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인문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2010.11.12 | 조회 2954

이다열 / 대구 복현도장

인문학 콘서트

인문학 콘서트


고미숙, 문용린 등 13인 지음 | 이숲 | 2010년 1월 | 384쪽 | 15,000원

얼마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인문학 서적으로는 8년 만에 국내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출간 한 달 만에 5만부가 팔렸고 벌써 12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1만권 이상 팔리면 베스트셀러로 불린다.


최근 인문학 붐이 불면서 출판시장 판도가 바뀌고 있다. 올해 상반기 인문분야 서적 판매량이 전체의 12.7%로 크게 늘었고,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00위권에 7종이 올라와 있다. 소위 ‘밥 먹고 사는데’ 도움도 안 되는 인문학 서적이 왜 인기가도를 달리는 걸까? 왜 많은 지식인들이 요즘 들어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한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TV앞에 섰다. 바로 〈인문학 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사실 인문학은 시청률이 잘 나오는 프로그램화가 어려워 공중파 방송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분야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인문학을 소재로 대담을 나누는 〈인문학 열전〉은 100회를 넘기며 인기를 한층 더하고 있다.
그중 13편의 이야기를 담아 『인문학 콘서트』란 책으로 다시 선보였다. 인문학의 시각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인류가 가야할 올바른 방향이 나온다고 입을 모은 지식인들, 이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

@이 시대, 왜 인문학인가

학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이다.★)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을 연구한다. 그리고 인문학의 연구대상은 ‘인간’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실험으로 분석하고 이론으로 명제화 할 수 없기에 인문과학이라 하지 않는다.★) 고전, 역사, 언어, 문학, 철학, 종교 등이 인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누구든 사람답게 살고 싶은 갈망이 있다면 그는 곧 인문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곧 인문학적 관심은 어떻게 하면 더 인간답게,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같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까? 서울대학교 철학과 김기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항상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삶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포괄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는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나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문학이 강한 나라는 위기에 잘 대처하고 ‘다름’을 포용한다. 또 개개인이 삶의 의미를 알고 소중히 하는 나라다. 이런 나라라면 누구나 만족을 느끼며 살지 않을까?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나라, 그 밑바탕엔 인문학이 있다.


@인문적 상상력과 자연과학의 힘
소설가 또는 음악인과 과학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언뜻 생각해도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둘 사이에 공감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예술적 감성과 철저한 이성으로 인식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 접점을 찾는 게 쉬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인문학의 대표격인 철학과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과학은, 사실 그리스에서 함께 태어난 형제다. 당시엔 자연에 관한 지식 전체가 과학이면서 철학이기도 했다. 그러나 16~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과학은 철학을 떠나 기술과 손잡게 되었고, 19세기 들어선 철학에 완전한 이별을 고한다.
그 후 독자적으로 달려온 과학의 행보는 알다시피 인류에 엄청난 변화를 안겨주었다. 허나 현대과학이 인류가 꿈꾸던 유토피아의 꿈을 이뤄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과학이 인류의 멸망을 앞당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과학이 반성적, 성찰적 사고를 잃어버리면서 윤리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통찰력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현대과학은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무조건 기술과 손잡고 미래로 돌진하는 형국이다.
현대문명을 창조한 두 축은 인문적 상상력과 자연과학의 힘이다. 과학의 발전을 이끈 상상력의 힘은 인문학에서 나온다. 달콤한 음악을 들을 땐 연인을 상상하고, 책을 읽을 땐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 모두 인문적 상상력이다.
이런 개인의 상상력이 모여 소통되면 큰 힘을 발휘한다. 한 나라가, 시대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인문적 상상력이 없으면 문명은 목표와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문학은 과학의 이정표가 되어 방향을 알려줘야 한다. 인문학이 배제된 과학의 무단 질주는 결코 이 땅에 유토피아의 꿈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키, 통섭
하버드 대학에서 생태학을 가르친 최재천 교수의 말이다.
“하버드엔 2차 방정식만 풀어도 못 따라오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러던 아이들이 학기 중간쯤 되면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간단한 방정식은 다 풉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펴놓고 공부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생태학 강의실에 철학과 학생이 있었다면 도서관에 가서 방정식 한 달 공부해도 수업 못 따라옵니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분야가 조금만 달라져도 완전히 속수무책입니다. 반면 미국에선 대학에서 전공을 자유롭게 옮겨 다닙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의학은 의대생만이 공부하는 분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수술장비, 의료기기가 첨단화되고 의학과 전자, 기계공학의 교집합이 커지면서 의학과 공학간의 벽은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또 미국의 버클리 대학은 생화학, 생리학, 생태학 등 여러 분야로 나뉜 학문을 한데 합쳐 통합 생물학과를 개설했다. 이때까지 쪼개고 쪼개는 방법으로 학문이 나눠졌다면, 이젠 하나로 통합되어 연구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대학 곳곳에서 보이는 중이다. 그런데 요즘, 학문 뿐 아니라 사회의 문제 또한 통합과 통섭의 자세로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재천 교수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통합이 이질적인 것을 물리적으로 한데 묶어놓은 것이라면, 통섭은 묶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생물학적인 개념입니다. 마치 갓 담근 김치를 오래 묵혀 발효시키면 새로운 맛의 묵은지로 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봅시다. 간단한 문제들에 대한 답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씨름해야 할 것은 복잡계 수준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의 대운하 정책이 계속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그것이 운송의 문제도, 관광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환경 문제도 있고 국민의 정서, 신뢰의 문제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분야 사람들이 다 함께 풀어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쇠고기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풀어야 할 사회문제들은 모든 분야가 머리를 맞대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통섭’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핵심 키워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통섭을 원활히 할 때, 사회문제의 해결책 또한 빨리 나오게 될 것입니다.”

