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라’ 백제와 고대 일본

2010.11.12 | 조회 3766

김철수(연구원) / 상생문화연구소

1. 미야자키현의 ‘백제의 마을’을 찾아


지난 5월 말, 일본 큐슈(九州) 땅 깊숙이 숨어있는 ‘백제의 마을’을 찾아가기 위해 험한 산길을 달렸다. 큐슈 땅에서 옛 ‘가야’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만, ‘백제’의 흔적을 만나는 건 흔치 않는 일이다. 일본열도에는 ‘백제’와 관련된 명칭을 가진 지역들이 있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소위 긴키(近畿)지방이라 알려진 오사카, 나라, 오쯔 등의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큐슈 중부의 미야자키현(宮崎縣) 동(東) 우스키군 산속 깊숙한 곳에서 백제를 찾을 수 있다. 10여년 전 이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놓쳐 아쉬워한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면 이번 탐사는 근 10여년 만에 생긴 기회이다.

그러나 ‘백제의 마을’은 쉽사리 길을 내주지 않았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지름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통(?)이 따랐다. 관광지로 이름난 아소산을 가로지르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볼 때까지만 해도 험난한 길을 만나리란걸 꿈엔들 몰랐다. 아니, 일본열도에 이런 길이 있으리라곤 애초에 생각도 못했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니 그저 깨끗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포장도로 그리고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우거진 숲길을 뚫고 마침내 ‘백제의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적인 명칭은 난고손(南鄕村)이다. 백제 왕족이 이곳 남쪽까지 도망쳐 고향마을을 이뤘다는 곳이다. 난고손의 마을 역사를 기록한 『촌사(村史)』에는 이곳에 ‘백제의 마을’이 이루어진 ‘백제와 전설’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자 백제의 정가왕(禎嘉王)이 미카도(神門)로 망명하였다. 왕족은 해안가에 도착하여 미카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백제로부터 뒤를 쫓아온 토벌군이 이곳까지 들어와서 정가왕을 공격하였다. 정가왕의 큰아들 복지왕(福智王)은 여기서 거리가 좀 떨어진 히키(比木)에 거주하였다. 아버지의 위험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달려와 정가왕을 도왔다. 미카도의 호족(豪族)과 주민들도 정가왕에게 식량을 지급하고 병사를 보내 도왔다. 이 싸움은 매우 격렬하여 둘째 아들 화지왕(華智王)이 전사하였다. 토벌군을 격퇴했지만 정가왕도 목숨을 잃었다. 큰 아들 복지왕은 히키로 돌아갔다.

백제의 정가왕은 역사 기록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른 자료를 보면, 정가왕은 의자왕의 아들이었고,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처음부터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고 일본열도의 야마토 왜 지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마토 왜에서 백제계 도래인이 탄압을 받게 되는 정변(‘임신壬申의 난’으로 추정됨-뒤에서 설명하겠다. 필자 주)의 발발로 정가왕 가족 일행은 배 2척에 분승하여 하카타(博多. 큐슈 북부지역 - 필자 주) 방면으로 도주했는데,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규슈 동해안에 상륙하여 이곳 난고손(南鄕村)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다른 배를 탔던 정가왕의 아들 복지왕(福智王)은 아버지가 상륙한 장소로부터 90km 떨어진 기죠마을(木城町)이라는 곳이 도착하게 되어 부자는 헤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뒤는 각각 해당 지역의 신사에 모셔졌다. 그래서 1년에 한번, 음력 12월 중순의 2박 3일간 시와쓰마쯔리(師走祭)가 열리는데 이는 정가왕 부자가 재회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축제이다.
따라서 난고손의 백제 마을에는 정가왕을 모신 미카도(神門)신사가 세워졌다. 서기 718년에 건립된 것인데, 일본의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수년 전 이 신사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백제 양식의 동경(銅鏡) 24점이 발굴되었다. 이 동경 중 몇 개는 나라시(奈良市)의 동대사(東大寺)에 있는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 보관 중인 동경과 동일한 양식이었다.

이런 문화유산들을 보존하기 위해 백제마을에는 나라의 정창원과 한치의 차이도 없는 「서(西)정창원」이 건립되었다. 또 모국인 백제 부여의 왕궁 터에 세워진 객사(客舍)를 모델로 한 「백제의 관(館)」도 세워졌다. 이 시설은 한국인 기술자가 한국의 건재(建材)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백제문화를 소개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이렇게 백제의 마을을 조성하는 데 18억 엔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 난리법석을 피우는 곳이다. 천년이 훨씬 넘어서야 한(恨)을 풀고 있는 것이다. 요즘도 한국에서 이런 저런 꿈(?)을 꾸는 인사들이면 한번 씩 다녀가 기념으로 나무를 심거나 사진을 남겨두려고 애쓰는 곳이 되었다. 10년 만에 얻은 기회로 이런 난고손을 찾은 나는 큐슈 중부의 깊은 골짜기에 서린 백제 왕족의 한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이 곳 저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불쑥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백제는 일본열도와 고대에 어떤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 왜 백제가 멸망했을 때 왕족들은 일본열도로 옮겨갔던 것일까? 이를 밝혀보기 위해 몇 가지 이야기 주제를 가지고 풀어보기로 하겠다.


