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 혹은 섞임

2011.05.02 | 조회 2431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구성원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일은 미학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대단한 사건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는 종교, 사상, 산업, 문화,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런 비벼 넣기의 징후가 뚜렷하다. 특히 교통, 통신, 정보산업이 속도 경쟁에 빠져 있는 요즈음 전화기와 MP3, 컴퓨터, 게임기, TV 등 다기능을 합쳐놓은 스마트폰의 경우에서 보듯 뒤섞기의 마법에 걸려있다. 멀티플레이어가 각광받는 그라운드, 만능엔터테이너가 스타가 되는 연예계, 최첨단 메커니즘과 전통미학을 한 바구니에 담아내는 예술가들이 사랑을 받는다. 시대의 기호는 이미 거대한 비벼 넣기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조금만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대륙과 대양이 만나 동양과 서양이 쉼없이 교류하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만큼 비빔에 관해 자랑할 만한 곳도 드물다. 음양오행 사상과 풍수지리학, 성리학, 불교와 민간신앙, 조각보, 춤과 무예가 어우러진 택견이 그렇다. 늘 우리라는 말을 선호하고 나들이, 미닫이 등 반대 개념을 하나로 묶어내는 언어 습관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 그대로 만들어진 길과 정원, 심지어 막사발 하나에도 상생과 조화의 지혜가 세심하게 배어있음을 보면 우리 문화가 담아내는 비빔 예찬은 생활의 본질이라 해도 무방하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 타인과 맛나게 비벼지려면 그만큼 내 안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덜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배려이자 용서이고, 화해이며 융화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서로 불편하게 껍데기만 물들일 뿐 결코 근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갈등과 대립, 미움과 분노는 그렇게 생겨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점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들과 작은 그릇 속에서는 소박하게 비벼지다가도 거리나 사회 속으로 나서기만 하면 마치 살벌한 전쟁터라도 되는 듯 타인에게 상처 주기에 바쁘다. 도대체 큰 그릇으로는 잘 비벼지려고 하지 않는다. 시대는 이미 세상을 한 덩어리로 섞어놓고 있다. 하지만 물질의 뒤섞기에 집착하느라 원래 우리가 지니고 있던 정신성의 화합은 점점 무가치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 행복하게 비벼져야 할 사람들은 점점 견고한 이기주의의 성채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개인주의에 집착하는 뒤섞기의 밀물이 이 사회를 광범위하게 적셔 놓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극의 개념도 상생의 마음 안에서 균형 있게 비벼질 때 세상은 비로소 행복해지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예술을 창작하는 공간에서만큼은 맵고, 짜고, 싱거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비비고 섞는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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