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국사당國師堂을 가다

2011.11.17 | 조회 5003

잃어버린 인간과 신의 연결 고리

이해영 / 객원기자


인왕산 국사당 가는 길
초여름의 이른 아침, 인왕산 국사당을 찾았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은 출근하는 인파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지만, 국사당을 오르는 길은 고요한 또 다른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간혹 산책하는 시민들이 보이고, 인왕산이 가지고 있는 굳센 기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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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상 서울의 서방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그 웅자(雄姿)를 엿볼 수 있다. 인왕산 한쪽 기슭, 대한민국 정치 중심지인 청와대와 정부청사 근처에 대한민국 무격신앙의 중심지인 국사당(國師堂)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가 국사당을 가기 위해 선택한 경로는 사직공원 내 단군성전을 거쳐가는 길이었다. 독립문 방향에서 올라가는 길에 비해 다소 우회하는 코스이지만, 단군성조를 기리기 위해 굳이 이 길을 택했다.

단군성조는 인류의 태고시절부터 내려오는 광명의 대무(大巫; White Shamans)로서 무격신앙*의 원류와 맞닿아 있기에 국사당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대한제국 시기 상무정신 고양을 위해 광무제*께서 친히 활쏘기를 하였다는 황학정(黃鶴亭)을 지나 국사당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막상 찾아간 국사당은 그 규모가 너무나 왜소했다.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서너 칸짜리 집 한 채와 툭 트인 마당이 전부로 초라하고 쇠락한 모습이다. 현판에 국사당이라고 적혀 있지 않다면, 그저 그런 옛집이나 작은 절집 정도로밖에는 비쳐지질 않는다. 이렇듯 색 바랜 국사당의 모습 이면에는 어떤 역사의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까?


한국 무교와 샤머니즘의 중심지, 국사당

14107_p172_img03원래 국사당은 남산 꼭대기 곧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태종 4년에는 ‘호국의 신’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국사당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던 것이다.

조선 무격신앙의 중심지였던 남산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으로 강제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신사를 내려다보는 곳에 우리의 국사당이 있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던 일제는 국사당 이건(移建)을 권고 또는 협박으로 종용하였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을 헐어 그 재목으로 현재의 위치에 건립하였는데 그 규모는 줄어들었으나, 형태나 구조를 남산의 건물 구조와 같게 하였다. 인왕산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無學大師),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 등을 모시고 있는데, 특히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일반에서는 국사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국사당이 위치한 인왕산은 불가의 『인왕경(仁王經)』과도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은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한 불경(佛經)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꾸준하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신교(神敎)와 맞닿은 무격신앙의 기원
우리가 흔히 무당 혹은 무속(샤머니즘)이라 부르는 신앙형태는 인류의 뿌리문화인 신교(神敎)의 한 모습이다. 현재 우리가 아는 샤머니즘은 서양인들의 해석 틀에 의해 연구되었기 때문에 그 본질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신교는 고조선 이전의 상고시대, 즉 천산산맥 동방을 중심으로 실존했던 환국시대 이래로 우리 조상들이 국교로 받들어 온 한민족의 생활문화이다. 본래 신교라는 말은 『규원사화』의 ‘이신설교以神設敎’에서 유래한다. 여기에는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다’, ‘신의 가르침을 받아 내린다’, 즉 ‘성신(성령)의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신을 모든 인간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14107_p172_img05고대 신화와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금으로부터 5,6천년 전에 이미 인류의 시원 문명이 지구촌에 자리잡았다. 그 때를 보통 ‘신성(神聖)시대’라 부른다. 이른바 뿌리문화 시대로서 동서 문명의 새벽이 밝아 오던 때였다. 오늘의 인류가 누리는 문화의 순수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던 그 당시, 인류는 무병장수를 누렸다.