2. 백제 도래인들의 땅, ‘구다라’

11세기 말 지금의 오사카부(大阪府)를 그린 옛 지도 ‘난파팔랑화도’(1098)를 보면, 지금의 오사카 지역이 ‘백제주(百濟州)’였음이 적혀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구다라’라 읽는다고 표기되었다. ‘구다라’는 일본에서 백제를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에겐 ‘구다라’라고 하면 또 하나의 지명이 떠오른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를 가보면 부소산 아래 금강변에 있는 선착장이 있는 지역 일대가 바로 ‘구드레’인 것이다. ‘구다라’는 이 ‘구드레’와 관련있는 말이다. 고대 백제 사람들은 여기 구드레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일본열도로 향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한 곳, 지금의 오사카 지역을 구다라라 칭한 것이다. 곧 ‘큰 나라 백제’를 일본열도에 심은 것이다(또한 구다라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타古陁’, 즉 ‘큰 비탈’ ‘큰 뜰’ ‘큰 나라’의 뜻이기도 하다).
중국의 사서 『한서(漢書)』‘지리지’에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라 했다. 소위 당시 일본열도에 백여 개의 나라가 나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직 통일된 고대국가 성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서(唐書)』에는 백제의 영역이 왜까지 이르렀음도 기록되었다. 『구당서(舊唐書)』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高麗]였다.”(舊唐書云 ‘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고 했다. 『신당서(新唐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高麗]였다.”(新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문정창은 ‘남쪽의 바다를 건넌 왜’를 나라지방으로 보았다. 곧 일본열도의 나라지역에 있었던 야마토 왜가 백제의 영역권이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료를 통해 이러한 구다라 백제와 일본열도의 관계를 구체척으로 살펴보자. 일본열도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왜의 기반을 조성한 15대 응신왕(應神王. 4세기 말~5세기 초) 때를 보면 눈길을 끄는 사실들이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로부터 도래인들에 대한 기록들이 다수 보인다. 고대의 백제 사람들은 구드레 나룻터에서 끊임없이 일본열도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396년 9월, 고구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이 조정에 왔다. 모든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 못의 이름을 한인 못(韓人池)이라 했다.”
“397년 3월, 백제인이 조정에 왔다.”
“403년 2월, 백제왕이 옷을 만드는 장인(縫衣工女)을 보냈다. … 이 해 유쓰기노기미(弓月君)가 백제로부터 왔다.” 120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오려 했으나 신라의 방해로 가야국(加羅國)에 머물게 했다고 보고하였다(405년 8월에 이 사람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404년 8월,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고 좋은 말 2필을 보냈다.”
“405년 2월, 백제로부터 왕인이 왔다.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왕인으로부터 여러 전적(典籍)을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논어』『천자문』 등 10여 권의 유교 경전을 갖고 왔다.
“409년 9월, 백제로부터 야마토노아야노아다이(倭漢直)의 선조 아치노오미(阿知使主)와 그 아들 쓰가노오미(都加使主)가 당류(黨類) 17현을 거느리고 왔다.”

응신왕 다음인 인덕왕(仁德王) 때도 야마토 왜가 있었던 나라 지방으로 백제인의 이주는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몰려들던 때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391~413)과 그 아들 장수왕(413~491)이 대륙과 한반도를 누비던 시기였다. 특히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475)했고, 백제의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했다.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가 웅진성(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소위 제 2의 백제 건국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백제의 귀족 등 집단이 대거 남하했고, 그 중 일부가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후에도 이주는 계속됐다. 그들은 그냥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백제에서 새로운 공인[今來의 才伎]들이 왔는가 하면, 도가와 도교에 대한 서적도 전해졌다. 7세기 초에는 승려 관륵이 천문, 역법과 함께 둔갑, 방술에 관한 서적도 갖고 왔다. 사람의 이동과 함께, 문화가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인박사였다. 왕인박사는 일본열도에 최초로 천자문, 논어 등 10여권의 경전을 가지고 가 문명을 열어주고, 태자의 스승이 되어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 왜 조정이 탄생할 정치적·정신적 토대를 만들어 준 인물이었다. 이렇듯 야마토 왜는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야마토 왜는 백제문화를 받아들여 국가형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비밀지도가 베일을 벗을수록 거기에는 더욱 더 백제의 큰 나라의 자취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인들!
8세기 중반이 되면, 야마토 지역에 백제인이 80~90%를 차지했다. 『속일본기』에 그런 야마토 지역의 인구구성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 아치노오미(阿知使主)가 거느리고 온 17현민이 야마토 왜의 정치중심지인 다카이치(高市郡=今來郡)의 땅에 가득히 거주하여 백제인 아닌 사람은 10명 중 한 둘뿐이었다’라고.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쿠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일본민족의 기원을 밝히면서 일본민족은 ‘외국(한반도)을 거쳐 일본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일본열도로 왔다’고 주장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민족이라는 말이다! 학자의 발상치곤 아연실색케 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손으로 하늘을 감추려는 처절함일까. 일본 고대사의 진실을 감추려는 일본 지식인들의 처절함이다.
야마토 왜의 중심지에 80, 90%를 차지한 백제인들. 여기서 다시 궁금한 의문이 든다. 과연 ‘일본인’이 누구인가를 묻게 한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한발 앞서거나 뒷 선 백제 도래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대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일본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또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이렇게 많은 백제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그 지배자인 왕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백제인이 왕이 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3. 일본 ‘천황’은 백제인

