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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 분쟁의 뿌리는 역설투성이다

2018.10.30 | 조회 52

이·팔 분쟁의 뿌리는 역설투성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대립하고 있다. 기독교권의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이 함께 지내왔던 아랍과 이상하게 엮여 원수가 된 드문 사례다.


시사인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제579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을 대표하는 갈등은 무엇일까? 대부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하 이·팔 분쟁)을 떠올릴 것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 이래 70년간 이·팔 분쟁은 국제정치의 핵심 주제였다.


이·팔 분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일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 이스라엘 건국이 맞물리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길게 잡으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해 재편한 유럽 열강의 개입을 기원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더 오랜 역사가 뒤에 있다. 바로 유럽-지중해권에 널리 퍼져 있었던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이로 인해 촉발된 시온주의(Zionism)이다.


유대인들의 역사관은 독특하다. 자신들은 결코 멸절되지 않는다는 역사 인식이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을 거듭할 때, 유대 민족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사라지지 않는 대신, 유일신 야훼의 뜻에 어긋날 때는 형벌을 받아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다고 믿었다. 이른바 ‘디아스포라’, 이산(離散)의 시기다. 흩어지되 소멸되지 않고 신이 부과한 형극의 기간이 지나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회복론도 함께 믿는다. ‘알리야(aliyah)’, 귀환의 시기다.





5월4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이스라엘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원형은 고대 이집트 비돔(Pithom)에서 파라오 통치하에 살아가던 히브리 공동체였다.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모세의 출애굽은 알리야의 원형이다. 유대 민족에게는 특정 공간, 야훼가 준비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남다른 애착의 서사가 있다. 약속의 땅, 즉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srail, Land of Israel)’에 대한 갈망이다. 


마지막 이산은 로마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 민족은 흩어졌다. 이후 나름대로 유대 공동체를 유지하긴 했지만 회복과 귀환을 생각하기에는 삶이 바빴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물경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오랜 기간 회당에 모여 ‘토라’를 읽으며 정체성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주로 중동부 유럽과 북아프리카 및 아라비아 반도 등에 터를 잡고 살았다.


오랜 디아스포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기독교계 유럽은 언어와 종교가 다른 유대인들을 불편하게 여겼다. 반유대주의의 출현을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경으로 잡는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라울 힐버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힐버그는 정치적 격변기마다 일종의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이 이용된다고 본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다룬 3단계는 ‘개종-축출-박멸’이었다. 개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쫓아내고, 계속 걸리적거리면 마녀사냥 등의 방법으로 어떤 형태로든 없앴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유대인이 개종하기도 했다. 유럽인의 정서에는 마태복음 27장 25절 이야기가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무죄를 이야기하는 로마 총독에게 유대 군중은 이렇게 외친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2017년 11월2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밸푸어 선언 100년을 맞아 영국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아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중세 이후 유대 가문들이 부를 축적하고 자본을 독점하면서 세간의 질시가 심해졌다. 봉건 영주와 결탁한 일부 유대 가문은 교회가 금기시하는 다양한 일들을 도맡았다.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수전노 샤일록이 대표하는 유대인 이미지가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정치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례가 빈발했다. 19세기 말부터 반유대 정서는 더욱 넓게 확산되었다. 1881년 제정 러시아 당시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조직적 학살(포그롬)은 비극의 일단이다. 1894년 프랑스의 한 포병 장교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렸던 드레퓌스 사건은 반향이 컸다.


드레퓌스 사건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 알리야, 즉 귀환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1896년 저작 <유대 국가>를 통해 나라를 세우자고 제안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대 국가 건설이 필요하다는 시온주의 사상과 목표가 담겼다. 헤르츨은 이듬해 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열었고, 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현실의 주제로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디아스포라 내 초정통파 종교인 집단의 다수가 시오니즘에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희구해온 종교인들이 가장 앞장서서 반길 듯한데 실상은 달랐다. 초정통파 랍비들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형극의 시간을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작위적으로 구원을 앞당기려는 시도를 일탈로 해석한 것이다. 이 시각으로 보면 헤르츨의 시오니즘과 유대 국가 수립 운동은 일종의 거짓 메시아 운동이었고, 자칫 이산의 시기를 더욱 길게 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결국 시오니즘의 동력은 유대교 정체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속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였다. 시오니즘의 초기 주창자들은 유대 정체성의 핵심인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 서사를 도구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종교 외피를 입은 세속주의자들의 기획이었다고나 할까? 시오니스트와 초정통파 종교인들 간의 이러한 인식 차는 오늘날까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정체성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자행했다.


