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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강해

2009.11.09 | 조회 2130

진덕수 저, 김종석 역주 / 이문출판사 / 13,000원

 
우리는 이 책 『심경』을 통해서 유가 심학의 근원이 바로 ‘상제’인 ‘천’(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며,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그 천명天命을 잘 듣고 부합되게 행하는 것이야말로 유가 수행의 궁극 목표이자 유가가 꿈꾸는 참다운 성인의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밀함을 담고 있는 『심경』(心經)

『심경』은 남송시대의 주자학자인 진덕수(眞德秀)가 사서삼경과 주렴계, 정자, 주자 등의 말을 발췌하고 그 아래 이와 관련된 송대 학자들의 학설을 주(註)로 붙여 엮은 책이다. 그런데 이 『심경』이 점차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명대의 정민정(程敏政)이 『심경』에 송·원대에 걸쳐지는 많은 학자들의 설을 추가로 부주(附註)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심경부주』이다. 증산도 대학교의 필독서이기도 한 이 책은 바로 이 『심경부주』를 강해한 책이다.

『심경』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도 필수 수양서이자 입문서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심경』에 유교에서 논하고자 하는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며 때문에 결국 모든 결론은 수양과 심학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 『심경』을 통해서 유가 심학의 근원이 바로 ‘상제’인 ‘천’(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며,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그 천명天命을 잘 듣고 부합되게 행하는 것이야말로 유가 수행의 궁극 목표이자 유가가 꿈꾸는 참다운 성인의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사람의 하는 바를 보고 계시니, 너는 깜깜하여 밝지 아니하여 나를 보는 이가 없다고 하지 말라. 신이 너를 보고 계시니라.”
 
유학에서의 ‘천’(天)이란 곧 출발점이자 궁극적 지향점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오늘처럼 귀신과 인간의 세계가 철저히 분리되어 귀신의 여부를 의심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천’(天)을 말하면 응당 ‘상제’(上帝)라는 인격신이 배후에 의미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송대 주자 시대 때에는 인격천(人格天)이 의리(義理)적인 의미로서의 천(天)이 되었다고만 알고 있지만, 이것은 그 당시 유행하던 노불(老佛)의 치밀한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응하여 유학의 형이상학적 논리를 완비·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곧 천(天)의 의리적이고 이치적인 측면을 들추어 강조한 것일 뿐 그 역시 천(天)의 인격적인 측면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의 문집에는 천(天)의 인격적인 모습인 ‘상제’(上帝)의 모습은 별로 찾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당시의 배경과 주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현대의 시각에서만 주자의 문집을 뒤적일 뿐이라면 결국 끝까지 주자 사상의 진면모를 살필 수는 없을 것이다.
 
주자 인성론의 두 근간은 ‘성즉리’(性卽理, 性이 곧 이치이다)와 ‘심통성정’(心統性情,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한다)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늘(상제)이 내려준 천명(천리)이 나에게 와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하기 때문에 성(性)은 곧 이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리는 물론 만물에도 모두 품수되어 있다. 그러나 ‘허령(虛靈)한 지각’으로 리를 발현시키고 인식할 수 있는 ‘마음(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천도와 천리가 있으면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의도가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有道有理 天人一也 更不分別)

유학에서의 선과 악은 바로 마음의 활동이 천리에 부합하면 선이 되는 것이며 부합치 못하면 불선(不善)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항상 작용을 멈추지 않는 활물(活物)이므로 인신(人身)을 주재하는 마음의 작용이 선한지 불선(不善)한지는 오직 완전히 움직여진 곳에서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마음의 움직임을 ‘情’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칠정이 모두 절도에 맞아서 그 성에 부합된 행동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마음을 수양한다.
 
마음을 닦아 이 성을 온전히 밝혀낸 사람을 유학에서는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이 성인은 천(天)의 종자(宗子)로서 천(天)의 의지를 대신 실현시키는데, 그것이 곧 『중용』에서 말한 ‘천지위언(天地位焉), 만물육언(萬物育焉) -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 삶을 이루어 잘 화육된다 - 이다.

인간이 기질을 변화시켜서 불초한 자이지만 마침내 성현이 될 수 있는 것은 성(性)이 통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의 치질도 핥아주는 아부를 하여 권력과 부귀를 누리던 자가 나중에는 아비와 임금도 죽이는 금수만도 못한 놈이 되는 것 역시 이 性이 통하기 때문이니 어떻게 수양을 안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만 그 욕망을 막을 수 있는가? 다만 생각할 따름이니, 배우는 사람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 오직 생각하는 것으로서 욕망을 막을 수 있다.” (何以窒其欲 曰思而已矣 學者莫貴於思 惟思而能窒慾, 『심경부주』)
 