현재 일본의 아키히토 일왕(125대)이, 비록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고 처음으로 솔직한 고백을 했다. 2001년 12월의 일이다. 일왕은 “환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 고백하였다. 이것은 일본 야마토 왜의 계체왕(繼體王)과 동시대였던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 화을계(기록 담당)이며, 이 화을계의 딸이 49대 광인(光仁王)의 딸 고야신립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이것뿐이었을까?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의 왕이 일본 왕가의 계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80, 90%가 백제인들로 채워진 야마토 왜의 정치 중심지, 그곳을 다스렸던 지배자(왕)가 백제인이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최재석 교수는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일본 왕이 백제인이라 논증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에 나타난 니니기노미코토의 후손인 초대 신무왕(神武王)이 규슈→일본 내해→야마토로 이동하여 개국했다는 기록과, 응신시대 백제의 대규모 집단 이주민이 백제→큐슈→내해→야마토로 이동한 사실이 일치함에 주목했다. 이를 추적하여 야마토의 그 전의 지배자 오오나무지(일본원주민)가 천손(니니기노미코토)에 협박당하여 국토를 내준 것이라 했다. 문화수준에서도 차이가 나는 1/10의 원주민이 게임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일본국가의 형성은 한민족의 ‘정복’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미즈노 유우(水野祐) 등(1978)도 응신왕을 최초의 백제인 정복왕․지배자라 하였다. 응신왕은 새로운 왕조의 시조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외부에서 들어와 왕통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응신왕을 김성호는 비류백제의 말왕(末王), 문정창은 부여후왕(夫餘後王) 의라(依羅)로 보았다. 그들은 모두 야마토 왜의 본격적인 정치적 기반을 형성한 응신왕이 백제인이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또 다른 사실을 통해 살펴보자. 일본의 고교교과서에 ‘성덕태자의 정치’(요즘은‘추고조推古朝의 정치’로 바뀌었다)가 있다. 성덕태자(聖德太子. 574~622)는 일본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로 오늘날 일본의 정신[和]을 제창하고 기초를 닦은 장본인이다. 성덕태자는 누구일까?
백제가 가장 강성했던 근초고왕 때 목라근자(木羅斤子) 장군이 있었다. 비자벌(창녕) 안라(함안) 탁순(대구) 가라(고령) 등을 공격하여 백제의 동남부 강역을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다음 백제의 19대 구이신왕 때 권력자로 목만치(木滿致)가 보인다. 이후 고구려가 강성하여 남하하는 개로왕 때에 목협만치(木協滿致)가 나온다. 그는 문주왕과 조미걸취 등과 함께 한성을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갔다(『삼국사기』 475). 문주왕이 웅진에 천도하여 안감힘을 쓰지만, 문주왕이 암살되자 목협만치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소가(蘇我) 가문의 선조, 소가노마치(蘇我滿智)가 되었다.
소가(曾我,蘇我) 씨는 백제 목협만치의 자손이다. 성은 ‘소가’라 한 것은 그가 처음에 정착한 곳의 지명, ‘소가’(曾我)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제 1대가 목라근자(木羅斤資), 2대 목만치(木滿致), 3대 소가노이시가와(蘇我石河), 4대 소가노마치(蘇我滿致), 5대 소가노가라코(蘇我韓子), 6대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 대신, 7대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대신, 8대 소가노에미시(蘇我蝦夷) 대신, 9대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 대신으로 연결되었다. 16대 인덕(仁德)왕 때, ‘황후를 위하여 가쯔라기부(葛城部)를 두었다’는 조치가 보인다. 이는 백제 목(木)씨 일문이 사는 가쯔라기(葛城)을 우대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다. 또 312년 후의 소가노우마코 대신이 “가쯔라기현은 본시 신(臣)의 본거지이니 소가현(蘇我縣)으로 개칭하여, 신의 봉지(封地)로 하여 주시오”라 요청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나라현 가시와라시(橿原市) 소가천(曾我川) 중류에 있는 지역이다. 6~7세기 100년간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한 자가 소가 가문의 후손인 소가노우마코였다. 소가노우마코는 6세기 말, 일본 최고(最古)의 사찰 아스카절(飛鳥寺)을 세웠다. 아스카절(법흥사法興寺라고도 한다. 588) 불사 조영은 조정의 최고대신인 소가노우마코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절을 세울 때 백제 위덕왕이 588년 불사리, 기술자, 노반박사, 기와기술자, 화공 등을 보냈다. 『부상략기』에 당시 기록이 전하는데, 불사리를 탑에 봉안할 때는 소가씨 일족 100여명이 ‘백제 옷을 입고 의식을 거행했다’고 하였다.
소가노우마코! 곧 아스카 문화를 연 실력자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장악한 자였던 것이다. 소가노우마코는 백제대신의 직계후손이었다. 그는 100여년 세력을 과시하여 31대 용명(用明), 32대 숭준(崇峻), 일본 최초의 여왕인 33대 추고(推古)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 지금 아스카 지역에 남아있는 거대한 고인돌 형식의 이시부타이(石舞台) 고분이 그의 묘로 추정된다. 바로 그 가계에 성덕 태자가 있는 것이다.
아스카절인 법흥사에서 고구려 승 혜자(惠慈)와 백제 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성덕태자의 개혁, 특히 604년(추고 12)의 ‘17조 헌법’은 유명하다. 제 1조가 “화(和)를 갖고 소중히 하라”이다. 왜 화(和)를 주장했을까? 화(和)는 사이를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잘 조합시키는 하모니이다. 고대 문화의 전파와 도래인들, 그들 사이에 하모니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4. 『송서』에 기록된 ‘왜 오왕’의 진실
백제와 야마토 왜의 관련성에 대해 꼭 생각해볼 주제가 있는데, 중국 『송서』에 기록된 ‘왜 오왕(倭五王)’이다. 『송서』에는 ‘왜 오왕’으로 찬(讚)․진(珍)․제(濟)․흥(興)․무(武)가 나타난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 지면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왕이 누구일까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이다.

