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철학이란 무엇인가?

2009.11.09 | 조회 2080

이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지식이 이 세상에 있는가?
 
[사물과 지식의 관계] 먼저 서양철학의 시조(始祖),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세계로 빠뜨린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로 제대로 아는 것인가? 이것을 탐구할 때 현재의 경험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옳은 방법일 것이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사물을 접했다고 하자: 책상이 무엇이냐. 내가 생각하는 책상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고 있는 이 책상을 다른 사람도 똑같은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책상을 자세히 그리고자 하는 화가에게는 어떤 사물이 상식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버릇에서 벗어나 사물을 나타난 그대로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사물을 관찰할 때 맨 처음에 부딪치는 문제로 현상과 실재, 즉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은 사실상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감각소여와 물질적 대상] 생각을 거듭하여 보면 우리의 감각구조에 대해서 한가지 터득하게 된다. 우리가 본 책상이란 것은 책상 자체, 즉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추리(推理)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명료히 하기 위해 새 용어를 쓰기로 하자. 우리의 감각기관에 직접 알려지는 것, 예컨대 색깔, 소리, 냄새, 딱딱함은 책상 자체의 실재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런 것을 감각소여(感覺所與, sense data)라 하고, 감각소여를 직접 지각하는 경험을 감각(感覺, sensation), 그리고 실재하는 책상을 물질적 대상(物質的對象, physical object)이라 부르자. 우리가 색깔을 볼 때마다 그 색깔<의> 감각을 갖게 되지만 색깔 자체는 감각소여이고 감각은 아니다. 우리가 책상에 대하여 뭔가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책상과 관련한 감각소여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책상 자체를 감각소여라거나, 책상의 성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도대체 책상이란 실재는 뭐고, 감각소여와 실재하는 책상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고의 방법을 배워가게 된다.

관념론자: 실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정신적이어야 한다
 
[대표적 관념론자] 감각과 실재의 관계에서, 관념을 제외하고는 실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관념론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는 실재는 영혼의 집합이라 생각하였고, 물질이라는 것은 미발달상태의 정신의 집합이라고 하였다.

버클리는 실재란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라고 말하였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신의 정신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버클리는 감각소여가 인식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 즉 우리가 보는 특정한 색깔이나 머리 속에 있는 상상되는 것을 관념(idea)이라고 하였다.
 
[관념론의 문제]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가 직접 알지 못하는 것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고 볼 수 없다. 직접적인 관념, 즉 <직접지(直接知, acquaintance)>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그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외부적인 대상을 인식할 때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않고서, <기술(記述, description)>에 의해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직접 알고 있는 어떤 것과 연관하여 추리, 판단하여 나에게 알려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개념적지식의 중요성] 존재하는 특수한 사물에 대한 직접지에 덧붙여서 우리는 <보편(普遍, universal)>, 혹은 추상관념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희다는 것>, <다양성>, <형제 관계>와 같은 것을 직접 알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는 보편을 <개념(槪念, conception)>이라 부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사고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면, 전적으로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직접 알지 않고도 새로운 개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기술에 의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철학의 사명] 일반적으로 논증에 의거하여 외부세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본능적 신념은 외부세계의 대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사명은 이와 같은 강렬한 신념에 기반하여, 타당하지 않은 부가물(府加物)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들의 본능적 신념의 위계(位階)조직을 명시하는 것이다.
 
일반 원리에 대한 지식: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닌 지식이 있다
 
[보편에 대한 지식]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모든 지식이 경험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5+7=12와 같은 명제는 우리의 경험 이전에 수학의 세계에 존재한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것을 <선천적(先天的, a priori)>이라고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일반적으로 불행보다는 행복이, 무지보다는 지식이, 증오보다는 선의가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하는데 이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도 선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윤리적인 문제, 논리학, 순수수학이 대표적인 선천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지식은 논리적 추론에 의해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사물들 사이의 <관계>처럼 개인의 경험이나 사고활동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 정신의 영역에도 물질의 영역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보편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진리와 허위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지식의 원천은 어디에서 올까. 우리가 <기술에 의한 지식>이라고 부르는 사물에 대한 파생적인 지식에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직접지와 진리(truth)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 진리에 대한 우리들의 직접적인 지식은 <직관적>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고, 직관적으로 인식된 지식은 <자명한> 진리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진리에는 감각기관에 주어진 것을 진술하는 것, 또는 산수적 원리, 또는 어떤 윤리적 명제를 포함한다. 진리에 대한 파생적 지식은 진리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성립된다. 따라서 진리와 관련한 모든 지식은 직관적 지식에 의존한다.
 
