태학적 변화 △병원체의 전파를 확산시키고 가속화하는 국가 간 여행과 교역의 증가 △공중보건 활동의 위축 △벌목 등 생태계 파괴 등을 꼽고 있다. 에이즈의 확산과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스의 확산 양상을 살펴보면 이들의 지적이 매우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과 괴질, 완전한 승자는 없다

인간은 농경 시대를 맞이하면서 개·닭·소·돼지·고양이 등 각종 가축과 동물을 곁에서 기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괴질 소동과 지구적 전염병(팬데믹·pandemic)의 만연은 대부분 동물이 가지고 있던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으로 들어와 벌어지고 있다. 독감과 조류독감 등은 돼지와 오리 등 조류로부터 퍼진 전염병이고, 에이즈 바이러스는 아프리카 야생 원숭이가 지니고 있던 바이러스가 진화한 것으로 역학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페스트(흑사병)도 쥐가 인간에게 퍼트린 전염병이다. 두창은 소, 백일해는 개와 돼지, 홍역과 결핵은 소가 인간에게 준 치명적 선물이다.

인간과 병원체의 싸움에서 어느 한쪽도 완전 승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두창 박멸은 인간이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얻은 최대 전리품이다. 인간은 소아마비와의 싸움에서 또 한 차례 승전보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과 격렬하게 싸우지 않고 공존을 꾀하는 전염병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피곤할 때 입술 주위에 물집 형태로 나타나는 단순포진 바이러스다. 괴질로 불리는 지구적 전염병은 대개 인간에게 처음 다가올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무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병원체가 증식하는 생활 터전으로 삼는 인간 숙주를 죽이면 자신도 그만큼 일찍 죽고 자손을 퍼트리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에이즈 바이러스도 처음에는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와 환자의 목숨을 일찍 앗아갔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매우 약화됐다. 우리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사스도 처음 등장한 것치고는 그리 무서운 독성을 지닌 전염병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위세는 인류와 병원체와의 전쟁 역사를 살펴볼 때 갈수록 약해질 것이다.

안종주/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 (2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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