@행복이 우선되는 교육
최재천 교수가 통섭하는 대학 학문에 대해 역설했다면, 서울대 교육학과 문용린 교수는 한국 사회의 아이 교육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오늘날 교육의 큰 흐름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너무 앎에 치우쳐 있어요. 옛날엔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 사람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요. 학력이 높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죠. 앎과 삶이 본의 아니게 분리된 모습이 오늘날 교육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의 말에 따르면 교육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면 곧 출세, 성공과 연결되어 당대에 가문을 빛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교육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학부모가 많다. 문제는 그런 부모의 바람 때문에 정작 행복을 잃고 공부하는 기계가 된 아이들이 늘어간다는 것.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아이들이 적지 않게 뉴스거리가 되는 요즘, 문 교수는 아이의 행복이 우선된 교육을 얘기한다.
“지구상에는 직업이 3만 가지가 넘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 3만 가지 직업 중 어떤 것을 선택하면 행복하고 즐거워할지를 생각한다면 구태여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우리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넣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앎과 삶을 함께 배울 수 있는 공부, 그것이 인문학 공부이자 참공부다. 우리사회가 참공부를 지향할 때 아이들의 입에서 행복하다란 말이 절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이 밑받침되는 사회를 위해
아이팟, 아이폰 등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며 세계적인 기업이 된 애플, 그 중심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 ‘아이패드’ 신제품을 소개하는 발표회에서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두 갈래 길을 나타내는 이정표였다. 하나의 화살표에는 ‘기술’, 다른 화살표에는 ‘인문학’(liberal arts)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든 건 애플이 늘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기술을 따라잡으려 애썼지만 사실은 반대로 기술이 사람을 찾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적인 기업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은 인문학에서 나옵니다.”
잡스는 진보된 기술 이전에 그 기술을 사용할 사람에 대해 철저히 고민했다.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 인문학이 그에게 수많은 영감을 준 것이다.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도정일 교수는 인문학적 자본은 한번 축적되면 절대 줄지 않고 늘어가는 재산이라 표현했다. 특히 고전은 먼저 살다간 이들이 책으로 남긴 인문학적 자본이다. 고전은 독자에게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만들어 갈 사회의 모습을 고민하게 만든다. 또 인문학적 자본이 쌓인 나라일수록 국민들은 의식이 높고 풍요로움을 느낀다.
여유로운 날, 차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며 인문학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마 인문학이 밑받침된 사회의 필요성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유토피아의 꿈을 인문학이란 크레파스로 색칠하려는 그들의 움직임에 함께 동참해보는 건 어떨까?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22개(6/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