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발로 쓴 반 동북공정

2010.05.17 | 조회 4602


 홍산문화와 하가점 문화를 통해 찬란하게 되살아난 우리의 뿌리를 지키는 길
 
 
 
 이정훈|지식산업사|2009.2.|560p|25,000원
 
 김영현 / 포항 대신도장
 
 이 책은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직접 들어간 현직 기자가 선조의 얼이 담긴 유적지를 발로 밟으며 논리적으로 동북공정을 반박하고, 살아있는 우리의 시원 역사를 되찾아 나가는 책이다. 원대했던 우리의 역사가 일본과 중국에 의해 왜곡당하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눈앞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도둑질되고 있는 현장을 포착한 것이다.
 
 동북공정은 변중이라는 사람이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을 <광명일보>에 전개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이 시론은 단군조선마저도 잘라내고 기자조선부터 거론하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역사조작 프로젝트와 그 여파를 폭로하기 위해 필자가 꽤 두툼한 분량의 역사책을 써냈다. 역사가 현실논리임을 중국 구석구석의 현장을 누비며 생생한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고구려, 고조선, 동북아시아 제 문명에 이르기까지 방대하지만, 현재 학계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홍산문화에 맞추어 개략하였다.

 
 
 현재의 역사학계 논리로는 대처할 수 없다
 “최초의 조선은 상나라 사람 기자가 세운 기자 조선인데 이 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었다. 따라서 기자조선은 중국 역사의 일부이다. 또한 기자조선을 무너뜨린 위만조선 역시 중국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 세운 것이니 위만 조선도 중국의 일부이다. 이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네 개군을 세웠고, 그 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현에서 일어난 왕조가 고구려이니 고구려는 중국사를 구성하는 변방나라 가운데 하나이다….”<광명일보>에 실린 <고구려역사 연구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를 지나간 일들의 기록이나 학술로만 보거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 쭈그러든 현재의 역사학계의 논리로는 중국의 거대 프로젝트에 올바로 대처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먼저 중국이 펼치는 역사 공작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또한 홍산문화와 하가점 문화를 통해 찬란하게 되살아난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필자를 따라 생생한 현장 속에서 중국과 우리의 역사를 아우르는 거대한 탐험을 시작해보자.
 
 
 1. 동북공정의 실체 - 중국의 역사왜곡 현장
 동북공정은 공산당의 기관지‘광명일보’에 실림으로서 처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 광명일보를 제보받은 필자가 신동아에 기사를 올리고 일요스페셜에서 동북공정을 밝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서 한국민이 동북공정의 실체에 처음 눈뜨게 된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펼치고 있는 서남공정, 서북공정과 더불어 탐원공정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탐원공정은 말 그대로 중국 문명의 근본을 찾아가는 역사탐험이다. 탐원공정의 목표는 세계문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은 한족과 더불어 55개의 소수민족이 어울려 사는 나라이다. 이 56개의 민족이 잘 어울려 살면서 나라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구심점이 필요하다. 그 구심점을 찾는 것이 중국 역사연구의 근본 목적이다. 이러한 위대한 중화주의를 만들기 위해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뿌리를 흡수하는 작업이 동북공정이고 티베트, 위그르 역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서남, 서북공정이다.
 
 중국은 후기 신석기 시대에 이미 국가 체제가 있었다는 판단 하에 중국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과 유물을 만든 세력을 사마천이 중국의 뿌리로 설정한 오제 시절로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 탐원공정이 완성되어 오제가 신석기 시대부터 실존했던 인물이 되면 중국역사의 시작은 서기전 5000여년 전 무렵까지 올라갈 수 있다.
 
 중국은 자국의 역사전개를 토대로 필요한 결론을 미리 성립시켜 놓고,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을 거기에 짜맞추어 넣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압록강 상류 쪽으로 20여분 올라가면 단동시 호산장성이라는 곳이 있다. 명나라 때인 1469년 중국인들이 이곳에 탑호산성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유적발굴을 했던 중국은 이곳에서 명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산성유적을 발견했다. 이 산성이 진,한시대의 성이라는 판정을 내린 중국은 복원된 산성의 이름을 호산장성이라 붙였다. 왜 산성이 아니라 장성일까. 여기에 그들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 만리장성과 이 산성이 연결된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즉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호산장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산해관에서 서해를 만난 만리장성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 1000여km를 달려 호산진에서 호산장성으로 솟아올랐다는 주장이다.
 
