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마당

사람이란 무엇인가?

2009.11.09 | 조회 2860

인생을 위해 천지가 원시개벽하고
 인생을 위해 일월이 순환광명하고
 인생을 위해 음양이 생성되고
 인생을 위해
 사시(四時) 질서가 조정(調定)되고
 인생을 위해 만물이 화생(化生)하고
 창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성현이 탄생하느니라.
 인생이 없으면
 전혀 천지가 열매 맺지 못하니
 천지에서 사람과 만물을 고르게 내느니라.

(道典 11:157)
 
 

인생을 위하여 우주와 현상 질서가 존재하며 인간에 의해 비로소 천지가 열매 맺는다는 태모님의 말씀에서, 천지간에 가장 신비롭고 존귀한 존재가 바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사람은, 한편으론 눈앞의 이익을 위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때론 전쟁과 범죄를 마다하지 않는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일까?』, 이 책에선 열 여덟 가지 학문 분과에서 사람을 다양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 다양한 층위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고고학
과거의 흔적을 연구하는 학문인 고고학이 정의하는 사람은 <진화하는 사람>이다. 고고학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지구 위에서 자연에 적응하고 환경을 개척하여 문화를 이루는 데에 이바지한 지구의 ‘주인’을 사람이라 보고, 그 ‘사람’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역사를 맞추어 나간다. 과거를 연구하면서 고고학이 얻은 결론은 사람은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1400만년 전의 라마원인으로부터 진화한 현생인종,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 사람)는 생리 기관의 변화와 문화의 변화가 쌍방향으로 발전을 일으키는 과정 속에서 진화해 왔다.
 
신경 생리학
사람이 생리적인 면에서 다른 짐승과 크게 다른 점은 머리의 부피가 크고 신경 단위의 수가 뛰어나게 많고 말하는 기관이 아주 복잡하게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진화 과정에서 머리의 신경 단위가 몸의 신경 단위보다 월등히 많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머리의 신경 단위는 바로 머리를 쓰는 힘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인간이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 살 수 있는 슬기를 낳게 하였다. 저자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인종 중에서도 추운 북쪽 지방에서 살던 몽골 인종(황인종)이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추위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삶을 개척하며 슬기를 기르고 더 나아가 문화를 창조하는 뛰어난 머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한국 사람의 골상 구조로 미루어 볼 때, 한국 사람은 그 조상들이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부근에서 살다가 옮겨왔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뇌’의 차이로 보는 관점은 신경 생리학 분야에서도 대동소이하다. 신경 생리학은 사람을 <뇌가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궁극의 실마리는 사람의 정신활동을 가능케 하는 뇌신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오직 사람만이 뇌신경을 고도로 진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신경계는 기능에 따라 신피질계와 대뇌변연계, 뇌간-척수계로 나뉘는데 이 세 가지 영역의 통합 작용으로 인간의 삶이 영위된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본능적인 생명활동을 관장하는 것은 뇌간-척수계이며, 건장하게 살아가도록 의식활동을 관할하는 것은 대뇌변연계이다. ‘창조적으로’ 혹은 ‘훌륭하게’ 살아가려는 삶의 활동은 신피질계에 맡겨진다. 신피질계가 이러한 창조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창조의 샘이라 불리는 ‘전두연합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전두연합야는 인간만이 수행하는 특유의 정신활동의 중추가 된다. 인류의 정신문명과 엄청난 물질문명을 쌓아올린 주인공은 결국 신피질의 전두연합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의학
그러나 이러한 접근과는 대조적으로, 한의학은 인간을 부분으로 분해하지 않고 전일적으로 고찰한다. 그래서 한의학이 정의하는 사람은 <우주와 꼴이 닮은 사람>, 즉 소우주이다. 한의학의 사람은 바깥 세계, 대우주와 같은 질서와 호흡을 가지고 움직이는 하나의 소우주 또는 우주의 정령이다. 우주의 모든 모습과 기운이 하나로 압축되어 사람 속에 표현되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닮아 둥글고, 발은 땅을 닮아 평평하며, 오장 육부와 여덟 개의 관절과 열두 경락, 365개의 골절을 가지고 있다.
 