“順帝昇明二年(478 : 인용자),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藩于外,自昔祖,躬甲,跋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于。臣雖下愚,胤先,驅率所統,歸崇天極,道逕(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掠抄邊,虔劉不已,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此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宋書』 卷九十七 列傳第五十七 夷蠻 倭國)

줄친 부분만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백제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고, 고구려가 무도하여 병탄하려 하고 주변을 약탈하려 해서… 돌아가신 아버지 제(齊)가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죽고, 3년상 때문에 군사를 못 일으켰다가… 이제 때가 되어 병갑을 가다듬고 부형의 유지에 따라 날랜 군사들과 문무를 닦아…. 만약 천지와 같은 황제의 덕으로 이 강적(고구려)을 꺾어 난리를 평정할 수 있다면 어떤 공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표를 올렸더니 조서가 내렸다는 내용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보아도 475년 갑자기 사망한 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장수왕 침공으로 개로왕과 그 왕자가 고구려에 붙잡혀 죽은 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왕 무(武)=개로왕의 태자=사마(무령왕)으로 추정할 수 있는 여지가 남는다. 1971년, 우연한 기회로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때 발견된 무령왕릉의 묘지석을 보면, 무령왕을 사마왕(斯麻王)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역사의 얽힌 실마리 하나를 푸는 참으로 크나큰 발견이었다. 이는 『일본서기』의 다음 기록을 확인해 주었다.

武烈四百濟新撰云。末多王無道暴虐百姓。國人共除。武寧立。諱斯麻王。是混王子之子。則末多王異母兄也。混向倭時。至筑紫嶋生斯麻王。自嶋還送。不至於京産於嶋。故因名焉。今各羅海中有主嶋。王所産嶋。故百濟人號爲主嶋。今案嶋王。是蓋鹵王之子也。末多王是混王之子也。此曰異母兄未詳也(『日本書紀』)

곧 ‘무령왕은 사마왕이며 곤지왕의 아들이다. 곤지왕이 왜로 향할 때 쯔쿠시의 섬(각라도. 현재의 가카라시마 : 인용자 주)에서 낳았기 때문에 섬왕, 사마왕이라 했다’는 내용이다. 이와 더불어 무령왕이 야마토 왜에서 귀국한 후 남제왕에게 주었던 인물화상경(오사카 쓰다하치만궁 소장)에 새겨진 글도 보자.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곧 ‘계미년 8월 10일 (백제무령왕)대왕의 시대에 오시사카궁에 있는 오호도 왕자(男弟王, 계체왕)에게 무령왕(사마斯麻는 무령왕의 휘)께서 아우의 장수를 바라면서 개중비직(開中費直)과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양질의 백동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볼수록, 『송서』에 기록된 왜왕 무(武)가 점점 백제의 무령왕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처럼 고대 야마토 왜를 지배했던 왕이 백제와 무관하지 않음이 뚜렷이 나타난다.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면 마지막 이야기를 살펴보자.

