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STB] 조선총독부 특명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라

2010.05.17 | 조회 27934

*기획의도

미국 워싱턴디씨에 위치한 국립문서보관소 이 곳에서 지난 1988년 매우 귀중한 사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일제의 역사감정기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는데요. 1921년 한국에서 근무하던 총영사 밀러가 미국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주현연구원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 당시 식민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이제 분석해 볼 수가 있고 1925년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지면서 당시에 국내 청년단체라든가 모든 사회단체 동향이 보고되고 당시에 정치적인 추세 같은 게 보고되어 있는데 세밀한 부분에서는 조금 한계가 있지만 당시의 국내 동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서입니다.

이 보고서의 내용 중에서 눈에 띄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보천교라는 종교에 관한 것입니다. 보천교라 지금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 당시 태을교 또는 선도교로 알려진 보천교는 신도수가 한때 600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한국인이 보천교에 동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니시야마 시게루 교수 일본도요대학 종교사회학과 - 민중의 고민이 보천교 등의 신종교에 크게 투영돼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천교를 들여다보면 당시의 민중의 고민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태을교도 대검거 (동아일보 1921. 4. 7)
선도를 표방하고 국권회복을 도모하던 비밀단체 대검거(동아일보 1921. 4. 7)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태을교도 대검거 (동아일보 1921. 5. 13)

당시 국내외 주요신문기사를 살펴보면 흔히 태을교 또는 선도교로 불렸던 보천교가 조선총독부의 집중적인 검거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왜 이 종교단체에 그렇게 열을 올렸던 것일까요?

윤이흠 명예교수 서울대종교학과 - 특히 민족종교는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민속, 우리 국민의 전통적인 감정을 그대로 안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종교의 탄압은 곧 한국에 있어서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의 부활을 막는 길이었다.

지금부터 조선총독부의 철퇴를 맞고 철저히 역사 속에 묻힌 보천교 그리고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우리민족종교가 당당했던 역할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특명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라
1938년 3월 5일 경성 태서관

여기 참으로 오래된 사진한장이 있습니다. 촬영시기는 1938년 3월 5일 촬영장소는 경성시내 태서관이라는 고급식당인데요 기모노 차림으로 정중앙에 앉은 이마무라 도모는 통감부에서 근무하는 사람인데 조선민속학계 장로로 불리었다고 하죠 그 옆으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 바로 무라야마 지준(1891~1968)이 있습니다. 그는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일본케이오기쥬큐대학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하나를 이 대학 아시아 계층문화연구소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1968년 무라야마지준 사망 후 가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자료를 현재 이 대학에 노무라 신이치교수가 연구하고 있습니다.


노무라 신이치 교수 일본케이오키쥬큐대학 - 자료를 받았을 때 사진의 얼굴이 상당히 딱딱하고 웃는 얼굴이 거의 없어 저는 바로 흥미를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또 사진에 간단한 메모가 있는데 이게 도대체 어떤 사진인가? 하는 것을 모르면 발표할 수 없기 때문에 5년쯤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사진들은 당시 한국의 연중행사, 생활 전반을 담고 있습니다. 또 민족종교나 민간신앙에 관한 전형적인 증거 사진입니다.

(조선 - 조선총독부 발행잡지)

특히 그가 남긴 한국에 관한 사진이 무려 400장 가까이 된다니 놀랍기 그지없는데 사진만이 아닙니다.

(조선의 유사종교 - 조선총독부 자료집)

글로 엮인 조사자료집도 열권 가량이 됩니다.

이러한 자료를 남긴 무라야마 지준은 대정5년 그러니까 1916년에 도교제국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대정8년 1919년 7월에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라야마 지준은 졸업을 한 그 해 바로 조선으로 건너 왔다고 하는데 그는 과연 조선에서 무슨 신분으로 어떤 연구를 했을까요?