생태학
19세기의 생물학자 헤켈(E.H.Haeckel)의 정의로부터 출발한 생태학Ecology은 사람으로부터 더욱 거리를 둔 입장에서 사람을 바라본다. 생물과 생물, 생물과 무생물, 생물과 환경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생태학은 한마디로 ‘관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거시적인 관계의 망 속에서 사람을 파악했을 때 사람이 지구상에서 점유하는 물리적인 위치는 참으로 미미하고 보잘것없다. 사람을 지구 둘레에 균등하게 벌여 놓으면 그 두께가 0.0015mm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잘 것없는 존재가 지구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연 생태계 가운데 사람 위주의 생태계를 만들어 이른바 ‘인간 생태계’란 새로운 술어가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사람은 생태계 속에서 생산자를 조정하고 이용하여 필요한 식량을 인위로 개발하고 생산량을 높임으로써 엄청난 인구 폭발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생태학은 <나날이 32만명씩 불어나는 사람>으로 사람의 특징을 정의하며, 이에 따르면 열흘마다 과거 지구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총인구수(300만명)에 맞먹는 인구가 꼬박꼬박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현재 65억에 달하는 지구의 인구는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데, 이에 따라 생태학은 사람이 자연 생태계와 모순되는 자기의 상태계를 고쳐 나갈 것과, 지구의 생태계를 문명권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을 구축할 것을 요청한다.
 
물리학
은 <자연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사람을 정의하는데, 이는 사실을 알려고 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욕구를 지적하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다.
 
불교
는 사람을 <깨닫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사람이 깨달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나쁜 욕망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을 깨달아야 하며 연기(延期)의 법을 깨달아야 하며 이 우주를 낳게 하는 공(空)성과 무아(無我)를 깨달아야 한다. 불교에서 쓰이는 ‘보디 사트바’, 산스크리트어에서 사람이라는 언어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사람은 무명의 사람으로부터 깨달은 사람으로, 더 나아가 열반에 들어 자유의 경지를 이룬 붓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다.
 
유교
일상의 실천 윤리를 강조하는 유교에서는 사람의 정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 체계가 존재한다기보다는 ‘사람다움’에 대한 규준들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는 사람을 윤리적인 존재로 파악하며, 사람의 구실은 무엇인가라는 사람의 당위성 문제와 사람의 가치는 무엇으로 평가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등도 역시 윤리적 실천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유교의 사람은 <군자가 될 사람>이다.
 
기독교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을 파악하는 기독교의 신학은 사람을 <미래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 중심주의를,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사람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는 세계의 궁극적인 완성은 신의 미래에 있으며 인간의 역사는 이 완성을 향한 과정이기 때문에 사람은 현실 속에서 신의 세계를 뿌리내리는 개척자가 되며, 미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미학
은 사람은 본 것을 그리고 싶어하는,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예술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은 마음의 창을 열고 닫음으로 해서 무한과 유한의 양쪽을 소통하는 존재이며 예술은 무한한 소통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총체적으로 열려 있는 인간의 진정한 삶은 곧 예술일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
프로이트로부터 출발한 정신분석학은 후대에 서로를 반박하고 보충하면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다양한 분석틀을 발전시켜 왔는데, 이러한 차이들 속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의 명제가 존재한다. 첫째 사람의 정신과 행동은 예외없이 인과론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둘째 사람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이 정의하는 사람은 <무의식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다. 무의식에 대한 입장과 분석은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데,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맹목성과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본능의 영역으로 보았고, 융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의 두 가지 유형의 무의식이 있다고 보았다. 개인 무의식은 사람의 일생을 두고 무의식의 영역에 억압되어 그의 경험, 감정, 사고,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며, 집단 무의식은 인류 전체가 역사적으로 경험해온 의식들이 축적된 것으로서 사람들의 공통된 정신의 바탕이고 상징이며 인간 경험의 정해진 틀이 된다. 따라서 융의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규정처럼 우리가 믿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요소가 아니라 인류의 지혜의 원천이 된다. 사람은 이러한 내적인 원천을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확대해 나가고 성장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본능과 문화 사이에는 역관계가 있어서 두 가지 모두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융은 이러한 본능이 바로 문화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전쟁심리학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전쟁에서 흘린 피와 파괴로 얼룩져 있는 인류의 역사를 ‘피의 목욕탕‘이라고 하였다. 고대 국가는 전쟁으로 세워지고 전쟁으로 유지되었으며,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BC 1496년부터 1861년까지 3357년의 기간 동안 지구상에 전쟁이 없이 평화로웠던 시기는 모두 합쳐 227년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시간대를 거쳐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왔다. 이에 전쟁심리학은 사람을 <투쟁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전쟁은 인류사에 있어 양면적인 의미를 가진다. 전쟁은 사람의 파괴본능과 공격욕구가 집단적으로 충돌하는 장이자 공포와 참화의 장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사람은 살육과 학살과 범죄를 거리낌없이 자행한다. 동시에 전쟁과 투쟁을 거치면서 쌓여온 집단생활의 경험은 인간애와 집단의식을 형성하였고, 사람은 생명보존이라는 강렬한 본능적 욕구를 압도하는 더 강한 사람다운 욕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사회윤리학
은 <평등과 차등이 함께 보장된 사람>으로 사람을 정의한다. 사람의 존재를 밝히는 지평 속에는 역설적으로 사람의 평등과 차등에 대한 관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평등이지만 개인과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은 정당한 차등의 이념이다. 그러나 차등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이 보장되어야 하기에, 사람은 평등과 차등을 함께 논해야 하는 존재이며, 평등과 차등이 함께 보장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존재이다.
 
