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일심의 철학

2009.11.09 | 조회 2780

너희들이 큰 복을 구하거든 일심(一心)으로 나를 믿고 마음을 잘 닦아 도를 펴는 데 공을 세우고 오직 의로운 마음으로 두 마음을 두지 말고 덕 닦기에 힘써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道典10:49)
 
 ‘심(心)’자가 천하만사의 원줄기니라.(道典 11:55)
 
 도전(道典)에는 유독 마음(心)과 관련된 언어가 많이 등장한다. 일심(一心), 심법(心法), 심고(心告), 심덕(心德), 심통(心統), 심지(心志), 심단(心端), 심사(心思), 혈심(血心), 마음 등 상제님과 태모님께서 마음의 근본과 마음씀, 마음 닦음에 대해 밝혀 주신 말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상제님께서 천상으로 돌아가시는 어천의 순간까지 성도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마음 닦음에 대한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면, 상제님 도업을 받드는 관건은 결국 자기 마음의 문제, 곧 심법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마음의 문제 중에서도 일꾼에게 있어 화두와도 같은 것은 바로 일심의 문제이다. 상제님께서는 직접 내어 쓰신 성도들에게 서전서문을 읽히시고 고난을 겪게 하시는 등 어떤 사명을 맡기기 전에는 반드시 심법 전수를 먼저 하셨으며, 도전의 <대두목과 일꾼>편도 역시 일심법의 전수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에게 마음 닦음과 일심의 문제는 단지 도덕적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상제님 천하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절대절명의 과제, 반드시 받들어야 하는 천명(天命)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꾼 정신의 고갱이, 일심(一心)이란 무엇인가?
 여기 『일심의 철학』이라는 낯설지 않은 제목을 걸고 나온 책이 있다. 서양 형이상학의 백미인 칸트의 관념론과 ‘마음의 과학 science of mind’이라 불리는 불교의 유식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동서철학을 엮어가며 논하는 마음의 세계, 일심의 세계를 따라가 보자.
 
 일심(一心)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심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된 계기가 자아에 대한 물음,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오랜 시간 천착해온 자아에 대한 사유의 궁극적인 결론을, 저자는 원효의 일심사상에서 발견한 것이다.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원효는, 왕실 신앙을 중심으로 궁궐의 대사원에 살면서 귀족생활을 누리던 당시 승려들의 폐습을 버리고 파계승, 거사의 차림으로 통일(후)신라를 전후한 격동의 시대에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정복지역의 유민들까지 뜨겁게 껴안으며 불교의 대중화와 중생 제도를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닌 민중의 성자였다. 이러한 제도의 와중에도 방대한 저작활동에 힘써 한민족의 정신과 한국 사상사의 첫새벽을 열어 놓은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원효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일심이 만물의 중추이며 일심에 달하는 것이 곧 열반이라는 일심사상과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대승불교의 모든 종파를 하나로 통효(通曉)하는 조화사상인 화쟁사상,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고 중생의 마음에 철저한 자유가 내재되어 걸림이 없다는 무애사상 등이 그것으로 일심, 화쟁, 무애의 사상은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자아를 찾아 나가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자아의 없음, 무아(無我)의 발견이며 그 무아의 깨달음이 곧 원효가 논하는 일심의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나’라는 고유성, 자아를 규정할 수 없다는 공성(空性)의 자각에 부딪히게 된다2). 이러한 공(空)의 자기의식이 바로 일심이다. 아(我)뿐만 아니라 법(法)도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신이고 일심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곧 일심인 것이다. 아와 법, 나와 너, 주와 객을 구분짓는 일체의 경계가 무아의 깨달음 속에서 사라질 때, 그것이 바로 일심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계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심의 통찰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의 본질이라는 것, 불교와 유가사상 뿐 아니라 서구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일심의 다른 이름인 무한과 절대의 사유가 철학의 핵심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저자가 일심, 무아의 결론에 도달하는 배경이 된, ‘유식무경’으로 요약될 수 있는 불교 유식철학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일심으로 본 세계 - 유식무경의 세계
 불교의 한 학파인 유식(唯識)학파는 소수의 수도자들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소승불교에 반발하여 일어난 대승불교의 한 학파이다. 중생의 광범위한 성불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승불교의 유식철학은 아(我)와 법(法), 주와 객의 이원론을 지양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심리적, 물리적 현상세계가 그렇게 경험하고 인식하는 우리 자신의 식(識)을 떠나 식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할 뿐 식을 떠난 대상세계, 경(境)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식무경(唯識無境)’이 의미하는 바이다. 여기서 ‘식’은 ‘경’과 대립되는 주관-객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심리적 현상세계로 환원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현상 초월적 의식, 일체의 경험적 현상세계를 형성하는 궁극근원인 무한과 절대의 일심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 어떤 것도 인간 심성-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식(識) 안에서 성립되고, 현실화되며, 인식된다. 이것이 바로 유식무경이 말하는 유식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경’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대상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이 식일 뿐, 대상세계인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철학은 이러한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가 현상세계를 우리의 마음이 창출한 것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유식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을 모두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마음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그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자체가 제한적이고 극히 표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의 활동에 대해서는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명료하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현상을 구성해내는 마음의 활동주체를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부르며, 현상을 구성하는 그 식의 활동을 ‘식전변(識轉變)’이라 칭한다. 아뢰야식의 식전변 활동은 아뢰야식의 식 자체가 이원화하는 것인데, 오직 하나의 일심, 아뢰야식만이 존재하지만 그 아뢰야식의 이원화를 통하여 주관적 부분인 견분(見分)과 객관적 부분인 상분(相分)이 분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태극이 음양의 양의(兩儀)를 생하는 것이며, 신이 신 이외의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다. 즉 유일자, 일심, 공(空)인 무한이 스스로에게 제한선을 그어 유한을 창조하는 끊임없는 자기확인의 활동인 것이다.
 이렇게 아뢰야식의 자기이원화 활동에 의해 시간, 공간상으로 제한된 유한자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신체인 유근신(有根身)과 일체의 자연세계인 기세간(器世間), 그리고 다시 그것들을 바라보는 개체들의 의식활동이다. 유근신과 기세간이 아뢰야식의 상분(객관요소)이며 의식활동이 곧 그에 대한 견분(주관요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제한 지워짐으로써 둘이 탄생하게 되며, 비로소 나와 세계, 주와 객 등의 분별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양자는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며 유일한 하나의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상대적인 한 쌍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적 차원의 의식에게는 이러한 아뢰야식의 활동, 무한한 유일자의 자기이원화 활동에 대한 명료한 의식은 가려져 있게 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서 비로소 의식하게 되는 것은, 이미 그 활동을 통해 이원화되고 제한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 자체의 활동성을 모르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무지, 근본 무명이라고 유식철학은 이야기한다.
 
