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뜨거운 애국심으로 국사의 혼이되다

2010.07.16 | 조회 3336

 
 김영현
 
 
  양종현|상생출판| 2009년 1 1월| 616쪽| 30,000원
 
 우리는『환단고기』를통하여
 잃어버렸던우리의상고역사를되찾았다.
 인류시원문명의뿌리인환국에까지올라가,
 실증만이 답이라는전제속에
 매몰될뻔한상고사가지켜졌고
 자칫중국의국가적인프로젝트속에아무런힘도
 써보지못하고뺏길뻔한우리역사를지켜내려는
 국사國史찾기운동의물꼬가터졌다.
 바른국사, 진정한우리국사를되찾아주고
 그것을지키기위해자신의삶을다바친이유립선생님은
 진정한애국지사다.
 그의삶을가까이에서한번들여다보자.

 
 



 “그 당시, 그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아야 역사다”
 한 때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을 만큼 엄청난 이슈를 몰고 온 한권의 책이 있다. 바로『환단고기』이다. 아직도 위서 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이 책은 이 책을 세상에 전한 한 지사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진실을 알려주었음에도 세상의 박해와 의심과 비하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뜻있는 현대의 지사들과 주체적이며 의로운 이들에 의해 그 가치와 학문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은 한암당寒闇堂이유립선생은 자신이 드러낸 환단고기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의 당호堂號한암당이 차갑고 어두웠던 시대상을 드러낸 뜻이라는 걸 안다면 더욱 공감이 가리라. 오롯이 뜻을 지키며 초연한 의인으로서 국사國史의 혼이 되어 세상을 향해 그가 던진 메시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실증이 아니라 혼이다.”
 
 “국사는 다른 사람의 시각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그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아야 사실에 가까워지는 것이 역사다.”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쳐 후학들에게 민족주체사관의 혼을 전해준 한암당 이유립. 그의 제자에 의해 그의 삶 한권의 책으로 나왔다. 힘들고 지난했던 지난 세월의 아픔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그의 의지를『백년의 여정』이라는 책에 담았다.
 
 
 형극의 해로
 철성 이씨(고성 이씨) 35세손인 고 이유립 선생은 이른바 애국 명문거족의 후손이시다. 시조 이황李璜을 거쳐 9세손이 바로「단군세기」의 저자 행촌이암 선생이고 13세가「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선생이시며 27세가 운초 계연수의 스승, 이기李沂선생이시다. 30세손 이상룡 선생은 상해 임시정무 국무령을 지냈다. 이처럼 그의 족보에는 일찍이 나라에 나아가 충성을 바치며 나라를 지키고 참된 국사를 수호한 애국지사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또한 일제 시대 때는 일제와 치열하게 맞서며 구국투쟁에 헌신한 선현들이 많다. 왜곡된 시야가 만연한 작금의 세상에 환단고기를 내놓고 그것을 지켜온 삶은 그처럼 뜨거운 애국의 혼이 흐르는 조상의 후손으로서 태어난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삭주부사였던 15세 수산공 이후 그의 조상들은 삭주에 뿌리를 내려 봉사와 희생의 참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일제 때 삭주는 독립군 투사들의 가장 치열한 근거지가 된다.
 
 호는 정산精山, 당호는 한암당인 이유립 선생은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 같던 1907년 11월 14일 독립운동가의 4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한민족의 참된 역사와 얼을 찾아 떳떳한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던 운초雲樵.계연수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부친의 영향으로 유아시절부터 민족주의 사관에 눈을 뜨게 된 선생은 이미 그때부터 항일 독립투쟁과 민족사학 확립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품성이 청간지절淸澗志節하나 의기강고義氣强固해서 그런 성정을 염려한 부친은 국권을 빼앗긴 조국에서 살아갈 영민한 아들에게 정산靜山이란 호를 주고 마음 심자를 화두로 휘필부벽揮筆付壁하였을 정도였다. 운초는 국내성과 백두산 등 역사의 무대를 밟으며 견문을 넓혀가면서 자연스럽게 애국愛國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부친을 따라 독립투쟁에 참여한 선생은 남만주에서 단학회가 주관한 배달의숙에서 운초 계연수 선생과 벽산 이덕수 두 선생께 강의를 들으며 환단고기와 홍익사서를 전공하게 된다. 부친 단해를 따라 들어간 배달의숙에서 선생은 낮에는 역사 강론과 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천마산대가 조직되자 통신원으로 활약하여 독립 단체간 연락을 맡는 등 3년 간학문과 훈련과 투쟁을 병행하였다.
 