교육학
은 <보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으로 사람을 정의한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 것은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볼’ 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영국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선천적인 장님으로 태어나 성장하다가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짧지 않은 기간동안 눈을 감고 지내는 생활을 유지한다고 한다.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보는 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 같은 형태잡힌 세상이 아니라 ‘어지럽게 돌아가는 빛의 소용돌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개안 수술은 당사자에게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을 주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수술로 인해 그들이 인식론적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에 발생한다. 개안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수년에 걸쳐 인식하는 방법, 즉 눈으로 들어오는 감각자료를 개념으로 해석하는 일을 다시 배우게 된다. 교육은 한 사람에게 개안에 비견될 만한 일로서,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마르크스학
2차 대전이 끝난 후 마르크스의 비판자들이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왜곡한 마르크스 사상의 본래 모습을 찾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마르크스의 원전을 발굴하고 이에 충실하게 마르크스 본래의 목소리를 찾아내 온 사람들은 기존의 ‘맑시즘Marxism’이라는 표현을 넘어서 ‘마르크스학’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마르크스 본래의 사상에 충실하다는 이른바 마르크스학이 정의하는 사람은, <생산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생산하고 있을 때에만 그에 비례하여 살아 있으며, 사람이 무엇을 생산하고 있지 못할 때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의 창조성은 생산을 통해 구체화되며, 사람은 생산의 과정에서 자기 본질을 구현하고 동시에 자기 본질로 돌아간다.
 
경제학
은 <교환하는 사람>으로 사람을 정의한다. 아담 스미스는 사람의 교환행위를 전제로 해서 분업을 생각하고, 교환은 사람의 본성에 뿌리박은 교환성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교환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은 아담 스미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인간 사회의 유일한 사회조직으로 생각한 데에서 나온 잘못된 주장이다. 인류 역사는 교환을 전제로 하지 않는 분업들로 이어져 왔으며 교환행위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아담 스미스가 교환의 본성을 주장한 산업사회 이전에는 교환행위의 주체가 될 만한 개인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집단이나 가족 안에서는 자원을 공유하며 교환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즉 분업을 하고 그 결과를 서로 교환하는 존재로서의 경제적 인간은 18세기에 산업사회의 출발과 더불어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법학
은 사람을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으로 본다. 사람은 행복을 위하여 권리를 보호하고, 진실의 흑백을 가림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최고기관으로서 법이 그 정의를 실현해 주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법이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정의도 현실의 것은 아니며 이상일 뿐이다. 정의는 현실에서 쉽게 실현되지 않으며 정의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도록 애쓰는 것이 사람의 행동이다. 정의를 현실화시키는 사람의 노력은 역사성을 띠며, 사람이 법을 꾸준히 만들고 변화시켜왔다는 사실은 그러한 역사성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정치학
인간 사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인과 노예,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빼앗는 사람과 빼앗기는 사람, 소수의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져 왔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서 집요하게 지속되는 권력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과 결여를 지배욕와 권위와 명예욕으로 대체할 줄 아는 존재이다.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며, 실제로 인류 역사에는 나폴레옹, 스탈린, 히틀러와 같은 카리스마적인 권력자들이 등장했었다. 이들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은 잘못 사용될 때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선악을 떠나 비슷한 속성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정치학은 이러한 사람을 <권력을 좇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사회학
은 <역할을 맡는 사람>으로 사람을 정의한다. 사람은 일상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연기하면서 산다. 각각의 배역을 연기할 때마다 사람은 각기 다른 각본에 맞추어 행동하게 된다. 사람의 사회화는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이 때의 자아는 생물학적 존재나 영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심리적인 존재이다. 사회와 남이라는 존재, 객관적인 실체를 향해 일정한 행동을 하듯이 자기 자신에게도 일정한 행동을 하게 될 때에 자아가 생긴다. 자아는 자기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역할의 각본을 통하여 사회화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상에서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 여덟 가지 학문 분과의 개괄적인 정의를 살펴보았다. 물론 어느 한 가지 정의가 사람이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정의들이 사람이라는 한 가지 대상을 관통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호 모순되는 정의들이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공존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은 이상의 열 여덟 가지 정의의 통합체이기도 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성찰하고 끊임없이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가능태의 존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 인식이 존재하는 인류사회는 또한 생사를 가늠하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9.11테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 인류에겐 절대적인 동일성과 전체적인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글·김연진

출처: 월간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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