 이 호산장성으로 말미암아 만리장성이 압록강가에 이르게 된다면 중국의 역사와 정치무대는 압록강까지 확대된다. 따라 만리장성 바깥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이민족인 한국인의 정치와 역사무대가 현저히 오그라드는 것이다. 고구려와 고조선이 존재하던 시절 중국 세력이 압록강가에 성을 세웠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고구려가 압록강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중국 사서에는“648년 3만 여명의 당나라 수군이 압록수를 100여리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이라는 고구려 성에 당도했다. 박작성은 산에 의지해 요새가 구축되어 있고 압록수가 가로막고 있어 견고했다”란 기록이 있다. 즉 중국이 진한 시대 산성 터라고 발견한 호산촌의 산성은 박작성의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지름 4.4m 에 깊이가 11.25m 를 넘는 큰 우물터가 발굴됐는데 고구려인은 산성을 쌓으면 반드시 산성 안에 우물을 만들었다. 또한 우물의 안벽에는 고구려 산성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견치석이 쌓여 있었고, 우물안에서는 서력 기원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3.7 m길이의 통나무배가 출토되었다. 중국은 이 배를‘진한 시대 옛 우물터에서 발견된 신비스러운 배’라는 뜻의‘고정신주’라고 불렀다. 중국은 이를 확실시하려는 듯 우주발사체에 탑재해 쏘아 올리는 우주선 이름을‘신주’로 명명해 오고 있다.
 
 
 2. 고구려를 찾아서
 고당시절 당나라에 함락된 성에는 박작성과 더불어 백암성이 있다. 백암성은 성주가 싸움을 포기하고 바로 항복하여 전투를 피했다. 그래서인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를 잘 간직한 성으로 꼽힌다. 고구려인은 성을 쌓을 때 견치석으로 치를 만들었는데 치는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성 밖으로 튀어나온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치는 한국과 일본의 산성에서만 발견되고 중국의 산성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은 박작성에 이어 고구려의 백암성마저‘연주성산성’으로 명명해 놓았다. 연나라 때 쌓은 성이란 뜻이다.
 
 중국의 역사 맞추기는 이 뿐만이 아니다. 중국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묘라고 하는 무덤에는 연꽃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된다. 연꽃은 불교와 관련이 깊은데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불교가 받아들여졌으니 근 400여년전 주몽의 묘에 연꽃 벽화가 그려질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가 고구려 후기에 와서 발견되는 특징인 봉토돌방무덤 형식이므로 1대왕인 주몽의 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중국이 유네스코에 등록하면서 주몽의 묘로 둔갑해 놓았다. 이유는 결론을 내려놓고 역사를 짜 맞추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고구려 최초의 수도로 보는 환인에 주몽의 무덤이 있어야 하니 그곳에서 가장 큰 무덤을 주몽 묘로 정해버린 것이다.
 