 
 운초와 단재의 학풍을 쫓다
 배달의숙은 만주의 독립운동가와 삭주의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기숙하고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으로 송암이 단해와 운초, 벽산 등과 뜻을 모아 기미년에 설치한 것이다. 정산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단해와 운초선생의 인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단해가 운초보다 2년 늦게 태어났으나 단해는 무명의 운초를 스승으로 대하였다. 운초는 곳곳의 비장서책 등 각종 사료를 모으고 있었고 그 즈음 실시구시 학문을 쫓던 단해는 운초를 만나 바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우리 겨레의 본원을 찾고 있던 운초가 그 본원의 사료를 간직한 문중의 단해와 해후한 것은 운명의 섭리를 느끼게 한다. 운초는 대고구려의 땅이며 명상 을파소를 낳은 평안북도 선천 사람으로 단해의 일가 이형식에게「가섭원 부여기」와「북부여기」를 얻고, 태천진사 백관묵에게「삼성기」와「단군세기」를 얻었다. 정산의 아버지 단해는 백관묵 일가의 여식을 맞아 아들 정산을 얻었다. 운초는 광무1년, 해학 이기를 찾아 그의 문하가 되고 광무2년「태백진훈」과「단군세기」를, 광무3년「참전계경」과「태백일사」,「 천부경 요해」를, 광무15년 백암 홍범도장군과 송암 오동진등 동지들의 지원으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게 된다. 정산에게 학문을 전수한 스승은 부친 단해와 진중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벽산과 송암이었다. 그리고 유년시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고유학문을 권하던 운초와 배달의숙에서 만난 단재의 학풍을 쫓아 그들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이유립 선생이 회고하는 운초의 모습은 숱이 성긴 수염과 살집 없는 검은 얼굴 속에 형형히 빛나는 안광이 인상적이었다 한다. 낮지만 보통 톤의 단전에서 울리는 음성이 친근하고 자상했다고 한다.
 
 
 스승의 시신이 버려졌던 압록강에 투신 시도
 배달의숙에서 활약하던 당시 독립운동이 발각되어 이유립 선생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후 그 자신이 그렇게 배웠듯 고향에서 야학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애국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왜경은 갖은 악랄한 수단으로 국사광복 민족주의 정립을 향한 선생의 활동을 방해하였고 이로 인해 무수한 탄압과 옥고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 이미 운초 선생과 남만주의 단학회 본부는 왜경의 총칼아래 짓밟히고, 운초 선생의 시신은 여러 토막으로 무참하게 잘려져 무심하게 흐르는 압록강에 내던져지는 비극이 일어난 뒤였다. 3,000여권의 서적, 문서가 빼앗기고 불살라졌다. 이 때, 운초 계연수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혼을 계승코자 이유립 선생은 시대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힘있고 빛나는 민족주의 역사철학 사상을 확립해 민족의 이념을 체계화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된다. 이런 민족을 향한 변함없는 노력은 8.15 국권 회복 후 소련과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정산은 오랜 동지이자 선배인 묵거 전봉천의 대동아전쟁거부론 살포사건으로 조선 총독부 헌병대에게 심문을 당하던 중 광복을 맞는다. 그 안도감도 잠시, 신탁통치반대 필화사건으로 조국의 품에서 모멸의 옥고를 겪고 사방이 벽에 막히자 유랑의 길을 떠났다. 해방된 조국에서 또다시 구금을 당하고 더 이상 학문과 소신을 펼 수 없자 좌절하고 만주를 유랑하다 돌아오는 길에 스승의 시신이 버려졌던 압록강에 자신도 투신을 시도했다. 천운일까 다래덩굴에 걸려 목숨을 부지하고 야간 고기잡이배에 발견되어 독립군을 숨겨주던 백씨의 지하에서 1년 동안 숨어 지내게 된다. 모택동 정권과 김일성 정권의 수립을 지켜보며 정산은 60년대 말 반탁이 역사적 실수였으나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였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역사 찾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절절하게 피력하였다. 결국 공산주의의 탄압을 피해 남하한 선생은 이 곳 남한에서 민족주의 사학을 위한 투쟁의 횃불을 들게 되었다.
 