5. 백제의 멸망과 백강구 전투의 결말

왜 백제가 일본(야마토 왜)을 지배하고 있었는가. 그 마지막 근거를 들어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구다라의 큰 나라 백제국의 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큰 나라인 백제가 위기를 맞았는데 야마토 왜가 가만히 있다면, 그 관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백제는 성왕 말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및 신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554년 성왕이 신라 관산성을 치다가 전사한 소식도 『일본서기』에 기록되었다. 야마토 왜는 종국(宗國)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이때부터 구원군을 이끌고 백제로 향했다. 야마토 왜는 백제와 공동운명체였기 때문에 백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국력을 다 쏟은 것이었다.
그러던 중 660년, 백제가 멸망했다. 이런 와중에 야마토 왜가 조용히 있었을 리 만무하였다. 별 일 없듯 가만히 있었다면, 그건 백제와의 관계가 대수롭지 않다는 증거이다. 37대 제명왕(齊明王 655~661) 때다. 백제로부터 멸망소식이 전해졌고, 야마토 왜는 그 소식에 크게 동요했다. 야마토 왜는 바삐 움직였다. 병사갑졸을 서북 해안에 배치하고 성책을 수리하였다. “산천을 단절하는 전조”라 하여 백제와 왜의 공동운명체 관계를 드러내었다. 왕은 ‘몸소 손을 씻고 입을 행구고 정결하게 한 후 신에게 기원을 드렸다.’ 성전(聖戰)에 나서기 앞선 의식처럼 보인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백제 회복을 결의했다.
“위태로움을 돕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창을 베개로 하고 쓸개를 맛보고 있다. … 장군에 나누어 명하여 여러 길을 같이 나아갈 것이다. 구름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움직여 같이 백제의 땅에 모여 그 원수를 참하고 긴박한 고통을 덜리라.”
제명왕은 추운 12월, 아스카를 출발하여 오사카의 나니와궁에 도착했다. 여기서 무기를 정비하고 배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싸움에 질 것을 알았다. 구원군이 패할 것이라는 동요도 유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왕의 뜻을 꺾지 못했다. 왕은 직접 백제가 가깝게 보이는 큐슈의 아사쿠라궁까지 나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렇듯 초조함에 애태우던 왕은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아사쿠라궁에서 죽었다.
그 뒤를 이은 38대 천지왕(天智王 661~671)은 서명왕과 황극왕의 아들이었다. 34대 서명왕(舒明王 629~641)과 그 황후인 35대 황극왕(皇極王 642~645)은 백제와 매우 관련있는 왕들이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자. 639년(서명왕 11년)에는 “올해 큰 궁(大宮=백제궁百濟宮) 및 큰 절(大寺=백제대사百濟大寺, 후의 대안사大安寺)을 만들겠다 하였다. 백제천(소가천曾我川) 곁을 궁처로 하였다. 서쪽의 백성은 궁을 짓고 동쪽의 백성은 절을 지었다.” 그리고 이 해 12월에는 백제천 곁에 구층탑(九重塔)이 세워졌고, 다음 해(640) 10월에는 백제궁이 완성되어 천황이 옮겨 살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641년 서명왕은 죽음을 맞았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었다.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하였다. 이를 백제의 대빈이라 한다.”고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여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소(歸巢) 본능이 있다. 백제는 그들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제대빈’은 바로 고향 백제에서 행해졌던 3년상이었다.
그 아들인 천지왕 역시 백제부흥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63년, 백제 부활의 최대 고비인 백강구 전투에 나설 구원군이 편성되었다. 선박 400척에 지원군 2만 7천명의 대선단이었다. 백강구 전투는 동아시아 판도를 가르는 국제해전이었다. 신라와 당군, 백제와 왜, 탐라국 군사까지 모두 10만 여명, 전선 1,170척이 참가했다. 백제의 부활을 건 싸움에서 백제는 패했다. 백제 왕자는 탐라국, 왜국 병사들을 데리고 투항했다. 이 때 백제왕자가 탐라와 왜 그리고 백제군을 통솔했다는 사실도 당시 왜와 백제의 관계를 추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전쟁에서 백제 부흥군이 패하자 야마토 왜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어찌하나,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으니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 있으리오.” 멸망한 백제 유민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3,000명 이상이 배를 타고 야마토 왜로 이주했다. 백제 지배층인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도 야마토 왜로 이주하였다.