 한편 국내성이 있던 집안시의 광개토태왕릉 근처에는 태왕릉과 광개토비보다도 정성을 들여 만든 장군총이 있어 눈길을 끈다. 도읍을 옮길 때 나라의 근간인 시조의 묘를 옮긴 사례는 많이 발견되므로 고구려 역시 주몽의 묘를 국내성으로 옮겨 왔을 확률이 높다. 태왕릉보다 더 정교하고 크며 천제를 모시던 장소로 보이는 장군총이 주몽의 묘로 추측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장수왕은 현재 북한에 있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64년을 그곳에서 통치했다. 그렇다면 장수왕은 평양에서 붕어했을 것이고 그의 무덤은 평양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중국은 주몽과 태왕릉, 장수왕릉까지 중국 영토내에 둠으로써 고구려의 영향권이 한반도에 이어지지 못하게 하고 중국에 한정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현실논리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3. 고조선을 찾아서
 동북공정의 주요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 스스로가 단군이 설화속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단군조선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논리다. 기자조선은 한국도 인정하고 있고, 기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작은 아버지이며 이 주왕을 폐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에 봉했으니 기자 조선은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중국역사라는 것이 그들의 두 번째 논리다. 기자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위만이 하나라 제후국 연나라 사람이니 위만조선도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 세 번째 이유며 한 무제가 위만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4개군을 설치하여 영토로 삼았으니 그 땅역시 중국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 현에서 세력이 일어나 세운 것이 고구려이니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변방왕족이라는 것이 동북공정의 골자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에 맞서려면 우리는 고구려와 북부여를 낳은 고조선의 뿌리부터 찾아야 한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지역공동체적 특성이 확실하게 발견되는 시기는 대체로 청동기 시기와 겹친다. 청동기 문명과 신석기 문명은 별개가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차이점은 청동기 문명을 먼저 개발한 종족이 그렇지 않은 종족을 지배했다는 정도이다. 중국 문화와 중국인은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황하중류에서 생겨났다. 이곳에는 농업을 하는 신석기 후기 문명이 있었는데 이 세력을 이끈 인물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삼황오제이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은 서기전 2333년으로 단군은 오제 가운데 네 번째인 요와 동시대 인물이 된다. 요-순-우로 이어진 중국왕조는 우에서 세습왕조인 하나라가 건국됨으로써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은 하나라보다 약 300년 정도 앞서 세워졌으며 황하의 청동기 문명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명을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 내몽고자치구에서 발굴된 ‘하가점 하층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요령성을 가로 지르는 요하가 서쪽으로 뻗어 올라간 내몽고 자치구 근처 지류에 홍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의 홍산 삼림공원 안에서 서기전 4000년쯤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후기 유적이 대량 발굴되었다. 그리고 홍산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하가점에서는 서기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대량 출토되었다. 학자들은 홍산 지역의 신석기 문명을‘홍산문화’, 하가점에서 꽃핀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을‘하가점 하층문화’, 하가점 하층 문화보더 덜 깊은 곳에서 서기 1300년 쯤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물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달되어 나온‘하가점 상층문화’로 본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끈 세력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하나라보다 먼저 청동기 시대를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역사서에 홍산 지역을 언급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은 발해만 지역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전래된 것으로, 중국식 청동검과 확연히 다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홍산에서 대가 끊어지고 어느 시기 갑자기 만주와 한반도에 이들과 맥을 같이 하는 청동기 문화로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문화가 한반도로 전래되어 왔다. 그렇다면 하가점 하층문화를 만든 세력은 만주 즉 요동지역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고인돌 문화를 만든 세력과 합세해 지내다가 한반도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토대로 하면 단군조선의 흔적은 하가점에 있는 내몽고 적봉시 일대가 된다.
 
 
 4. 홍산 문명과 웅녀의 자취
 고조선이 내몽고의 깊은 요서지역에 있었다면 이지역에 황하문명과 구별되면서도 확실한 고대국가 단계인 청동기 문명과 이를 잉태한 신석기 문명이 있어야 한다. 언어가 다르면 문화도 다르다. 중국에서 지명의 한자풀이가 불가능한 곳은 최근에 중국에 편입된 지역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의 역사무대가 아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중국 요령성 서쪽 끝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에 근처에는‘노노아호산’이라는 산맥이 있다. 언어의 유사성을 보면 한국과 투르크(터키족), 몽골, 만주(여진족),일본은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노노아호’는 몽골어를 음차한 것이다. 노노아호산 남쪽 자락에‘우하량’이라는 곳이 있다.
 