 따라서 유식철학은 인간의 자아, 자신에 대한 밝음의 성취를 추구한다. 우주 전체의 진리가 중생의 마음을 통하여 현현하기에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대승불교의 유식학파는 중생이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중생이 무명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는 길, 성불하는 길임을 설파한다. 소수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소승의 논리가 아니라, 유식의 논리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 인간 중심성을 기저에 두고 모든 인간의 성불 가능성, 해방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 무한한 초월의 정신
 저자가 ‘일심의 철학’속에서 보는 것은 결국 인간 존재,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끊임없이 무한과 절대의 사유에 도전하여 왔다는 사실, 언제나 무대 밖의 초월을 시도해 왔다는 사실, 한번에 구만리를 나는 붕새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초월성과 자율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이 형이상학에 천착하는 이유는, 인간 자신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동석 선생은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특별히 「정신론」(精神論)편을 따로 할양하여 우주정신과 인간정신의 생성을 논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우주와 같이 광대무변하고 위대하나, 인간의 육체(形)가 협착한 관계로 토화작용(土化作用)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정신의 모순과 대립이 발생한다는, 현실적인 모순에 대한 진단도 함께 내리고 있다. 상제님께서도 천지의 대척점(對蹠點)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혀 주신 바 있다.
 
 天地無日月空殼이요 日月無知人虛影이니라
  천지는 일월이 없으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사람이 없으면 빈 그림자니라.
  (道典 8:59)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rtificial Intelligence)에는 놀라운 장면이 등장한다. 지구상에서 인류가 멸망하고, 그 후 수 만년이 지나 ‘인간’이라는 신비한 존재를 탐구하기 위해 지구에 온 외계인들은 폐허가 된 지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인간 몸의 흔적들,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을 찾아내어 인간 복제를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는데, 하나의 인간을 다시 복원해낼 때마다 그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함께 되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 단지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아닌 ‘기억’과 ‘경험’의 문제라는 것,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과 절대성 등의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는, ‘유식무경’의 논리처럼 객관적인 대상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식(識)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유식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상제님께서 밝혀 주신 천지의 대척점으로서의 인간의 위대함, 그 단서를 만날 수 있다. 한 인간의 정신이 태어날 때, 비로소 그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펼쳐진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깨어날 때, 각성할 때, 완성될 때에, 그 앞에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마치, 상제님과 태모님처럼). 이는 완성된 인간이란, 천지와도 같은, 천지의 대척점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인간 존재의 위대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의 가을세계를 살아갈 후천의 인간이란 어떠한 경지의 인간이어야 하는가 라는, 일꾼들의 도적 각성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제님의 일심법 - 천지일심의 세계
 저자가 『일심의 철학』을 통하여 논하는 것은 공(空), 무한, 불성, 신성으로서의 일심, 유식무경의 근본 바탕이 되는 형이상학적 일심이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일꾼들에게 내려주신 일심의 경계는 어떠한 것일까.
 
 일이 금방 된다고 해도 천지 일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일이 되느니라.(道典 8:14)
 
 여기서 도전 전편을 관통하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심은 바로 ‘천지 일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지 일심’은 천지는 오직 한 마음이며, 영원히 생명을 낳고 기르고 성숙케 하는 생장염장의 길을 간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의 생명의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내가 천지와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상제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심세계이다3).
 
 왜 일꾼의 일심은 천지로 확대된 일심일까? 일꾼이 가지는 일심의 경계는 우주의 질서를 상극에서 새로운 조화의 질서, 상생의 조화로 바꾸고, 이러한 조화 속에서 인류 문명의 모든 문제를 끄르고, 삶의 원리를 바꾼다4). 그러므로 일꾼의 일심은 만물이 비롯하는 근원이며, 일꾼의 일심이 없으면 우주도 없는 것이다.
 
  天地萬物이 始於一心하고 終於一心이니라
  천지만물이 일심에서 비롯하고
  일심에서 마치느니라.
  일심이 없으면 우주도 없느니라.(道典 8:33)
 
글·김연진(discent@hanmail.net)

 
 1) 안경전 저, 『이것이 개벽이다』, 대원출판, 1999 참조
 2) 저자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마저도 오류를 지적하며 부정한다. 여기서 cogito는 초월적 자아, 일심을 의미할 수 있을 뿐, 자아의 확고한 존재성을 증명하는 명제일 수는 없다.
 3) 안경전 저, 『이제는 개벽이다』, 대원출판, 1999 참조
 4) 천병돈, 『증산도사상 제2집』, 「증산도 심론」, 2000 참조

출처: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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