일본 도쿄 세타가야구 무라야마 지준의 큰 딸 무라야마 쿠미꼬씨를 찾아가 봤습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하이 안녕하십니까 지금도 집 2층에 아버지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무라야마 쿠미코씨 한국에서 태어나 13살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14살때 다시 일본으로 건너 왔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 무라야마 지준에 대한 기억들을 물어 봤습니다.
무라야마 쿠니코 무라야마 지준의 딸 - 일관계로 자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자주 접촉은 없었지만 좋은 아버지였다고 생각합니다.


Q. 부친께서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문서과에 계셨던 것 같아요 직원이라 할까 촉탁이라고 할까 잘 모르겠는데 꽤 자유로웠던 것 같았습니다.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으로 건너 온 경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해외에 가고 싶어 하던 때 마침 조선에 있던 선배로부터 권유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아사쿠라 토시오 교수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 - 조선에 오셔서 조선의 총독부 촉탁이 되셔가지고 아마 그게 아무래도 식민지 정책에 관련해서 그 한국 사람들의 그 때 당시 조선인의 사상 그걸 좀 알고자 한 거 같습니다. 요번에 무라야마 선생에 대해 조사해 보니까 가장 깊게 생각한 것이 그 때 당시 시대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무라야마 선생이 학자로서 조선 총독부의 촉탁인 관리로서 무라야미 지준 그 두 가지 측면에서 갈등하면서 연구한 거 같습니다.


무라야마 지준은 당시 경찰서장이라는 말도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그가 벌인 조사나 주제가 매우 다양해서 그에 경력에 많은 의문이 듭니다. 실제로 조선의 문화와 종교에 힘을 기울였던 무라야마지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조선에서 생겨난 종교 특히 오늘날 민족종교라 불리는 종교의 조사 작업까지 했습니다.

윤이흠 명예교수 서울대종교학과 - 우리나라의 민속자료를 모았기 때문에 우리 문화나 민속사를 이해하는데 뭐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데 조금 더 깊이 비판적인 안목으로 수용해야 될 자료들입니다. 우리나라 종교문화정책을 세우는데 말하자면 고리를 만드는데 어떤 고리가 더 튼튼하고 빨리 족쇄를 채울 수 있나 그런 측면에서 작업했던 거죠

20세기 초 일제강점이전의 조선은 세도정치가들과 탐욕에 빠진 일부 관리들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진데다 제국주의 침략까지 더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 석좌교수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 정부가 나라를 통제할 능력, 특히 조세징수의 능력이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4백년을 자랑해온 조선왕조는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19세기 중반까지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에 간섭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큰 불안정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저는 1876년에 맺은 강화도조약 이후 사실상 1910년까지 계속되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향을 고려하여 그 시기가 조선에 커다란 혼란의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했고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과 대종교, 보천교와 같은 민족정신을 일깨운 종교가 태동했습니다. 백성들의 희망으로 등장했지요

윤이흠 명예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 그 때 당시에 우리 국민들은 어디 갈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죠 새 세상을 여는 운동에 동참을 하는 게 개벽이었죠 그러니 개벽의 내용은 뭐냐면 새 세상이 되면 그 주역은 한민족이 되고 그 중심은 한반도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 911호 1915. 8. 16)
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은 1915년 8월 포교규칙 제83호로 공표하며 종교를 공인과 비공인으로 구분 짓습니다.

(조선총독부 부령 제83호 포교규칙 1915년 8월 16일)

"제1조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 불교 및 기독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민족종교가 백성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루아침에 비공인 종교가 되어버렸죠 이러한 식민지 종교 정책은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본토에서 행해진 종교통일과 매우 유사합니다.

니시야미 시게루 교수 일본도요대학 종교사회학과 - 일본에서는 국가가 공인하지 않는 신종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유사종교로 불리는데 국가로부터 공인받지 못해서 단속을 당하게 됩니다.

근대화와 아시아진출에 방해가 되는 행위는 일제히 정리했던 것인데요 여기에 공인된 종교 한가지는 일본의 종교인 신도입니다. 신도 우리에게는 조금 낮선 종교지요 어떤 종교일까요 일본의 한 신사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수 많은 신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이러한 신들에게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던 것이 일본의 신앙문화이자 종교였습니다.
현재 일본 곳곳에서 행해지는 마쯔리에서도 일본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는데요 칠월 칠석 축제 때 일본인들은 나무에 소원을 적습니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소원을 비는 이 아이 과연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요?