 
 다시 찾을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정부의 보조도 주위의 도움도 없었던 그 때, 대전의 한 셋집에서, 그 이전 몸담았던 단학회를 단단학회로 개칭하고 새로이 커발한 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절 선생이 얼마나 가난하고 혹독한 시련의 연속에서도 불굴의 민족혼과 의지로 버텨내었는지는 주위 지인들만이 안다. 식량이 떨어져 온 식구가 굶주리게 되자 불도 안 땐 2층방에서 일주일을 꼬박 굶으며 사학연구에 몰두했다 한다. 정식 학위 하나 없는 독립운동가를 누구하나 알아주는 이 없으니 끊임없이 궁핍과 어려움이 찾아왔을 터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오직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일념으로 굶주림을 무릎 쓰고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속의 냉방에서도 꼿꼿이 사학연구에 몰두하였던 한암당 이유립 선생. 그 태산 같은 의지와 충혼으로 그와 뜻을 함께하는 박창암 장군, 문정창 선생, 안호상 박사 등 이북출신 동료들을 만나게 되고 민족의 영광을 위해 맹렬한 활동을 펼친 국사찾기 협의회가 조직되었다.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리산에 커발한 개천각을 짓고 단군 이래 중요한 민족의 성지를 성역화하는데 앞장서며 이후 음력 10월 3일에는 개천행사를 꼬박꼬박 열었다. 선생은 발길이 닿는 의미 있는 곳은 가급적 우리말 원이름을 찾아 불렀고 없으면 역사성, 지형 등을 고려하여 진취적이고 좋은 뜻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천마天摩로 굳어진 고향 명산을 천마天磨로 부르고, 마니산摩尼山으로 불리던 마리산摩利山을 검증하여 현재 강화군에서도 이를 병기하게 했다. 1980년대에는 이런 선생의 활동이 드디어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되어 국사에 대한 민족혼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일고 있는 국학운동의 연원은 선생의 민족혼과 강철도 녹일 뜨거운 의지로 인하여 발화되었음을 후세의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는 삼세판을 두기는 커녕 두판도 없다. 가설이 없다는 것이 역사의 명제이자 교훈이다”
 
 “왜 역사학이 필요한 것인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 살고 역사를 창조하는 지상 유일의 영장류이기 때문이다.”
 
 가설이 없다고는 하지만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고 되살려 부단히 지혜의 문을 열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는 축복이다. 일순간도 일탈하지 않았던 일관된 언행, 세속이 추구하는 어떤 생명의 환희조차도 학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였던 초인의 모습. 한암당 이유립 선생은 고유 조선의 자취와 얼을 찾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 학문을 구하기 위해 제세이화 홍익인간의 심법, 즉 먼저 뜻을 세우고 그 뜻 세우기를 구하려면 성의誠意공부를 닦아야 한다는 태백진경 속의 커발한 학잠을 신실한 교도가 되어 일순도 잊거나 놓지 않았다 한다. 그를 낳은 삭주와 천년을 이은 긍지높은 선령과 선현들, 그리고 그의 뜻과 함께하는 많은 동지들이 그에게 뜻을 이루려는 초극의 의지를 주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사를 기리며
 고요한 가운데 휘몰아오는 장대한 파도처럼, 어둠을 살라 대지를 환히 밝히는 태양의 작열처럼, 이유립 선생이 평생소원으로 빚어놓은 역사적 위업과 그 속에 담긴 문제제기는 정녕 태풍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고독과 싸워야 했다. 그의 신념은 세상의 질시와 가난을 적으로 하여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영양실조로 시달리며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세파에 온몸으로 맞서 나가며 칠순이 넘는 나이에 이태동안을 홀로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매운 겨울날을 버티었다. 손은 곱아져 펴지질 않고 잉크는 얼어붙었으며 휘몰아치는 바람이 세상의 질시를 담아 방안을 기웃거리던 그 순간에도 선생은 자신의 운명, 곧 민족혼의 재생을 위해 스스로를 바쳐야 한다는 신조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욕망을 초극해 내고 있었다. 시간과 경제를 아낀다는 이유로 아침에 라면 서너개를 한꺼번에 끓여 먹고 남은 것을 점심 저녁때 다시 끓여 먹고 유일한 반찬은 간장 한 종지. 그러나 손님이 오면 쌀이든 라면이든 손수 음식을 지으시고 찾아온 제자를 보낼 땐 늘 아쉬워하여 큰 길까지 배웅하며, 자신의 뒤를 이어 험난한 여정을 계속할 제자들에게 미안해 제자들의 부모님께 송구해했다는 선생은 후학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었던 분이다. 늘 아는 것이 없노라고, 있는 것은 뜻뿐이며 그 뜻 하나로 이제까지 버텨오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 나아가 사회에 대한 어떤 책임을 지고자 결심할 때 그 결심에 따라붙는 엄청난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결심은 하잘 것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한 시대를 긋는 선생의 위업은 내면적인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달성한 것이다.
 