[진리의 요건] 그런데 진리에 대한 지식은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의 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경우, 세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1)진리에 대한 이론은 대립되는 양단(兩端)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허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즉 역(易) 철학으로 말하자면 음과 양을 통일한 자리를 진리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신념이 없으면 진리도 허위도 있을 수 없다. 단순한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신념(belief)도 진술(statement)도 없을 것이므로 진리나 허위도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신념의 성질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진리의 세계는 참된 신념을 통해서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3)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념의 참, 또는 거짓은 신념 자체의 밖에 있는 것에 의존한다. 즉 진리는 신념과 사실이 대응하는 어떤 형태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신념과 외부사물의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성질로 만드는 진리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진리에 대한 지식은 현실과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어떤 신념이 참이고, 그것이 직관적이거나 직관적인 지식으로부터 추리된 것이라면 올바른 <지식>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굳게 믿는 것이 참이 아니라면 <오류>라고 부른다. 직관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는 신념이라는 것은 <개연적(蓋然的) 의견>에 불과하다.
 
 철학의 한계와 그 가치
 
[철학의 목적] 사물의 <본성>이 사물에 대한 모든 진리를 의미한다면, 우주의 모든 사물이 가진 모든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한, 분명히 우리는 사물의 본성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순수한 직관적 지식 이외에 보편 사이의 관련성을 제시하는 철학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사물에 대한 지식도 가능하게 한다.
 철학은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지식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철학이 목적으로 하는 지식은 여러 과학에 통일성과 체계를 주는 지식이고 우리들의 확신, 편견, 신념의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생기는 지식이다. 철학은 문제에 대한 확정적인 대답을 위해 연구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확정된 대답은 그것이 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문제 그 자체를 위해서 연구하는 살아있는 정신이다.
 
[철학적 사색의 가치] 개인이 본능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세계는 종종 감정에 빠지거나 혹은 협소하다. 육체적인 본능에 충실하다보면 개인의 삶은 일상적인 것들에 의해 질식당하며, 생각과 영혼의 감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생활에서는 평화는 없고 이기적인 욕망과 무력한 의지 사이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한 방법은 철학적 사색을 하는데 있다. 철학적 사색은 우주를 두 적대 진영, 즉 동지와 적으로 보는게 아니라 공평하게 본다. 그렇게 하면서 대상 속에서 발견되는 성격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정신 활동에 의해 달성된다.
 
지식은 아(我)와 비아(非我)를 통일하는 한 형식이다. 나를 맹목적으로 우주에 동화시키는 것은 영혼의 위대함을 육성하지 못한다. 모든 통일과 마찬가지로 자기와 비아를 통일함에 한쪽이 지배하면 손상되며, 따라서 우주를 우리 자신의 편견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면 손상된다.

참된 철학적 사색은 사색되는 대상을 위대하게 하고 따라서 사색하는 주체를 위대하게 하는 모든 것에 만족을 느낀다. 자유로운 지성은 신이 사물을 보듯이, 습관적 신념이나 전통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평정하고 냉철하게 오직 참된 지식만을 추구하면서 사물을 볼 것이다. 나아가 행위와 감정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자유와 공평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러셀은 철학의 한계와 가치를 명확히 하였다. 그가 말하는 철학의 총결론도 천도에 합일하는 참된 신념을 갖는데 있다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천도란 천지일월이 운행하는 시공의 틀이 될 수밖에 없다. 참된 신념이란 것도 인간이 천지일월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고 만물이 순환하는 이치를 체득하여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정사(政事)에 참여할 수 있는 일꾼의 마음이다. 후천 인존시대에는 인간이 천지의 대행자, 대변자가 되어 천지의 일을 한다.
 
상제님께서는 후천은 인간이 천지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만사지 문명이 열린다고 하셨다. 후천의 만사지(萬事知) 문명이란 인간과 신이 하나되는 신인합일(神人合一)과 매인이 우주 변화의 원리에 통하게 됨으로써 열리게 된다.
 
글·나의택


출처: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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