우케모토 아이카 - 발레를 잘 하고 싶어요
하지만 신도는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국가적 종교로 변질되게 됩니다.

니시야마 시게루 교수 - 일본도요대학 종교사회학과 - 모든 신들이 천황제 안에서 서열화 되게 됩니다. 그러한 신도가 메이지 천황 때에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국가신도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19년 7월 조선 총독부는 일본의 국조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신도을 만들어 우리 국민들에게 참배를 하도록 했습니다. 식민지 통치에 편리하도록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신도를 강요한 것입니다.

김철수 박사 증산도 사상연구소 - 1918년에 내무성 비밀보고로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건 이라는 보고서가 나옵니다. 이로써 이제 식민지 조선에 종교통제를 위한 조선신궁 설립을 위한 터전이 마련됩니다. 그와 동시에 단군 합사론이란 논쟁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천조대신과 단군을 같이 합사하자는 논쟁입니다. 물론 이것은 동일한 위격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조대신 밑에 단군을 둠으로써 국토가 이양되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민중들의 정신구조를 완전히 바꿀라는 정책을 쓰게 됩니다.
조선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신도를 강요하는 한편 보천교나 천도교와 같은 민족종교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를 위해 민족종교에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웠습니다.

윤이흠 명예교수 서울대종교학과 - 유사종교라는 건 정말 없습니다. 만약에 유사종교라는 말을 쓴다면 공산주의 같은 건 유사종교예요 지금 이북정권 같은 건 유사종교예요 그러니까 종교단체를 두고 이렇게 쓰는 것은 일제가 유일한 압박정책으로 썼던 것이죠

이렇게 유사종교를 분류된 민족종교는 항상 감시하고 대중집회를 금지하는데 그 주체는 경찰국이었습니다.

조정인 교수 제주대 사회학과 -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지금 구축해가는 상황에서 그걸 방해하고 민중들이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자연스럽게 흡수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종교조직들을 없애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경찰이 직접 관리했다는 것은 탄압의 대상이고 독립운동의 일종으로 보고 이런 민중들에게 쓸데없이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을 자꾸만 불어 넣어 주는 종교를 막아야 된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조선총독부는 민족종교를 어떻게 탄압했을까요? 조선의 종교와 사상단체를 하나의 본보기로 삼은 단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보천교였습니다. 보천교 어떤 종교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보천교 신앙인들은 정갈한 마음과 청결한 몸으로 하루 두번 청수를 올렸습니다. 이는 수천년을 내려온 우리민족의 전통 중 하나죠 또 보천교 신앙인들은 모든 인간이 생명의 근원처를 찾아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주문인 태을주를 외웠습니다. 대중은 이러한 신도들의 모습을 보고 태을도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무라야마 지준 그는 당시 태을교 또는 선도교로 불리던 이 종교단체의 수장을 만납니다. 바로 차경석이란 분이셨죠 차경석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1894년 1월 정읍 고부군의 농민봉기로 시작되어 농민대중이 중심이 된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동학농민운동 우리민족의 자주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시도였죠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운동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채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참여했던 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전북 정읍의 구민사, 이 곳에 당시 전봉준과 함께 정읍봉기에 참가한 차치구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는데 바로 이분의 첫째 아들이 차경석입니다.

이상환 교수 경북대경영학과 증산도사상연구회 - 차경석의 나이 14세 때 시체더미를 헤집고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 오는 그와 같은 강단있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차경석의 나이 28세 되던 해 1907년 증산 상제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로부터 자기 인생이 바뀌게 되는데 상제님을 뵙자마자 그 분의 비범함에 놀래 가지고 그로부터 13일간 줄기차게 모시기를 간청하게 됩니다. 결국 허락을 받고 그 이후로는 줄곧 상제님을 모시게 됩니다. 증산상제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종통이 부인이신 고수부님에게 전수되는데 고수부님과 같이 활동을 하시다가 교단을 주도하는 가운데 월곡 차경석은 전국적으로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하게 됩니다.

