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백제를 생각한다

2010.08.18 | 조회 2768

 
 김현일(연구원) / 상생문화연구소
 
 
 
 “백제의 전성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쪽으로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
 
 “백제멸망 후에도
 중국에서의 백제인 해상공동체와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중국 해상무역활동의 중추를 이루었다”

 
 
 「송서」와「양서」에 나타난 대륙백제의 기록
 중국의 25사 가운데 하나인「송서宋書」의 이만전夷蠻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모두 요동 동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침략해서 소유했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해서 소유하였다. 백제의 치소는 그것을 일러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송서」는 6세기 전반 양자강 이남의 중국을 지배하던 남조 국가인 양나라 때 편찬된 사서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는 백제가 요서지역을 언제 점령한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 시기를 언급한 기록이「양서梁書」의 제이전諸夷傳백제조이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자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 땅을 점령하였다.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 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양서」는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사서인데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한 것은 진晉나라 때라고 한다. 진나라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魏나라를 이은 나라이다. 위의 실력자인 사마염이 위의 마지막 황제 원제를 폐위하고 진晉을 세웠던 것이다(265년). 이것이 서진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서진은 사마염(시호는 무제武帝)의 사후 무능한 그의 아들인 혜제가 제위를 이었으나 곧 권력을 놓고 무제의 왕후 양씨와 혜제의 왕후 가씨, 그리고 왕족들간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를 역사에서는 여덟 명의 왕자가 난의 주역이었다고 해서‘팔왕의 난’(290-306)이라고 한다. 왕족들은 흉노, 선비 등 북방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 용병으로 온 이민족들은 서진 내부의 무력함을 목도하여 자신들의 독립을 꿈꾸게 되었다. 흉노의 왕이었던 유연劉淵은 한 왕漢王을 칭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는 몇 년 후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유총이 군대를 동원하여 서진을 멸망시켰다. 나라가 망하자 건업(오늘날의 남경)에 있던 왕족 사마예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 진나라의 명맥을 유지해갔다. 이것이 동진(317-419)이다. 물론 그 영역은 강남에 국한되었다.
 
 유연의 건국을 **로 하여 화북 지역에는 흉노, 선비, 티베트족 계열의‘다섯 오랑캐’가 연이어 나라를 세웠다(五胡十六國). 「 양서」의 기록에 진나라 때라는 것은 아마 서진에서 동진으로 교체되는 이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틈을 타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하였다.
 
 요서군은 진시황秦始皇때에 설치한 군으로 북경에서 가까운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 진평군의 경우 역사 지도책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당대에 편찬된「통전」과 송대에 편찬된「문헌통고」등에는「양서」의 기록을 인용하며 진평군이‘유성柳城과 북평北平사이’라고 그 위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요서군의 서쪽에 인접한 지역이다. 사서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백제가 바다 건너의 요서 지역을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점령하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보인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
 백제가 중국대륙에 해외영토를 갖고 있었음을 드러내 주는 또 다른 성격의 기록이 있다. 북위北魏와 백제의 전투기록이다.
 
 북위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선비족의 하나인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나라이다. 사서에 따르면 탁발씨는 서진 시기에 오늘날의 산서성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탁발규 때 와서 북위라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다(386). 북위는 차츰 화북 지역의 다른 비한족 국가들을 평정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439년). 이로써 오호십육국 시대가 끝났다. 이제부터 6세기 중반까지 북중국에는 선비족이 지배하는 북위가, 양자강 이남에는 한족의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나라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도래하였다.
 
 북위가 백제와 충돌하였다는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서인「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동성왕(재위 479-501) 10년 즉 488년 위나라가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 패배하였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삼국사기」와 같은 기록이 중국 송나라 때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당시 위나라의 군사가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까지 쳐들어왔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라는 강대한 나라가 자리잡고 있음을 염두에 두면 그 가능성은 없다. 위나라 군대와 백제의 전투는 백제의 해외영토가 위치한 화북성 지역과 그 근방인 산동반도 지역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당시 북위는 남제와 싸우고 있었다. 이는「남제서」뿐 아니라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위서」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북위와 남제의 전투는 488년 한차례로 끝나지 않고 근 10년간 계속되었다. 490년에도 큰 전투가 있었는데 당시 북위는 남제와 백제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던 터라 일단 적을 분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한편으로 사신을 남제에 보내 화해를 청한 후 10만 대군을 투입하여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490년의 이 공격을 물리쳤다.
 
 「남제서南齊書」에는 백제왕 모대가 남제 왕에게 보낸 서한이 실려 있다. 모대는 동성왕의 이름이다. 그 서한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록 하자.
 
 
 “지난 경오년(490)에 험윤(북쪽 오랑캐를 지칭한다—필자)이 저희들의 죄를 뇌우치지 않고 군사를 내어 깊이 침범해오기로 신은 사법명 등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려 이를 토벌해서 우뢰와 같이 습격하자 오랑캐들은 황겁해서 마치 바닷물 끓듯이 무너졌습니다. 이 기회를 타고 쫓아가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이니 이로인해서 그 예기가 꺾여 고래같이 사납던 것이 흉한 모습을 감추어 이제는 나라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남제서」동남이전)
 
 
 강시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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