미국, 멕시코, 티벳 등을 누비며 인류의 샤머니즘 문명을 연구해온 독일의 칼 바이트(H. Kalweit)는 이 황금의 장수문명에 대해 말하면서 “그 때는 인간들을 가르치는 위대한 영적 스승이 있었으며 그들의 수명은 수백 세에 달했다.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며 자연과 하나되어 조화로운 삶을 산 그 신인들을 광명의 대무(大巫), ‘화이트 샤먼(White Shamans)’이라 한다.”고 했다.
그 시대에 인간은 순수 감성을 잃지 않고 대자연의 신성을 눈으로 직접 보고 두 귀로 들으면서 끊임없이 신들과 교감하였다. 이 신과 인간이 빚어낸 신화는 단순히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도와 함께 한 삶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런 무격신앙은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우리 한민족의 생활문화로 그 자취가 전해져 왔다. 고조선 부루 단군의 치수 업적을 기리는 부루 단지, 우물가에서 올린 청수 문화나 상제님께서 제사지내는 환구대제, 굿, 당제 등이나 건설현장에서 행해지는 고사 등은 인간과 신의 평등한 만남과 모든 신앙적 형태를 포용하는 신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굿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면서 제물을 바치고 가무와 의식절차를 통해 행하는 제사의식이다. 무격신앙에서는 굿은 무(巫)의 노래와 춤이 수반되는 큰 규모의 제의이고, 작은 규모는 ‘비손’, ‘손비빔’ 등으로 불린다. [참고 : 안경전, 『개벽 실제상황』, 대원출판)]


제대로 된 질펀한 굿판을 열망하며
국사당은 인왕산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찾을 때도 참배객과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선(禪)바위는 삿갓 쓴 승려의 모습으로 무학대사의 모습이라고 하기도 하고, 태조 이성계 부부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이 선바위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 있다.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투옥되었던 곳. 애국선열들이 영어(囹圄)의 몸으로 선바위와 국사당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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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 국사당을 중심으로 해서 십 수 개의 절과 암자가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고, 붉은 십자가로 무장한 교회들이 운집해 있어 다소 부조화스런 느낌을 안겨준다. 한편 국사당의 주신(主神)이 최영 장군이라는 설도 전한다. 국사당 안 무신도(武神圖)의 주인공이 그라는 이야기인데,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고려말 충신의 표상인 최영 장군과, 그를 제거하고 새나라 조선을 연 이성계의 악연이 이 국사당을 접점으로 연결된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 때 미신으로 치부되고 우리들 의식에서 원시적이고 낡은 것으로 여겨져 온 무격신앙, 이제는 올바른 원형을 찾고 그 의미를 바로 새길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문득 정말 제대로 된 질펀한 굿판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쌓이고 쌓인 원(怨)과 한(恨) 풀어내고, 악업과 척, 살을 제어하는 살풀이로서의 제의(祭儀), 더 나아가 자연과 만나는 문화양식으로서의 제대로 된 굿거리를 체험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북받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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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격신앙: 무속신앙이란 명칭은 원래 있던 표기가 아니고 최근에 만들어진 말이다. 오히려 무당이나 무격 등이 더 대중적인 말이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 글에서는 무격신앙이나 무당으로 표기한다. (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한겨레신문사)

* 광무제: 고종(高宗)이라는 묘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칭해진 호칭이다.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칭제(稱帝)건원(建元)했기 때문에 그 예에 맞게 당시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제라 호칭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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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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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가인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138.2㎝, 세로 79.2㎝이다.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굿에 대하여
굿에는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재수(財數)굿,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삼신(三神)굿,’ 치유를 위한 병굿, 산 사람의 안전을 위해 사령(死靈)의 명복을 비는 지노귀(指路鬼)굿, 선무당의 확실한 강신(降神)을 위한 신굿, 풍물(風物)굿 등이 있다.
풍물굿은 상고(上古)시대에 전쟁 시의 진군악(進軍樂)에서 유래되었으며, 꽹과리, 장고, 북, 징의 네 가지 악기[四物]와 나발, 태평소, 소고 등의 악기를 기본 구성으로 하여 연주와 몸동작 그리고 진(陣)을 구성하며 하는 놀이와 연희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굿의 종류는 문화적 역량이 발달할수록 섬세하면서도 정치하게 발달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지역마다 너무나 다양한 굿거리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무격 문화의 발달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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