경은 ‘항상 깨어있는’(흐리멍텅하지 않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

따라서 『심경』의 1권은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히 하고 오직 한결히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수행의 기준과 궁극 목적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서 그 근거로서 “상제가 너에게 내려와 계시니 너는 의심치 말라”고 하여 천명의 필연성을 알리고 그 결단을 찬미하는 것으로부터 심학의 연원을 이끌어 나간다. 여기서 “상제가 너에게 내려와 있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상제의 의지인 천명, 곧 성(性)이 품수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성을 밝히는 공부는 항상 정신이 깨어있는 ‘경’(敬)과 홀로 있을 때라도 방만히 굴지 않는 ‘신독’(愼獨)이 관건이 된다. 이에 대해 정자는 “언제나 경(敬)하면 상제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심경』은 바로 이 ‘경’(敬)이란 한 글자에서 시작하여 ‘경’(敬)이란 한 글자에서 끝나고 있다. 때문에 『심경』의 마지막 권은 이 경을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경계의 글로 끝을 맺는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을 두 가지에 쓸 수 없으니 한 가지 일에 쓰면 다른 일이 능히 들어 올 수 없는 것은 일이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일이 주인이 되어도 생각이 분분하고 어지러운 근심이 없어지거늘, 만약 敬에 주력한다면 어찌 이러한 근심이 있겠는가?” (大凡人心不可二用 用於一事 則他事不能入者 事爲之主也 事爲之主 尙無思慮紛擾之患 若主於敬, 『심경부주』)
 
경은 다만 내달리지 않는 것이니, 요즘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을 하려고 하여 마음에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유학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직’(直)이란 한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경’(敬)의 수양법은 바로 직(直)하게 태어나 직(直)하게 살다가 직(直)하게 **야 하는 인간의 성품을 가다듬는 방법이다.

간단히 직에 대해 설명하자면, 직이란 하늘로부터 만물이 부여받은 생명의 성질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내야 할 숙제인 것이다. 또한 직(直)은 곧 천리이자 정리(正理)의 속성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으면 천지간의 면면한 일원지기(一元之氣)는 더 이상 영속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직하고자 하는 것은 군자의 모든 공부에 대해서 기반이자 결론이 된다. 이를 『주역』에서는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라 말한다.

인간이 본성대로 직하게만 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기품(氣稟, 각각이 다른 기질)과 물욕(物慾)에 의해서인데,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를 통해서 바로잡을 수 있다. 한편 마음이 경건하면 몸이 저절로 수렴되어 직내(直內)하면 의당 직외(直外)가 되겠지만 행동거지를 예의에 맞게 하고 생각을 단정하게 함으로써 경이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경을 통해 안을 직(直)하게 하는 공부와 행동거지를 경(敬)하게 하여 안을 직하게 하는 공부는 함께 병행해야 한다. 따라서 『심경』은 먼저 ‘경’(敬)으로써 안을 직하게 하는 방법을 말하고 끝에는 ‘경’(敬)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심경』에서 말하는 경(敬)의 방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 묻기를, “경(敬)은 동정을 겸하여 말하지만, 정(靜)할 때는 적고 동(動)할 때는 많으니 쉽게 어지러워지지 않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말하였다. “어떻게 항상 정(靜)할 수 있으리오?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응해야 하니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일없는 때는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일이 있으니, 일이 나를 많이 혼란시킨다 하여 또 가서 정좌(靜坐)한다면 말이 안되니, 경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일이 앞에 닥쳤는데도 자신은 오히려 정(靜)에 주력하여 전혀 응하지 않으면 이것은 마음이 완전히 죽은 것이다. 일이 없을 때는 경이 마음속에 있고 일이 있을 때는 경에 일이 있어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나의 경은 단절된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정자가 ‘공부가 한 가지에 전념하는 데 이르면 비로소 좋다’하였으니, 대개 한 가지에 전념함이란 일이 있으나 없으나 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問敬通貫動靜而言 然靜時少動時多 恐易得撓亂 朱子曰 如何都靜得 有事須著應 人在世間 未有無事時節 自早至暮 有許多事 不成說事多撓亂我 且去靜坐 敬不是如此 若事至前而自家却要主靜 頑然不應 便是心都死了 無事時 敬在裏面 有事時 敬在事上 有事無事 吾之敬未嘗間斷也 故程子說學到專一時方好 蓋專一則有事無事 皆是如此 程子此段這一句 是緊要處)
 
* 주자가 말하였다. “마음에 어떤 사물도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겉으로 태도를 여러 가지로 바꾸는 것은 모두 자신의 역량에 따라서 대응해 갈 뿐이다. 조금이라도 사물에 얽매이면 마음은 곧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니, 사물에 얽매이게 되는 데는 세 가지 까닭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아직 닥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미리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일이 이미 지나갔는데도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고 잊어버리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바로 일을 당했을 때 생각에 치우침이 있으니, 이 모두가 사물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물에 얽매이게 되면 곧 이러한 사물을 (마음에) 묻어 두는 것이니, 또 다른 일이 앞에 닥쳤을 때 응대함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여기서 어찌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환하게 비어있고 털끝 만한 흔적도 남김이 없어서, 사물이 닥쳤을 때 작으나 크나 사면 팔방 어느 쪽이나 사물에 따라서 적절히 응대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마음에는 원래 이러한 사물을 묻어 둔 적이 없었던 것이다.”(朱子曰 心不可有一物 外面酬酢萬變 都只是隨其分限應去  繫於物 心便爲其所動 其所以繫於物者有三 或事未來而自家先有期待底心 或事已應去了 又却長存在胸中 不能忘 却正應事之時 意有偏重 這都是爲物所繫縛 旣爲所繫縛 便有這箇物事 及別事來到面前 應之便差了 這如何會得其正 聖人之心 塋然虛明 無纖毫形迹 事物之來 若小夜臺 四方八面 莫不隨物隨應 此心元不曾有這箇物事)
 
 
글·이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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