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한국 근대사의 거울 <개벽>

2011.11.10 | 조회 2770

266이다열 / 대학생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후략)
- 이상화 -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 시는 1926년 6월 잡지〈개벽〉에 실렸던 이상화의 작품이다. 일본의 언론 검열이 서슬 퍼렇던때, 저항의식이 담긴 글을 실은 〈개벽〉은 압수와 발간 금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국내 첫 종합잡지로서 독자들과의 소통에 성공한 덕에 〈개벽>은, 폐간될 때까지‘미디어’의 중심에 서서 근현대 문학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그 위상과 지명도에 걸맞은 평가와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 학자가 있다. 그는 10년간〈개벽〉을 연구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다양한 관점에서〈개벽〉을 바라봤다. 그 결과물이 바로『개벽 연구』이다. 1920년대 미디어의 중심이자 시대의 총아였던 개벽이 어떻게 근대지성사에 기여했는지, 또〈개벽〉은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는지, 이제 그의 연구에 주목해보자.


문화정치와 〈개벽〉의 탄생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염원하는 한민족의 열망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날이 저물도록, 서울 시내 도처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놀란 일본 총독부는 3·1운동을 기점으로 식민지배 방침을 무력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전면 봉쇄했던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 정책의 시행으로〈조선일보〉,〈동아일보〉신문과 함께 월간지〈개벽〉이 첫 간행되었다. 〈개벽〉발간의 배경엔 천도교청년회가 있었다. ‘후천개벽’이념에 입각해 새 문화소식을 알리는 언론기관의 창립이 그 취지였다. 그러나 종교 기관지의 성격은 점점 옅어지고 국민의 의식 고취와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싣는 종합 대중지 성격으로 굳어졌다.

종로(鍾路)나으리 두분이 드려온다. 모다 눈이 「둥그레-」하야진다. 사내(社內)는 찬긔운이 핑돈다. 「압수요. 몃 부(部)나 실어왓소. 다-내어노으시오」하는 소리 만득(晩得)의 독자(獨子)가 먼길을 떠나는 듯하다. 사중(社中) 거북이 m군은 남산(南山)만 처다보며 입맛만 쩜씹다시며 부자(富者)집 맛메누리다운 K군은 그린 듯이 셔서 손길만 비를고 섯는데 떠버리R군은 「10년적공(積功)이 귀어허지(歸於虛地)로구나」하고 한숨만 짓고 …〈개벽〉20호 -OO을 當하든때

위는 〈개벽〉이 압수되는 상황을 그린 편집진의 글이다. 〈개벽〉에 실린 논설과 일부 문학은 지도부인 일제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1926년 폐간할 때까지 〈개벽〉은 40회 이상 발매금지 처분을 받는다. 〈개벽〉이 월간지임을 감안하면 이는 대단한 견제 조치였다.

일제의 혹독한 감시에도 〈개벽〉은 6년간 결호 없이 평균 8천부, 최대 1만부를 발행했다. 당시 국민의 90% 이상이 문맹이었고, 신문이나 잡지의 구독자 수가 십만에도 이르지 못한 상황을 생각하면 발행 부수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즉, 〈개벽〉은 신지식인만의 잡지라기보단 읽기가 가능한 대중이 읽는 잡지라 볼 수 있다. 지은이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어떻게 〈개벽〉이 당대 최대의 종합지로 지성사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연구했다. 특히 그 유통 시스템과 미디어적 전망 부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67〈개벽〉의 유통 시스템
〈개벽〉은 논설, 비평, 설문 등 다양한 기사를 실었는데, 특히 문학에 비중을 높게 두어 폐간까지 총 100여편의 소설과 500여 편의 시, 150여 편의 수필을 실었다. 당시 문예지인〈창조〉,〈백조〉등 보다‘문학의 대중적 유통’에 기여한 바가 더 컸다. 제한적인 독자층을 보유한 잡지와 달리〈개벽〉은 문맹을 제외하곤 독자층이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감’은 정치/사상/사회/역사/문화/언론 등 지성사 전반에 두드러졌는데, 지은이는 이 원인을 〈개벽〉이 가진 독보적인 유통시스템에서 찾았다.