무라야마 지준 조선총독부 관병문서과 촉탁 - 차선생께서는 교조를 언제 만나셨는지요?
차경석 보천교 교주 - 예 저는 강증산 상제님을 정미년 그러니까 1907년에 처음 뵈었습니다.
그런데 강증산 선생을 옥황상제라 하시던데
예 그 분께서 직접 생존 시에 내가 옥황상제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천교에서 교조로 모신 상제 강증산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호남평야를 어머니처럼 안고 있는 모악산 이곳은 1901년 증산 강일순이 도를 이루고 개벽과 상생을 선포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상환교수 경북대경영학과 증삳노사상연구회 - 개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땅이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을 미워하고 또 억압하고 때론 전쟁을 통해서 남을 죽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의 가슴뿐만 아니라 이 천지간에는 원한으로 가득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증산상제님께서는 이 천지간에 가득한 원과 한을 풀어서 서로 미워하지않고 억압받지 않으면서 서로가 잘되는 세상을 여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세상에 바로 상생의 세계인 것입니다.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나라를 잃었으며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았던 당시 사람들은 개벽을 통해 새 세상이 열린다는 말씀을 희망의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18년 무오년 제주도에서 농기구나 엽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주재소장과 일본군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은 한라산 중턱에 법정사라는 절이었죠 화재로 인해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규모가 꽤 컸다고 합니다. 사건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법정사 주지였던 김연일, 보천교 수령 박주석, 제주도민대표 방진주등이었고 이들은 연합해 약 400여명의 도민을 끌어 모았습니다.


(사상월보 제2권 제5호 고등검사국 사상부 (1932) - 1918년 가을 불교도 김연일이란 자가 불무황제라 칭하여,,, 선도교도를 선동하여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 집기, 가재 등을 파괴 방화한 사례가 있다.)

조성윤 교수 제주대 사회학과 - 후천개벽을 이끄는 사람들은 불무황제라는 그 존재가 있어서 그 황제를 따라서 나가면 다 우리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렇게 보는 건데 그거는 중요한게 그냥 따라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나서서 일제와 싸워서 얻어야 된다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가 급파됩니다. 그래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진압되고 마는데 예순 명이 체포되어서 그중 스무명은 실형을 받고 열다섯명은 벌금형을 받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만 같은 제주도에서 당시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19세기 후반 제주도에서는 여러차례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제주도민들은 지나친 정부수탈에 대한 불만 그리고 서구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일제시대엔 제주도의 자원과 산림수탈이 타지역보다 심각했죠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고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촉매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 생산한 많은 양의 면화가 보천교 본소가 있는 전북정읍의 대흥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면화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그 안에 성금이 들어 있는 것이 발각되었고 이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의심한 일제는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한 것이죠

안후상 교사 전북고창북고등학교 탄압이 제주도에까지 이어지면서 보천교도들이 아마 반항 또는 저항을 주도면밀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보천교 운동은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을 기점으로 24방주제가 탄로가 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보천교 운동은 비밀 결사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이후에 법정사 항쟁 이후에는 차경석, 고판례, 차윤칠이라던지 하는 이런 선도 계열의 인사들이 일제히 구속되거나 수배를 당합니다.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과 3.1운동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진 종교계의 항일운동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기사를 살펴보면 기독교 천주교 기성종교보다 훨씬 많은 건수를 나타낸 종교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도교와 보천교였습니다.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 (1920년 ~ 1940년)

성주현 연구원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 천도교 같은 경우 천도교 청년회 같은 단체를 만들고 개벽이라던가 어린이 운동을 통해서 문화운동을 전개했고, 태을교 계열 쪽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이라던가 이런 걸 통해가지고 민족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군자금 모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군자금 모금 같은 경우는 특히 합법적인 치성금, 성미를 모금했었는데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러한 군자금 모금에 있어서는 상당히 민족운동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문화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일련의 사회활동에 민족종교단체들이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뭘까요?

