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깨침과 깨달음

2009.11.09 | 조회 2709

佛之形體하고 仙之造化하고 儒之凡節이니라. (道典 2:118) 내가 한 손가락을 퉁겨 수미산을 무너뜨릴 수 있거니와 네 마음은 불퇴전이로구나. (道典 개정판)

‘불지형체(佛之形體)’는 증산 상제님께서 불교의 심법세계를 인정해주신 말씀이다.
비록 이 책은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우리들이 알고 싶어하는 불교의 핵심문제들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믿음, 닦음, 깨침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인생의 빈수레에 성경신이 충만한 또 한가지의 길을 얻게 될 것이다.

돈오와 점수는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

[돈오와 점수] 책의 제목이 전하는 ‘깨침과 깨달음’은 선불교의 돈오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문제제기이다. 돈오는 처음의 깨달음을 가리키고, 점수는 그 처음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해서 점차 닦는 것을 가리킨다. 돈점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頓’의 의미를 바로 아는 데 있다. 불교에서는 이 글자를 ‘몰록’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갑자기’라는 뜻과 비슷하다. 하지만 ‘갑자기’라는 수식어는 관찰이 가능한 외부의 사건이고, ‘몰록’은 사람의 오감으로는 관찰이 불가능한 내면의 사건을 가리킨다. 실로 몰록은 “천지가 24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니라”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시간과 공간의 틀을 가지고 어떤 사건을 뒤쫓아가면서 관찰하는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신과 교신의 차이점] 돈오점수설 문제에 대한 해법은 수행에서 이른바 교신(敎信)과 조신(祖信)의 큰 차이점을 밝혀냄으로써 접근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신은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못 깨친 중생들의 믿음이고, 조신은 ‘나는 이미 부처이다’라는 깨친 이들의 믿음이다. 교신은 관념적 이해를 통해서 불교를 파악하려고 하는 반면, 조신은 신앙의 도약을 통해 불교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신과 교신은 돈오와 점수의 논쟁을 불식시키고,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점을 따질 수 있는 믿음의 바탕이 된다.
 
[돈오의 조건] 누구든지 한번쯤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타인에게 또는 자기 자신에게 화두처럼 물어본 기억이 있을 터이다. 어느 문헌에서는 달마가 말하기를 “중생을 부처로 만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미 부처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이것은 ‘나는 이미 부처이다’라는 조신을 내세우는 것인데, 조신 그 자체가 돈오를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어떤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점오냐 돈오냐가 결정됨을 알 수 있다.
 
 
올바른 믿음은 불퇴전(不退轉)이어야 한다

[조신의 믿음]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불교에서 믿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것은 단순히 부처님에 대한 신앙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부처임을 확인하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부처’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바로 모든 사물의 공성(空性: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법, 즉 연기성)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불교의 믿음은 유신론적 종교의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 이것을 체용의 논리로 풀이하면, 마음은 체(體)이고 믿음은 마음이 발휘하는 용(用)이다. 저자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체를 ‘몸’이라 하고, 용을 ‘몸짓’이라는 쉬운 우리말에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이요, 믿음은 그 몸으로부터 나오는 몸짓이 된다. 일심이 체이고 믿음이 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의지나 이성 등의 정신적 기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심의 작용이다. 여기서 몸과 몸짓이라는 개념은 주체와 객체, 원인과 결과, 생겨남과 없어짐 등의 이분법에서 보여지는 분별의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치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즉 몸에는 반드시 몸짓이 나오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몸짓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올바른 믿음] 불교의 믿음에 대한 대표적인 문헌이라 할 『대승기신론』, 『화엄경』등에는 올바른 믿음에 대하여 연거푸 거론하고 있다. 올바른 믿음이란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상황에 따라 약해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믿음이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믿음이 ‘올바른 대승의 믿음’이라고 한다. 대승이란 큰 수레 곧 ‘일심’을 말한다. 이처럼 『대승기신론』의 중심 주제는 어떻게 하면 변할 수도 있는 믿음을 변함없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바꾸느냐 하는 것이다.
 