백제의 장군들이 그들을 인솔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야마토 왜로 인솔한 장군들은 야마토 왜의 사람들이 아니라 백제의 장군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열도 곳곳에 산성을 구축하면서 야마토 지역으로 이동했다. 쓰시마, 이키섬, 쯔쿠시 등에 병사를 두고 봉화를 마련하였다. 쯔쿠시에는 큰 제방을 만들고 물을 담게 하였다. 이것이 현재 큐슈에 남아있는 수성(水城)이다. 나가토(長門城)에도 만들고, 마지막으로 가와치와 야마토 경계에 있는 다카야스산(高安山)에도 한국 고유의 산성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식량을 저장해 두었다.
백제가 야마토 왜와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나라라 하면, 어찌 ‘조상의 분묘’를 운운하고 일본열도에 한국식 성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백제장군들이 후퇴하면서 길목마다 성을 쌓아, 항전의 장소를 일본열도로 옮겨 신라와 당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야마토 왜는 천지왕 6년에, 야마토 지역에서 오우미의 오쯔(近江 大津京)로 왕도를 옮겼다. 백성들은 이런 천도를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도를 옮긴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앞서 보았던, 백제 패망이후 일본열도로 몰려든 백제유민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곳이 바로 오우미 지역이었다. 천지왕 4년 2월에 오우미국(近江國) 지역에 400여 인, 5년에 동국(東國)에 2,000여 인, 8년에 백제 장군인 좌평 여자신, 귀실집사 등 700여 인을 오우미국에 옮겨 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우미는 야마토 지역보다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내륙 깊숙한 곳이었다. 조금이라도 안전해지길 바랐던 배려 때문에 오우미가 선택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열도로 온 백제의 이주민들이 이 곳 오우미에서 백제에서의 관직을 고려해 비슷한 자리를 얻었고, 땅도 나누어 받았다. 오우미 왕조에서 관직을 받은 백제인이 70명을 넘었고, 많은 장군들이 군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곳에 사찰과 석탑을 세우고 백제문화도 이식했다. 백제인들 중에는 병법과 약을 다루는 능력[解藥]은 물론, 오경(五經)과 음양(陰陽)에도 밝은 자들이 많았다. 또한 고관으로 출세하여 일본의 율령국가 건설에 공헌한 인물도 많았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같은 부모, 형제국이 아닌 이상 감히 취할 수 없는 조치들이다. 지원군, 백강구 전투, 일본열도로의 피신, 성 쌓기, 오우미로의 천도와 오우미 왕조의 백제인 환대…. 이처럼 백제의 멸망은 야마토 왜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으리라.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연명해 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멸망했고, 수많은 백제인들이 야마토 왜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곧 ‘야마토 왜는 백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점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백제와 야마토 왜는 어떤 관계였을까?
고대의 국가(지배)형태를 살펴보는데 분절국가(分節國家. Segmentary State)라는 방법론도 있다. 분절국가란 의식적인 종주권과 정치적인 통치권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는 국가형태를 말한다. 의식적인 종주권은 주변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반면, 정치적인 통치권은 국왕이 직접 다스리는 중앙에만 한정되어 있는 국가형태다. 지배계급인 중앙의 국왕과 지방 통치자들은 의식(儀式)과 혈연, 친족관계로 맺어져 있다.
중국의 『양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담로(擔魯)제도는 분절국가의 좋은 예이다.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擔魯 如中國之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곧 ‘그 치소를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 그 나라(백제-필자 주)에는 22담로가 있어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백제의 22 담로제도를 소개하였다. 이 기록에 비추어 본다면, 백제와 야마토 왜는 분절국가의 형태였고 야마토 왜는 백제왕족이 다스리는 하나의 담로였음도 추정케 한다.