김철수 박사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 정치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요 당시에 일제강점에 도움을 줬던 일진회까지도 해산시키는 상황이었죠 그러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3.1독립운동에서 종교가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회단체는 사실은 힘이 약화됐지만 종교단체만은 어느 정도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여력을 갖기 시작하게 됩니다.


식민통치의 중추기관인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종교현황을 철저히 조사하는 한편 집단적 저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수많은 치안 법규들을 생산하게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령7호와 치안유지법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매우 움추러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 석좌교수 미국시카고대학 역사학과 - 한국의 민족주의는 1920년대에 크나큰 발전을 이뤘지만 1930년대까지는 극단적인 정치가 자리를 잡았고 한국 내에서는 한국 민족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친일파가 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다른 식민주의 국가들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는 1930년대 에 일본이 했던 만큼 상황을 잘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엄청한 수의 검찰, 군 병력 및 관료를 보유하고 있었고 한국 내에서 일본에 저항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민족종교단체의 항일활동은 대한민국독립운동사에서 그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 고 김홍규선생의 활동은 2005년에서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김홍규 (1888~1950) 탄허스님의 아버지, 보천교 고위간부를 맡으며 재무를 담당 독립운동자금모금에 큰 역할을 함, 2005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됨)

국내 항일운동에 가담한 공훈을 기려 정부에서는 2005년 건국훈장을 추서했죠 하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항일운동과 관련이 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요즘 사람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21년 음력 9월 16일 보천교의 재무담당이었던 김홍규의 집에서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평소 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전북과 충남 두 지역의 경관들이 김홍규의 집을 습격해 간부들을 체포했습니다. 김홍규를 비롯해 최도홍, 고편상, 고태규, 유원익 등이 체포되는 동시에 가택수색까지 당했고 마루 밑에선 10만원 가량이 든 항아리가 발견되었는데 이 돈은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될 군자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안타깝게 일경에 탄로가 나면서 돈을 모두 압수당하고 말았죠



(십만원의 독립자금 동아일보 1921. 10. 29)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이 실제로 전달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장군에게 보천교에서 2만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무장대의 편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김좌진 군자금 얻다 대정13년 1924년 관동청 경무국 비아세아국 제3과 제 32743호)

김재영 교사 전북 00 고등학교 - 그 정보자료에는 김좌진이 자금이 없어서 부대를 해체할 상황에 이르렀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적시에 지원이 되었다 한다면 무장투쟁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또 실제로 이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려고 했을 때도 상해 임시정부도 마찬가지로 재정적인 압박이 굉장히 컸어요 그래서 그 자금이 제대로 임시정부에 조달이 되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보천교에 군자모집하러 왔다는 이유로 정읍경찰에 잡히었다 동아일보 1924. 4.1)
(민족운동자금으로 30만원 반출계획 보천교 이용사건 어제공판 동아일보 1926. 11. 14)

독립운동 단체들이 보천교 본소를 자주 드나들었고 이들에게 자금이 지원되었다는 기록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데 실제로 보천교에 그럴만한 자금력이 있었을까요?
우선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보천교 신앙인들로 인해 마을규모가 상당히 커졌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영철 이장 전북 정읍시 대흥리 - 그 때 당시는 별로 마을이 형성 안되었는데 1918년 20년 그 순간부터 보천교가 들어서면서 각 도에서 그냥 뭐 함경도에서 제주도 사람까지 전국 사람들이 다 모인데가 이곳이에요 각 성바지(성씨)가 다 모인 데가 이곳이라고 봐요
보천교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이 마을은 신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합니다.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 주시는데요
문준오 정읍 대흥리 - 거개 보천교 본소에 종이 있는데 왕십리 사람들 명절 때 되면 많이 놀러 와서 쭉 앉아가지고 놀다가 점심 때 되면 또 종 치고