창간 2주년에 접어든 1921년, 대중화를 위한 〈개벽〉의 유통망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맞서기 위해 지역의 분매소에서 판매되던 것을 분사-지사 시스템으로 바꿔 유통망 확대를 꾀한 것이다. 1923년에 이르러선 본격적으로 정치·시사를 다루고, 계몽기사와 시대정신을 편집에 적극 반영했다. 지은이는 “종교의 틀을 넘어 민족의 차원으로 나아갔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52지사-62분사인〈개벽〉의 유통망은 자본 규모가 월등했던 당대 신문사의 유통망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었다. 이는〈개벽〉이 하나의 ‘문화권력’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개벽〉의 독자층
경리사고(經理社告)
자(自) 창간 임시호 이후로 근만(近萬)의 독자가 매일 증가함은 우리 경리부 일동이 감(感)량부망(不忘)하는 바 올시다. (중략) 이러한 애정(哀情)을 심량(深諒)하시고 10월 중에는 잡지대금의 미납제위(未納諸位)에게 우편으로 집김(集金)을 개시하겟습니다. 그리 아시요.<153> 〈개벽> 4호, 1920.9.25.,153면

위 인용문은 〈개벽〉의 독자가 매일 증가하여 ‘잡지대금 미납자에 대해서는 강제징수 하겠으니 그리 알라’는 내용으로, 출판사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월 판매부수가 8,000부 가량이고 돌려 읽은 사람들까지 감안하면 〈개벽〉의 잠정 독자수는 수만 명 이상이었다. 그 핵심 독자층은 바로 청년단체의 구성원들이었다. 지은이는 이들의 존재가〈개벽〉을 “민족운동을 촉구하는” 강력한 매체로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청년들이 당대 여론 형성의 중심 세력이자 문화 변동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자층이자 지·분사를 운영하는 유통망이기도 했다. 이들 덕에 〈개벽〉은 문학을 비롯한 근대 지성사를 아우르는 잡지로 후세에 남게 된다.


〈개벽〉의 내용 구성과 배치
〈개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인지도와 인기를 날것으로 느낄 수 있다. 농부가 소작농의 처지를 보고하는 글을 보내오고, 평양에‘개벽상회’가 생기며, 잡지 요금을 연체했는데 강제집행을 미뤄달라는 호소문까지 실린 면면을 보면, 〈개벽〉이 독자를 사로잡았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탄탄한 유통망 외에 어떤 것이 잡지의 대중성 확보에 영향을 준 것일까? 지은이는 그 답이〈개벽〉의 구성과 배치에 있다고 한다.

〈개벽〉은 종합지로서 종교, 사상, 정치, 경제 등 근대문물 전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다양성’의 진면목을 보여준 셈인데, 이 새로움과 다양함은 당대 독서대중이었던 청년층과 지식층의 욕구를 정확히 꿰뚫었다. 지식층 내에서도 전문인이 극히 적었고, 직업분화도 거의 없었던 1920년대는 깊이아는 것보다 널리 두루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런 풍토에 가장 민감한 청년,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제공하는〈개벽〉을 읽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개벽〉은 독자들과 소통하는 개방적인 잡지였다. 동시대 문예지인〈창조〉,〈폐허〉등이 기고자를 굉장히 제한한 반면〈개벽〉은 독자투고, 투표, 동화모집 등 대중이 참여하는 구성으로 편집했다. 전자의 잡지들은 결국 독서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데, 지은이는〈개벽〉의 구성을 높게 사며 개방성이야말로 대중성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사안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개벽〉이 상업성과 대중성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개벽〉의 애초 목적이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문화소식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게재된 논설이나 문학작품은 독자를 계몽하려는 성격이 짙었다.

269금(今)에 소설개요로부터 소설 연구법각본 개급(及) 각본(脚本) 연구법을 순차(順次) 기재코자 하노니 여(余)의 차거(此擧)가 반도 청년으로 문예를 기호(嗜好)하는 제언(諸彦)의 일조(一助)가 되면 술자(述者)의 광영(光榮)일가 하노라. <개벽 1호, 소설개요>

위 글은 ‘소설개요’란 글로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해설이 서술되어 있다.
‘소설교과서’인 셈인데, 이는 편집진의 의도가 초보자의 문예교육에 있음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동시기 문예지인 〈창조〉나 〈폐허〉가 대중을 고려하지 않은 어려운 개념과 문학을 소개해 점차 쇠락해 간 모습과 비교하며 〈개벽〉의 이런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문화 수준이 낮은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글들은 개벽지가 대중성과 계몽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편으론 『햄릿』 번역본을 싣고, 서양 시인들을 소개하는 등 무게 있는 문학에도 비중을 두었다.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계몽성과 현실성’의 편집 원리는 <개벽>이 독자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였다.


영원한 생명을 얻다
〈개벽〉은 잡지로서 당시 유수한 신문의 영향력을 능가했으며, 지성계의 거봉(巨峰)으로 시사, 문학, 학술, 사상 등 제 분야를 망라하여 그것이 발간되던 시기를 ‘개벽의 시대’라고 명명하게 하는 전무후무한 잡지였다. 또 일제치하라는 엄혹한 시대 환경에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일제 당국과 대결하였으며, 타협적 시대 조류와 긴장을 유지하다가 끝내 꺾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잡지로 후세는 기억할 것이다.

수많은 미디어가 뜨고 지는 요즘은 미디어의 올바른 역할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 번쯤 〈개벽〉의 원문을 찾아서 읽어보자. 분명 그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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