6. 백제로부터 홀로서기를 꿈꾼 ‘일본’

백강구 전투 이후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백제의 멸망으로 야마토 왜는 자립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40대 천무왕(天武王 673~686)이 그 선두에 섰다. 그는 672년 ‘임신(壬申)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임신의 전쟁’이라 하면 서두에서 큐슈의 난고손 곧 ‘백제의 마을’로 도망왔던 백제의 왕족이 말했던 정변을 말한다.
671년, 천지왕은 조정 내부에서 후계자로 여겨지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를 제쳐두고, 아들 오오토모(大友)를 후계자로 삼을 방침을 굳혔다. 그러나 오오아마는 이를 거부하고 이듬해(672년)에 반란을 결의하였다. 오오아마가 공세를 개시하여 오우미의 오츠궁으로 진격하여 대세를 장악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오오토모는 자결했다. 이것이 임신의 전쟁이고, 이 때 권력을 장악한 오오아마가 바로 천무왕이다.
이 전쟁을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부의 내란으로 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관련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곧 신라와 당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천지왕은 제명왕의 뜻을 이어 백제의 부흥과 원조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이제 백제가 멸망한 마당에 일본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승전국인 신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제관계는 바로 이런 신라와 백제 그리고 야마토 왜의 관계를 말함이다. 천지왕은 백제와 가깝고 천무왕은 신라와 가깝다. 천지왕의 후계를 놓고 천지와 천무는 불화했고, 천지왕이 죽자 이것이 폭발했다. 결국 신라에 가까운 천무왕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하여, 스즈키(鈴木治)는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전부터 소문으로 듣던 천지와 천무의 불화를 이용하여 천지를 무너뜨리고 괴뢰왕조를 만들었다’고 했다. 최재석 교수도 같은 내용을 지적했다. 오히려 그는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신라와 천무가 손을 잡고 천지를 넘어뜨리고 신라의 지시를 따르는, 곧 천무의 정권이 괴뢰왕조’라 하였다. 문정창의 지적은 더욱 노골적이다. 그는 천무왕조의 기록에 나타난 19회에 걸친 빈번한 신라 왕래를 증거삼아, 아예 ‘신라계 천무왕’이라 못박았다. 정효운은 천무왕의 혈연적 계통을 문제삼았다. 그는 ‘천무왕이 신라계 도래인인 이즈모계(出雲系)이며 그를 지원한 동국(東國)의 세력도 신라 도래인 계통이다. 그리고 천무왕이 집권한 이후 30년간은 일본과 신라가 밀월관계에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임신의 전쟁’은 백제 부흥운동인 백강구 전쟁 다음에 벌어진 국제전쟁이다. 백강구 전쟁이 한반도를 무대로 했다면, 임신의 전쟁은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일본 고대 최대의 전쟁’인 셈이다. 이 전쟁에서 이긴 천무천황은 전대 이래의 모든 제도를 일신하여 나갔다. 토착화된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조치들이었다. 모든 것[백제의 유습]을 새로 바꾸고 새 틀을 짰다. 당연지사, 신라의 후원을 받은 조치들이었다.
일본 고래의 의복제도를 금지하고, 『부상략기』에 기록되었던 백제의 의복도 금지했다. 신라복으로 바꾸는 의복령을 제정하고 신라복을 왕족․귀족 등에 하사하여 착용하도록 하였다. 관위제 역시 신라식으로 바꿨다. 문무관(文武官) 선임제, 호적 및 일력의 제정과 사용, 성씨제 실시, 불교행정의 개혁, 승마제 실시, 국가 기본법(율령:‘大寶令’) 편찬(701) 등 행정전반을 개혁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왕경을 조영하고, 도읍도 옮겼다(694). 오우미에서 다시 아스카(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로 바꿨다. 이곳이 바로 ‘신라의 경주를 본뜬’ 왕경(王京)이었다. 일명 후지와라교(藤原京)라 하였다. ‘천황’이란 호칭도 ‘천황대제’에서 차용하여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황대제는 자미원을 구성하는 자리, 하늘의 성스러운 황제를 말한다는 천황대제별인 북극성을 말한다. 천황은 ‘북신(北辰)의 별’ 곧 북극성을 신령화한 용어였다.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는 607년부터 천황칭호가 사용되었지만, 공식화된 것은 이 때 곧 천무조부터였다.
일본열도에서는 지금까지 한반도, 특히 백제와 연결된 역사의 고리를 끊는 ‘새로운 천황’ 중심의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670년에는 아예 국호도 ‘일본’으로 바꾸어 버렸다.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 10년(670) 12월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고 스스로 ‘해 나오는 곳에 가까워 이처럼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드디어는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재정리하는 역사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720년 『일본서기』가 편찬되었다. 『일본서기』는 일본 정부에서 편찬한 최초의 정사(正史)이다. 일본의 신대(神代)부터 지통(持統) 때까지(초기-696) 기록되었다. 일본열도로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한반도의 흔적, 특히 이제 멸망해 없어진 ‘큰 나라 백제’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일이었다. 홀로서기는 ‘새로운 역사 만들기’로 시작되었다. 집안을 만들어 족보를 새로 작성하는 심정이었으리라. 먼 훗날 후손들의 역사가 어떻게 될까 짐작도 못하고….
다시 왕경을 바꿨다. 일본 나라분지의 남단인 아스카, 곧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곳”에서 헤이죠교(平城京)로 다시 천도했다. 710년의 일이다. 헤이죠교는 규모면에서는 크나, 구조면에서는 후지와라교와 동일했다. 해가 지나면서 ‘뿌리를 단절’시키는 왜곡이 더욱 심해졌다. 더욱 절박했던 것일까? 50대 환무왕(桓武王 781~806)은 한반도의 흔적을 끊어내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수도를 지금의 교토(京都)인 헤이안교(平安京)로 옮긴 것이다(794). 815년에는 고대 일본역사를 지배하던 주요 성씨를 정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도 출간했다.
『신찬성씨록』은 ‘황별’(皇別), ‘신별’(神別), ‘제번’(諸蕃)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황별’은 천황의 자손이고, ‘신별’이 고천원의 신(天神)과 위원중국(葦原中國) 곧 일본열도의 신[地祇]의 자손이다. 그리고 ‘제번’은 중국과 한국[三韓]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숨기고자 했던 사실이 이 책으로 인해 오히려 드러나 버렸다. 알리고 싶지 않았던 천황가의 비밀이 폭로되어 버린 것이다.
‘황별’에 기록된 하나의 예를 보자.