 
올바른 닦음은 불이(不二)의 경지에 확고하게 머문다

[닦음의 본질] 앞서 불교에서 올바른 수행을 하고 올바른 깨침을 이루기 위한 출발점은 올바른 믿음을 일으키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교신의 경우에는 믿음이 닦음을 낳으며, 닦음이 깨침을 낳는다는 구조이다. 일종의 순환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조신에서는 믿음이 닦음이고, 닦음이 곧 깨침이다. 닦는다는 것은 깨침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즉 깨침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순간마다 재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道에 들어가는 길] 수행과 관련해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도(道)에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리입(理入) 즉 이치로써 들어가는 길과, 행입(行入) 즉 수행으로써 들어가는 길이다. 이치에 완전히 부합하여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고요히 무위(無爲)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리입이라고 한다. 행입은 네 가지 닦음을 가리키는데, 첫째는 원한을 극복하는 것, 둘째는 인연을 따르는 것, 셋째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 넷째는 법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를 몸과 몸짓의 구도에 적용하면, 리입은 조신으로서 몸이 되고 행입은 몸짓으로서 닦음의 실천이 된다.
 
[올바른 닦음] 여기서 진정한 믿음의 특징은 언제나 닦음과 함께 한다는 데 있으며, 닦음을 통해서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데에 있다. 닦음이란 마치 확고부동한 벽처럼 불이의 경지에 머무는 것이다. 불이(不二)라는 것은 모든 것의 공성(空性)을 보고 거기에 머무는 믿음의 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닦음은 불이의 경지(분별·집착이 없는 본래의 마음상태) 즉 공(空)의 신비경을 환하게 열어서 확고하게 머무를 수 있어야 한다.
 
올바른 깨침은 한결같은 부단(不斷)함에 있다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 ‘깨달음’이 예전에 몰랐던 것을 이제는 좀 알았다는 이해의 차원이라면, ‘깨침’이란 앎의 세계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경험의 차원이다. 즉 ‘깨달음’은 퇴전의 언어인 반면, ‘깨침’은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침은 결코 무효가 될 수가 없다. 일단 부처가 되었다면 다시는 중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개구리가 다시 올챙이로, 나비가 다시 애벌레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진정한 깨침의 경지] 그러나 선사들은, 깨침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완전히 벗어나서 크게 살아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크게 산다(大活)는 말은 가장 깊은 의식인 아뢰야식(죽은 뒤에도 계속되는 의식의 흐름)까지도 깨버리고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이른다.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꿈에서도 심지어는 **서도 언제까지나 한결같은 경지일 때 비로소 깨쳤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이 곧 일여(一如)이며 한결같음, 부단함이다.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하나] 『화엄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믿음과 깨침의 불가분성이다. 그 이유는 초발심의 연장으로 체득하게 되는 묘한 깨침은 결국 믿음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올바른 믿음과 닦음, 깨침은 한 덩어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각각의 관점에서 명확한 의미로 나누어 볼 때, 올바른 믿음의 기준은 불퇴이고, 올바른 닦음의 기준은 불이의 경지이며, 올바른 깨침의 기준은 부단함이 된다.
 
이상은 불교의 세계에서 학문과 수행 사이에 가교를 놓아 보려는 책 내용의 대강이다. 진리의 몸뚱아리 즉 체(體)를 잡는 큰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믿음, 닦음, 깨침에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이 철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증산도 진리의 근본은 상제님께서 ‘득체득화득명(得體得化得明)’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먼저 진리의 바탕을 보고 대세에 눈떠야 후천개벽기에 살고 신천지를 여는 큰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종도사님께서는 “증산도의 믿음은 ‘매달릴 신(信)’이다”라고 도훈을 내려주신 바 있다. 지도자는 갈고리 없는 낚시대를 드리울 뿐 강력한 믿음으로 진리에 매달려야 가을개벽을 극복해서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요건보다 더욱 강력하고 현실적이다. 과연 우리는 죽음을 불사하는 믿음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구도자인지 한번쯤 곰곰이 사색해 볼 일이다.

출처: 월간개벽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29개(11/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