최기종 정읍 대흥리 - 아마 그 건물이 지금 있다면 세계에서도 안 빠질 거여
지금 그거을 보존했다면 안 뜯고 그대로 있으면 참말로 정읍관광이 무지무지해지지 거기 내장왔다가 꼭 들리고 가지
대흥리에 매우 큰 종이 있었고 보천교 본소가 매우 크게 지어졌다는 것인데, 일제강점기 절망에 빠진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던 상징물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김재영 교사 전북 00고등학교 - 보천교에서는 1924년 말부터 29년까지 4년 이상 걸려서 당시 돈으로 한 150만 원 이상 투자되는 거액을 들여 가지고 이 곳에 약 45동의 건물을 건축한 바 있습니다. 1924년 당시에 물가가 쌀 한 가마니가 오원 삼십 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백오십만 원이 어느 정도의 거액인지 아마 짐작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150만원을 들여 지었다는 보천교 본소 과연 어땠을까요? 현재 남아있는 평면도를 바탕으로 해서 복원해 보았습니다. 본소의 정문인 보화문은 서울 광화문을 본따서 층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안채에 들어가면 교인들이 사무를 보는 건물들과 부속건물들이 있고 중앙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십일전이 있었습니다.

안후상 교사 전북고창북고등학교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에 완공이 되었어요 그 해에 십일전 건축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조선신궁과 맞먹는 조선의 건축물을 지어야 된다 그래서 십일전이 지어졌다. 그런 전언도 있고 그러나 기본적으로 보천교는 지상선경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신정부 건설이 목표였기 때문에 신정부를 담아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있어야 되겠고 십이라는 수는 음수 가운데 제일 마지막 수이고 일이라는 수는 양수 가운데 그래서 십일은 그야말로 무극과 태극을 상징하는 이런 숫자이고 그래서 십일전을 태극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사회풍조는 서양문화를 받아 들이기 급급했고 전통적인 것은 부정당하면서 미신 또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비하됐죠 이 때 보천교에서는 흰 옷과 상투를 유지했고 전통음악을 발전 계승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읍 풍물굿 일명 우도농악입니다. 정읍 풍물굿이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보천교에서 풍물을 수용하고 적극 권장했기 때문이죠 풍물을 종교음악으로 지정하고 뛰어난 예능인들을 불러모아 통합시킴으로써 예술적 수준이 다시 한 번 향상되었습니다.
겉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을 파악하기는 힘들죠 우리 민족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전통문화를 계승했다고 해서 보천교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렸을까요?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1921년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에서 상당히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일본경찰이 인간띠를 두른 듯 막고 있었습니다. 수배 중이던 차경석이 나타나 이를 뚫고 나타나 천제를 올린 것이지요

안후상 교사 전북 고창북고등학교 - 우리 나라 같은 경우는 조선시내 내내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 의뢰를 해서 천자기 대신 하늘에 제사를 지내 줍니다. 그런데 대한제국 때,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이라고 선포를 하고 광무라 하고 왕을 황제라고 하고, 원구단에서 고천제를 올립니다. 중국에 대한 자주성을 선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 때 당시는 사실 조선이 힘이 없을 때이고 고천제를 올린다는 것이 보천교 내부에서는 종교적 제례라 하지만 일반인들은 천자등극식이라고 알려졌죠

(자칭 시대국 황제 동아일보 1922. 10. 26)

당시 보천교는 반일의 색채를 드러내 놓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상생의 세상이열리고 이 조선이 그것을 실현하는 새로운 왕조가 건설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꿈을 실현시켜 주는 이가 차경석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보천교의 교세는 급격히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훔치교도와 대충돌 동아일보 1922. 8. 19)

1922년 전남 고흥에서 보천교 집회를 감시하던 경찰과 교인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찰이 권총을 발사해 교인 한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후 교인을 사살한 경찰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고 집회를 주도한 교단간부들만 체포되었습니다.
(태을교도 총살사건에 대하야 사회의 조사필요 동아일보 1922. 8. 23)