“대원진인(大原眞人)은 민달왕의 손(孫) 백제왕으로부터 나왔다.”
(大原眞人…敏達孫百濟王也)
“지상량인(池上椋人)은 민달왕의 손(孫) 백제왕의 후손이다.”

야마토 왜의 30대 민달왕이라 하면 첫 해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은 왕이었다. 일본 왕실과 지배집단이 백제의 도래인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신찬성씨록』 곳곳에는 도래인의 흔적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6. 사이토바루 81호 고분을 바라보며

‘백제의 마을’ 난고손을 보고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군으로 향했다. 난고손에 들어오는 길보다 사이토바루로 나가는 길이 더욱 어려웠다. 운전사조차 혀를 차며 길을 조금씩 나아갔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였다. 다행히 해가 길어서인지 아직 어둡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경주 고분처럼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311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곳이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은 3~6세기 경에 건조된 것으로, 전방후원분이나 원분 등 여러 가지 양식의 고분이 보이는 일본열도에서도 매우 희귀한 지역이다. 이곳은 1952년 일본국의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대부분의 고분이 피장자가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대정(大正 1911~1925)시대 7기를 발굴했으나 이 역시 피장자에 대한 설이 분분할 뿐이다. 아직까지 과거 히무카국(日向國)의 무덤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일본학자들은 ‘바다에서 들어온 해양세력’, ‘대륙의 도래족’이 조성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비록 확실한 단정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모두 한반도 도래인임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이토바루 81호 고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대사의 최대 미스터리인 고분시대의 대표적 묘제이다. 일본사 시대구분에서 고분시대는 야요이 시대와 아스카 시대 사이에 있다. 그 연대도 확실치 않아, 대략 3C후반․4C초~7C전반․8C초로 잡는다. 그 중에서도 4세기는 고분문화의 절정기이다. 이 때 일본열도에 크고 둥근 봉분(전방후원분)이 출현했다. 약 15만개 정도로 추산된다. 일본에선 이러한 거대고분의 존재가 곧 야마토 정권과 통일국가 형성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사실, 현재 일본정부가 왜왕의 묘(천황릉)라 지정한 것들도 애매한 상태이다. 학문적 증거도 없이, 메이지 정부에 의해 차례 차례 왜왕의 묘가 지정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숭신왕의 묘, 경행왕(景行王)의 묘 지정처럼 서로 뒤바뀐 사례도 있다. ‘능묘 참고지’(일본정부 지정)라는 우스꽝스러운 형태도 있다. 이는 특정 왕의 묘에 대한 제 2, 3의 후보지를 말한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일본학자들도 ‘일본의 4세기는 수수께끼의 세기’ ‘불가사의한 신비의 4세기’ ‘공백의 4세기’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4세기는 고대국가 기원 문제와도 얽혀 있다. 고분시대의 뒤를 이어 야마토 조정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는 4세기 경이 전환점인 것이다. 그 전까지는 농경적이고 해양 민족적 색채가 강한 야요이(弥生) 문화였지만, 대륙전래의 성격이 강한 고분문화로 개화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명료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4C말~5C초는 도래인의 시대였다. 따라서 기마민족 도래설, 야마토조정 건설자 외래설 등 많은 추측이 난무하기도 한다. 전방후원분도 이 이야기와 맞물려 진행되고 만들어지고 있다.
참고로 기마민족 국가설을 보자. 이 설을 처음 주장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고분시대의 지배자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고대 한국인들이라 보았다. 따라서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은 한국인 지배자의 무덤들이라 했던 것이다. 그들이 큐슈의 북쪽에서 야요이 문화를 열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야마토 국가를 이루었다는 입장이다. 이 때 한국인 지배자들이란 응신과 인덕왕 부자를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들 정복왕이 백제인으로, 동쪽으로 진출해 야마토 왕조를 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 학계는 이러한 주장에 쉽사리 수긍하지 않는다.
지금껏 일본 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 야마토 왜가 위치했던 오사카, 나라 등의 기내(畿內) 지역에서 처음 나타나 일본 전역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05년 최근,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81호 전방후원분에서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토기를 조사한 결과, 3세기의 토기로 확인되었다. 당연히 그 토기가 있던 81호 전방후원분은 일본 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일 가능성이 높아졌고, 기존의 전방후원분의 전파경로도 수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는 지배자가 큐슈에서 야마토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역사(동정東征설화)임도 동시에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그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어둑어둑할 무렵, 81호 전방후원분을 마주했다. 가슴이 뭉쿨했다.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어 역사왜곡을 풀 수 있는 진원지도 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이토바루 고분군의 81호 전방후원분 너머로 보이는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저 곳에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살았으리라. 그리고 죽어서 이곳에 묻혀 고분군을 이루었으리라. 생각에 좀 더 잠겼으면 했는데,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오월의 태양은 얄궂게도 이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대지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적막에 잠겼다. 진실이 숨겨진 채 아무 말없는 사이토바루 고분의 역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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