 도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대부분의 요서지역과 달리 우하량은 바람이 거의 없어 안온한 땅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곳에 최근 발굴된 신석기 문명‘우하량 홍산문화유지’가 있다. 그 곳의 안내판에는“홍산문화는 서기전 3500년을 전후한 시기 서요하 유역과 대릉하 유역 그리고 연산과 발해만 사이에 살았던 종족들이 꽃피운 신석기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후기 유적이 이곳에서 발굴된 우하량 유적이다. 이 지역에서는 여신전, 제단, 돌무덤등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은 홍산문화를 구성한 모든 지역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꼭짓점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자 홍산문화를 구성한 종족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 곳으로 기능했다,.. 이는 홍산문화가 이미 고대국가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적혀 있다. 여신전에서는 눈동자에 둥근 옥을 박아 넣은 여자 두상과 이 두상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 나신상이 발굴됐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임에도 복원된 여신상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우하량과 더불어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오한기에 가까운 동산취에서도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임부상이다. 그리고 반가부좌의 상도 발견되어 우하량의 여신상과 더불어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신석기인들이 이미 종교생활을 했다고 판단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여신상과 임부상의 발견으로 후기 신석기는 모계사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옥기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은 옥기의 형태가 자국의 상징인 용이라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돼지라고 수정했다. 우하량 여신전에서는 곰의 뼈와 곰의 발 모양을 한 토기도 발견되었으나 중국은 공개를 꺼리는 모습이다. 서기전 3500년 전 모계사회였을때, 곰을 숭상한 곰족은 한국의 고조선 건국 기록에 실린 웅녀족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도 사실은 돼지가 아니라 곰을 형상화한 것일 확률이 높다. 노노아호산을 중심으로 한 요서 지역은 호랑이가 아닌 초식을 할 수 있는 곰이 가장 강력한 동물이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청동기 문화는 노노아호산의 북쪽 하가점 마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청동기 제조술을 가진 종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우하량 일대에서 곰족을 만난 것이다. 신석기인들은 제사를 올릴 때 재산 목록 1호이며 가장 빨리 가축 동물이 된 돼지를 잡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귀한 여신전에서의 제사에는 곰을 바쳤다.
 
 그동안 한국 사학계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고조선의 위치를 비정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웅녀족의 자취를 따라 필자가 우하량 일대를 돌며 본 노노아호산 주변은 거대한 평야였다. 평양은 곧 평평한 땅이니 요서지역의 광대한 평야가 바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평양일 수 있는 셈이다. 또한 요서지역의 대릉하에는 사시사철 물이 많아 조양시 중심지로 흘러드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단군 조선의 도읍지로 대릉하 유역을 보고 있다. 대릉하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서기 전 8세기 무렵부터 꽃피었으므로 시기상 후기 고조선으로 보이며 전기 고조선은 하가점 하층문화가 나온 적봉시와 오한기 지역이다.
 

 대릉하와 소릉하 사이에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종족의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이들 모두가 홍산문화의 계승자들이다. 대릉하나 소릉하에서 가까운 요동반도는 어렵지 않게 홍산문화의 영역이 되었다. 요동과 산동반도는 마주보고 있으니 산동반도에도 요서와 같은 문화가 형성된다.
 
 청동기 문명을 일으킨 고조선은 왜 요서에서 요동으로 다시 한반도로 내려오게 되었을까. 황하문명을 일으킨 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린 것과 기후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의 요서, 요동지역은 상당히 건조하다. 홍산은 1만년 전부터 후기 신석기 문화가 꽃피고 자생적으로 청동기 문화가 일어난 곳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춥고 건조해지면서 상당수의 사람이 따뜻한 발해만 쪽으로 이동했고 소수는 남아 유목민이 되었다(하가점 상층문화). 발해만 쪽으로 이동한 사람은 비파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청동기 문명을 일구었으나 황하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과의 싸움에서 패해 동쪽으로 밀리게 된다. 이러한 동진으로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청동기 문화가 확산되었다.
 
 홍산문화를 일으킨 적봉이 한민족 문화의 원류이자 일본에서 중앙아시아 터키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의 뿌리가 된다. 종족에게 언어는 종교나 혈통보다 우세하다. 우리와 비슷한 어원을 가지고 있는 알타이 어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문화가 바로 홍산문화이다.
 
 홍산문화는 후기 신석기 문화 가운데 가장 후기의 것이라 그 전의 신석기 문화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적석총의 등장이다. 쉽게 말하면 돌을 피라미드로 만든 것인데 이 제단의 가장 발달한 형태가 중국 길림성 집안 옛 국내성이 있던 곳의 장군총이다.
 