당시 일간지는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사건은 일파 만파로 확대되었는데 사회문제가 된 이사건에 대해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적반하장으로 교인들을 소유죄, 보안법위반, 직무방해죄, 치안법 위반등으로 기소해버렸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이렇게 보천교인들이 수난을 겪어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국내에 있는 조선총독부 관련 기록물들은 매우 단편적이어서 그것을 판단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이곳 일본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는 총독부가 종교를 어떻게 탄압하고 통제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자료들은 조선총독부에서 통치결정상 중요위치에 있던 간부들이 정치입안상 작성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미야타 세츠코 교수 일본학습원대학 우방문고 - 미즈다 나오마사 라는 사람인데요 소화천황 때 20년 간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딴 사람입니다. 그 분을 직접 만나 제국의회자료는 몇 부 작성되었습니까? 물어 보니 4부 밖에 작성이 안되었다 합니다. 조선총독부 1부, 정무총관용 1부, 재무국장용 1부, 그리고 예비가 1부씩 총 4부라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 부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료라서 극비라는 표시는 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인의 눈에 띄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일제 강정기 이 땅에는 36개 정도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보천교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단행본으로 특히 비밀보고자료로 발간했다는 것은 총독부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보천교 일반 - 전라북도 1926년 - 포교에 노력한 결과 한 때 600만의 교도에 달하였다고 한다.)


교도수가 600만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급급히 확장되었기에 보천교는 조선총독부에 두려움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죠 또 그 당시 경찰의 분포도를 좀 볼까요? 보천교 본소가 있던 정읍에 경찰이 타지역에 비해 굉장히 많은데요 이것은 보천교에 대한 감시가 매우 심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경찰인력분포도 (소화2년 5월 차인상황, 전북고등경찰과 1927년)

(천리경찰국장이 보천교주 차천자를 방문 동아일보 1928. 10. 10)

보천교인의 모임을 늘 감시하며 증거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총독부, 식민지 조선의 최고 책임자였던 총독과 경무국장이 보천교 본소로 방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보천교가 총독부의 얼마나 중요한 관리대상인지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니시야마 시게루 교수 일본 토요대학 종교사회학과 - 구세주와 지상천국을 열망하는 많은 민중들이 거기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총독부의 염려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총독부에 있어서 보천교는 위험한 종교라고 여겨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학자 무라야마 지준을 통해 차경석을 터무니없는 예언자로 몰고 언론을 이용해 보천교를 사교집단으로 매도했습니다.

1925년 교리와 대동단의 취지를 알리고 탄압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교인들을 일본에 파견한 보천교, 이 일로 보천교는 친일단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죠

(보천교 연혁사 1958년 - 관에서는 배일 단체로 지목받아 취채가 비상하고 조선사회에서는 친일분자로 오인하여 공격의 무쌍하니 양관에 처한 교도는 고립상태로 호소무처하다)

1936년 교주 차경석의 죽음으로 교무집행이 금지당하고 이어 5월에는 경찰들이 보천교의 건물관리를 실시합니다. 6월에는 정읍경찰서장이 보천교해산을 선언하고 이어 십일전을 비롯한 건물을 포기를 일방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경관 40여명 출동, 보천교 본부를 습격, 10일 이른 새벽에 전북 경찰부에서 사교취채의 대철퇴 조선중앙일보 1936. 06. 11)