 
 국사광복을 이룬다면 그때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광복이 될 것
 그의 제자들은 이유립 선생을 보며 모든 싸움은 내면과의 투쟁이며 그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역사적 심판을 담당할 수 있고 그 사람이 곧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갖춘 점이라는 것을 자각했다고 고백한다. 한암당이란 당호처럼 세상의 차고 어두운 측면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정산 선생. 그러나 가장 차고 어두운 것은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할 때라고 하였다. 누구보다도 차고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밝고 따스한 그의 마음은 차고 어두운 현실에 직면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외길 인생을 개척하도록 만들었다. 타협도 후회도 없이. 젊은 날 뜻을 쫓아 온갖 인연을 모두 희생하고 인간인지라 그 고통을 끝까지 떨치지 못한 채, 그런 희생이 도리어 조롱으로까지 전락한 세대에서 선생은 뜻을 오롯이 하고 멈추지 않는 것만이 그 분심과 애석함을 참아내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유립 선생은 한암당이란 호를 통해 다가오는 도전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더욱 맹렬히 대응할 수 있었다. 이미 춥고 어두운 데가 그의 집이거늘 그 어떤 고통이 그를 억압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제자인 전형배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그 작은 몸집에 저토록 거대한 역사의 짐을 챙겨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큰 이상을 꿈꾸어 인간의 하잘것없는 욕망을 잊었으면서도 끝없이 인간의 소탈한 삶을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선생은 군중 속에서도 심지어 동지들 속에서도 홀로 있었다. 늘 방문입구에 선생이 붙여두었던 참전계경 속의 한구절처럼.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무리를 벗어나고 무리를 벗어나 있으면서도 무리를 두터이 한다”
 
 
 뿌리를 알 때 비로소 애국, 애족심이 발현되는 것이니 비록 뜻있는 이가 몇 명뿐이라도 수탈과 왜곡의 악조건 속에서 부단히 연구하고 복원하여 국사광복을 이룬다면 그때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광복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던 선생.
 
 
 위서 논쟁 따위는 먼 산밑의 소나기 소리정도로 치부
 이유립 선생하면 환단고기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혹자는 선생이 작고 전 위서 논쟁에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하기도 하지만 제자들이 말하는 그는 못다 정리한 연구과제와 후학양성에 조바심을 냈을 뿐 위서 논쟁 따위는 먼 산밑의 소나기 소리정도로 치부하였다 한다. 형극을 이겨온 자만심이 아니라 사대유림과 왜인 못지않은 토왜 사학자들을 잘 알고 겪었기 때문에 초연하고 결연할 수 있었으리라. 환단고기는 그의 텍스트이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지나와 우리의 역대 사서, 그리고 한사군, 위만조선, 기자조선, 한씨조선 등의 실체에 대한 문헌 비판, 우리의 정신 세계사의 발굴과 해제, 배달국의 시원과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역년 정리, 동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고찰, 다물주의 고구려 영락 대통일과 요, 금, 원, 청, 고려사에 대한 재해석이야말로 장구한 세월동안 묻혔던 국사의 체계적인 복원에 공헌함은 물론 참된 미래조국의 상에 대한 지표가 되고 있다. 
 
 志士不忘在溝壑
 ‘지사는 도랑과 골짜기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이유립 선생의 일관된 삶이었다.
 
 민족주의란 역사가 있는 민족의 자신감이요, 애국애족이 본래 민족지심이라고 설파했던 이유립 선생은 그의 혼을 불어넣은 강의를 마치자마자 쓰러져 3일 뒤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사표가 운초와 단재 선생이라면 지사의 백년의 험난했던 여정은 남은자들에게 영원한 사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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