 홍산문화의 적통을 이어받은 민족이 한국과 몽골이다. 한국은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었고 몽골은 하가점 상층문화를 이었다. 일본과 터키는 방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한국의 방계이고 터키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방계이다. 하가점 상층문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몽골과 흉노등의 유목민족에 의해 이어졌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안타깝게도 중국은 여진족(청나라)을 굴복시킴으로써 홍산문화를 자기네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잡았다. 적봉을 지배한 마지막 홍산문화의 후예가 여진족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에서 예로든 동북아시아 제민족과의 관계사 차원에서 동북공정을 연구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홍산문화를 연구해 이를 고조선과 접목시키고 홍산문화에서 파생된 여러 민족을 한국사 내에 위치시키는 것이 확실한 대응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몽골, 여진, 거란 등의 제민족의 역사를 우리역사 속으로 끌어다 놓는 것이 필요하며 역사의 진실이 그렇다고 주장한다.
 
 
 ‘아차’하는 사이에 고구려와 고조선을 빼앗긴 한국은 고조선 이전의 배달국 흔적마저 빼앗기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차를 반복하며 살아서는 안된다. 환단고기를 비롯한 우리 뿌리에 대한 가르침이 더욱 소중하고 절실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우실하 | 소나무 | 2007년 4월 | 408쪽 | 15,000원
 1980년대 이후 요하 일대에서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앞서는 대규모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여기서 중화문명이 시작되었다는‘요하문명론’을 지어낸다. 이 요하문명은 사실 우리 한민족의 시원과 관련이 깊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리고 한·중·일 삼국의 양심에 비춘 공동발굴을 통한‘동방 르네상스’를 이룩하자고 제안한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이형구, 이기환 | 성안당 | 2009년 5월| 416쪽 | 17,500원
 황하문명보다 앞서는 고대유물과 유적이 발해만 연안에서 발굴되었는데, 그곳은 일찍이 한민족의 뿌리 동이(東夷)의 영역이었다. 책은 역사학자와 신문기자가 시베리아를 비롯해 발해연안과 내몽골, 만주를 직접 답사하고서 기행문 형식으로 서술했다. 발해연안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동이의 흔적을 찾아내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하려 했다.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이형구 | 김영사 | 2004년 7월 | 424쪽| 19,900원
 한민족 고대문화는 시베리아가 아닌 발해연안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와 적석총은 시베리아보다 1000년 이상 빠르다는 주장을 펼친다. 책은 만주에 산재한 1만여 기의 고구려 무덤과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등의 유적 유물을 조사 연구하여, 동북아시아 중심 문화였던 한민족 문화의 원류를 추적한다.
 
 
 고조선, 신화에서 역사로
 이형석 | 우리책 | 2009년 1월 | 254쪽| 15,000원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역사여정을 담았다. 지리학자와 과학자가 우리 민족의 뿌리가 어디인가라는 점에서 출발, 고조선의 도읍지로 거론되는 중국의 홍산문화 유적지를 수십 차례 답사한 결과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방대한 중국의 자료와 중국지도집에 나와 있는 지명연구를 통해‘조선 상고사의 역사적 고찰’을 심층 있게 다루었다.
 
 
 황하에서 한라까지
 심백강 | 참좋은세상 | 2007년 3월| 302쪽 | 13,000원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황하문명을 낳은 모체는 바로‘요하문명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하의 홍산문화를 창조한 주역은 중국 한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힌다. 지은이는 한민족이 주역이 되어 창조한 요하문명을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배제하고 문헌학과 고고학을 바탕으로 되살리고자 했다.
 
 
 인류문명의 뿌리 東夷
 김선주 | 상생출판 | 2009년 1월| 112쪽 | 6,500원
 모든 것이 뿌리로 돌아가는 가을개벽기를 맞아 역사의 뿌리 찾기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인류문명은 동방에서 시작되었고, 그 시원을 연 것은 동방 한민족의 뿌리 동이(東夷)라고 단언한다. 동이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까지 문명을 개척하고 지배하게 되었으며, 특히 요즘 주목받고 있는 홍산문화는 동이족이 이룩한 중심 지역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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