김재영 교사 전북00고등학교 - 지역의 유지들이 조선 내에서 볼 수 없는 건물이다 그거를 병원이나 학교설립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제 철거가 목적이니까 당시 돈 100만원을 준다 하더라도 입찰 할 수 없다. 그래서 철거를 당행했고 일부는 뜯어다가 장작으로 썼다고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홍배교수 경일대 경영학과 증산도 교수신도회부회장 - 십일전은 실의에 찬 그 당시 민중에게 희망을 갖게 한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반대가 거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결국 강제철거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규모가 너무 커서 철거 자체도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십일전이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옮겨질 때 너무 커서 잘라 썼다고 합니다. 건축에 사용된 원목의 대다수를 만주 등지에서 구하였습니다. 특히 상량보는 3년의 공덕을 들여서 백두산에서 구하였는데 일반으로 운송을 할 수가 없었고 압록강으로 실어 올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이런 건물들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 해체되어 조계사 대웅전 뿐만 아니라 내장사 대웅전 동대문의 축대 등 전국 각지로 옮겨지고 지금은 그 실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십일전의 해체는 민족정신의 해체이자 수많은 민중의 희망이 해체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 뿌리까지 말리려고 교의 본소를 철저히 훼손하니 화려하고 웅장했던 십일전은 뜯겨져 국내 사찰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고 말았죠 현재 폐허로 남아 있는 십일전 터는 조선총독부가 보천교와 우리민족정신을 얼마나 철저히 짓밟았는지 씁쓸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여름 재외동포 가족들이 고국을 찾아왔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운영하는 특별프로그램을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이 국난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이라 할 수 있죠

김경미 교육부장 독립기념관 -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고 하면 강자에게 약자가 당했던 그런 역사로 알고 있는데 그 역사가 사실은 굉장히 정의롭지 못했던 역사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약한 힘이지만 당당히 저항을 했다고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식민지 체제에서의 저항과 독립운동, 조선총독부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한국인의 심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민족정신이었습니다.

마야타 세츠코 교수 일본학습원대학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조선인을 신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인이 손을 베어서 피로 자신의 총성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런 과정된 표현은 오히려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조선인의 총이 일본을 향하는가 적을 향하는가에 대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조선인의 민족정신에 대해서 상당히 경계를 했습니다. 지금 조선이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일본이 이기고 있으니까 조선이 조용히 있는 것이지 일본이 지기 시작한다면 조선인은 일본에 대해서 적의를 품고 덤벼 올 거라고 조선총독부의 사람들은 특히 최고위급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잔혹한 식민지통치였던 일제강점기, 세계제국주의의 군사적인 탄압과 경제적인 약탈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시키려고 했죠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미국 시카고 대학 - 1930년대 중반에서 2차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식민통치의 마지막 기간에 일본의 동화정책은 한국의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고 시도하는 상태까지 이르렀죠

미즈노 나오키 교수 일본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 조선인의 생각이라든가 사상, 생활양식을 일본인화 시키는 것이 내선일체의 실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당시 행하였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에 조선인을 동원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최근 반복되고 있는 일부 정치인의 망언과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때문에 일본제국주의가 다시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요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오해는 아직도 뿌리깊이 남아 있어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로 손꼽히기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종교가 담당했던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김재영 교사 - 전북 00 고등학교 - 그거는 일제가 천황을 신격화한 종교인 신도, 불교,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국내에서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유사종교와 아주 비슷한 사이비 종교라는 용어로 지금 보천교를 매도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서 학계에 있는 연구자들조차도 그 안에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역사 연구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연구자의 자체가 아닐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족종교와 보천교에 대한 재조명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당시 600만의 신도는 왜 보천교를 선택했을까?
조선총독부는 왜 민족종교를 철저히 말살시키려 했을까?
변화와 고난과 두려움이 지배하던 일제강점기에 식민지극복은 물론 앞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철수 박사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 당시 보천교 가 지향하고 있었던 것은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죠 이러한 사회는 상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상의 열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정치적인 의미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보천교가 갖고 있었던 진정한 가치를 축소 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모든게 낡은 채 사라지는게 아니죠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은 미래의 활로를 잃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민족지도자와 수많은 민중들이 걸어 왔던 길, 친일이냐 항일이냐는 단편적인 잣대만으로 판단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 망국의 한에 빠져 있는 국민에게 커다란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고, 민족의 통합에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했던 민족종교에 대한 재조명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이 프로그램은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제작한 것입니다. 공동기획 한국전파진흥원, STB 상생방송)
조선총독부 특명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라 끝


참고 :


보천교 조만식 체포에 대한 1925년 11월 25일 동아일보 기사

영상물 보기 > http://www.stb.co.kr/program/review/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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