주류 종교인들의 반대에도 시오니스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헤르츨은 먼저 오스만 제국과 독일에 유대 국가 건설을 타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협상 상대를 영국으로 바꾸어 영국 식민지 중 몇몇 곳을 후보지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영국은 사이프러스와 시나이 반도 등을 제안했으나 틀어지고, 이후 우간다 안과 아르헨티나 안도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1905년 7차 시오니스트 대회는 귀환(알리야) 서사를 완성시킬 곳은 팔레스타인임을 확인하고 이곳에서 건국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1차 대전 시기, 전쟁 비용이 급했던 영국은 유대인의 대자본이 절실했다. 시오니스트들은 이를 건국의 기회로 삼았다. 로드차일드 등 유대인 명망 가문이 대영 외교에 나섰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고향으로 인정하고 재건을 지원하겠다는 영국의 방침이 발표되었다.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의 선언이다. 선언 직후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유대 국가 건설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긴장했다. 비록 밸푸어 선언에 선주민의 시민권과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영국이 시오니스트 국가를 세워주려 한다는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온주의 등장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위임통치를 하던 영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유대인 이주가 늘어날수록 팔레스타인 측의 불만과 시위는 거세졌다. 두 민족의 공존을 성사시켜보려던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좌고우면하던 영국의 행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양측을 모두 자극했다. 시위는 격화되고 영국은 속수무책이었다. 2차 대전 이후 1947년 영국은 결국 위임통치 권한을 포기했다. 시오니스트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아랍의 반대로 거부되었다. 결국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5월15일 이스라엘 독립을 전격 선포하고 건국의 꿈을 실현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날은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이주자들에게 빼앗긴 대재앙의 날(al Nakbah)이 된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보호했던 아랍 사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반유대주의는 원래 기독교계 유럽에서 기승을 부렸다. 반면 아랍 이슬람권에서 반유대주의 정서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15세기 기독교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하며 무슬림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도 함께 축출했다. 쫓겨난 유대인이 주로 흘러들어간 곳이 북아프리카 아랍 사회였다. 이곳에서 아랍인과 유대인은 함께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가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을 압박해 유대인 축출을 요구했을 때에도 아랍 사회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보호하고 나섰다. 파시스트들의 유대교 탄압에 함께 저항하면서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과 수년 안에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반유대주의를 피해 자유를 찾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자 유대인과 아랍인이 원수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고토 회복을 주장했지만, 아랍 팔레스타인에게는 이스라엘이 무도한 침략자였다. 유대인의 귀환은 기독교권의 멸시와 박해로 인해 시작된 것인데 정작 갈등은 이슬람권과 빚고 있다.


통곡의 벽에 서서 몸을 흔들며 황금의 돔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이 있는 성전 산(하람 알샤리프)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유대 종교인들을 보면, 영락없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다. 그러나 이 갈등 뒤에 있는 더 오랜 분쟁의 씨앗은 바로 천년 넘게 지속된 기독교권의 반유대주의였다. 홀로코스트는 루터의 후예들이 저지른 일이며, 포그롬은 정통을 자처하는 정교의 후예들이 저지른 짓이다. 심지어 밸푸어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밸푸어 선언 당시 영국 정부의 저의는 유대인 보호가 아니었다는 사료들이 나오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아비 슐라임 교수는 밸푸어가 작곡가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와 나눈 대화에서 “유대 국가를 빨리 세워줘야 유럽 내 유대인들이 다 한곳으로 모여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팔 분쟁은 당사자 간 역사적 구원(舊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권의 멸시와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그간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던 아랍과 이상하게 엮여 원수가 되어버린 드문 사례다. 현재에만 시선을 두면 역사의 궤적을 놓치기 쉽다. 면밀히 과거를 읽어내지 못하면 현 상황에 포박된다. 마치 지금의 갈등관계가 과거로부터 유구한 것이며, 또 미래에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오류가 발생한다. 이 오류는 상황을 고착화하고, 결국 어떤 형태로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의지를 반감시킨다. 이·팔 문제의 또 다른 ‘문제’는 현재 상황이 역사적 맥락과 배경을 압도한다는 데 있다. 어쩌면 꽉 막힌 이·팔 분쟁의 해법은 상상력을 발휘해 역사적 맥락을 재현하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선물처럼 주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이·팔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먼 역사적 기원부터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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