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대한독립운동의 불멸의 혼이 되다

2011.06.24 | 조회 4976

진성조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천지를 울리는 총성이 퍼져나갔다.
 조선과 중국,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제패의 야욕마저 지닌 식민지 조선의 초대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일거에 쓰러뜨리는 대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역사변혁의 중심에, 꺼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불멸의 혼 안중근 의사가 있었다.
 ‘안중근 의거’를 시발점으로 열렬한 대한 독립운동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대한남아의 정의의 기상을 천지에 터트린 ‘안중근 의거’는 제국주의 일본전역과 동아시아를 진동시켰으며, 나아가 전세계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었다.
 당대 불멸의 위대한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천지의 울림이었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그의 생애와 사상을 되짚어보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무인 명문가에서 태어난 성웅 안중근
 안중근이 태어나던 때는 조선에 망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가던 무렵이었다. 수천 년의 나라역사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외적이 강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살육하며 토막 내고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아가려는 일이 막벌어지려는불행한때였다.
 
 사람들은‘시대가 영웅을 탄생시킨다’고 한다. 그 시대는 모든 백성들이 영웅과 대인군자를 기다리던 때였다. 안중근은 그런 시대에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진사 안태훈 집안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안중근의 선조들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로서, 원래 경상북도 순흥(본관: 지금 영주시 순흥면)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황해도 해주로 이주해 왔다. 해주에서 12~13대를 거치는 동안 처음엔 향리로, 나중엔 무과에 진출한 양반으로 살았다. 안중근 가문은 5대조~조부까지 무과 급제자만 7명이 나올 정도의 명문가(名門家)였다.
 
 백범 김구와 안태훈이 서로 인연이 있었던 때를 기록해둔『백범일지』의 한 페이지를 보면, 부친 안태훈은 눈빛이 사람을 찌를 듯하고 빛나서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넘쳤다고 전하고 있다. 또 그는 품성이 퍽 소탈하여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에게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었고 친절하여 상류층이나 하류층 모두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안태훈은 일찍부터 근대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개화파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청년 70여명을 선발하여 일본에 선진 문명을 견학하게 하는 유학생 명단에 뽑히기도 했던 근대적 선각자였다. 그는 또한 백범 김구에게 근대사상에 대한 자각을 열어준 스승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안중근은 14세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그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 어린 나이에도 반년이나 앓다가 병을 얻었다고 할 만큼 대단한 효자였다.
 


 안중근은 글공부보다는 사냥, 말타기, 무예 익히는 일을 즐겨하고 소질 또한 뛰어났던 무인(武人)기질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가 보다. 그가 하얼빈 의거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항변 할 때 늘“나는 대한군인 중장의 신분으로 이등박문을 쏘았으니, 날 적장의 신분으로 대해 달라”고 말한 것에서 그 자신이 무인[군인]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타고난 무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중(獄中)에서 그가 지었던『동양평화론』에선당대 국제정세와 미래상에 관해 탄복할 만큼의 해박한 역사적 식견과 인류애를 품은 성인(聖人)과 같은 인품마저 엿보인다. 또 그가 지은‘애국적 한시’(漢詩)에는 뛰어난 선비의 기풍이 보인다. 그는 당대에 보기 드문 문무(文武), 성웅(聖雄)의 덕성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백범과 만나 독립운동사의 정맥을 개척하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동학군이 황해도 지역까지 밀려오자, 수난 당하던 개화파와 가까웠던 그의 집안은 피난 차 해주에서 청계동으로 이사한다. 그 후 황해도 지역에서 동학군이 패퇴(敗退)하고 있을 때, 쫓기는 신세로 있던 동학의 청년접주 김구와 안중근 가문이 처음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김구와 안중근, 두 집안의 만남은 이후 파란만장한 대한 독립운동사의 큰 정맥(正脈)을 이루게 된다.
 
 김구의 인물됨을 알아본 안태훈은 인근에 집 한 채를 사서 김구를 청계동에 살게 해주는 편의를 봐주며 호의를 베푼다. 1894년 당시 김구는 19세, 안중근은 16세였다. 몇 개월 후, 김구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마련하면서 청계동을 떠난다.
 
 그 후‘하얼빈 의거’가 터지자, 김구는 안의사와의 친분으로 일제경찰에 잡혀 감옥에 구속되었다가 한 달만에 풀려나온다. 이런 경험 이후 김구에게는‘안중근 의거가 독립운동의 의리를 상징하는 그 자체’로 각인된다.
 
 김구의 안중근 유족에 대한 관심은 더욱 각별해지고 1937년 일본군의 상해 공격 때 안의사의 부인 김씨를 구출하고자 노심초사 한다. 김씨 구출이 불가능해졌음을 알고도 포기하지 않고, 구출작전에 실패했던 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 공근 형제를 다그치기도 한 점은 김구가 독립운동 실천과정에서 보여준‘의리의 실천’이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가 수립되면서 김구와 안중근 가문은 더욱 가까워진다.‘ 하얼빈 의거’ 이후 안중근 집안은 대부분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것은 고인이 된 안중근 의사의 뜻을 받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안정근, 공근 형제는 임정 주석인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 최일선에서 활동한다. 안정근은 김구가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 국내외 애국청년을 모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안공근은 한국독립당 창당부터 15년 이상 김구의 최측근 동지로서 동고동락한다.
 
 두 형제는 김구의 1930년대 독립운동에서 최측근으로 큰 활동을 하며, 그 밑 항렬인 생(生)자 대(代)에서는 안우생, 안원생, 안춘생, 안낙생 등이 임정과 광복군에서 활동하며 백범의 독립운동에 동참한다. 안중근 가문은 독립운동 가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일등 명문가였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순흥 안씨 가문’얘기만 들으면 치를 떨 정도였다고 한다. 고인이 된 안중근 의사의 영혼조차도 그들은 무서워했다. 두려움에 떤 일제가 안의사의 시신을 어디엔가 숨겼기에, 그의 넋은 아직도 조국 땅에 안장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백범의 큰아들 김인과 안정근의 딸 안미생의 결혼은 두 가문을 더욱 진한 독립운동가문의 혈연동지로 발전시키게 되고, 이들의 동지적 관계는 백범과 임정의 독립운동의 버팀목, 즉 대한 독립운동사의 바탕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이등박문의 죄를 심판하고 천지의 정의를 세우다
 당시‘안의사의 재판’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서양 일변도의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속에서 유일한 동양제국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일거에 사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 후 재판을 받는다. 재판정에서 안의사는 이등박문의 15가지 죄를 밝힌다. 그중 몇 가지를 들여다보자.
 
 
 - 대한국의 민(명성) 황후를 시해한 죄
 - 대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 무고로 한국인을 학살한 죄
 -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 군대를 해산시킨 죄
 -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
 -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안중근 의사의 논리 정연한 진술은 마치 천지신명들이 준엄하게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제국을 심판하는 듯한 음성으로 울려 퍼졌다. 죄수복을 입은 안의사가 거꾸로 이등박문과 일본제국의 죄악상을 준엄하게 심판한 것이었다. 그 천하일등의 기개는 당시 재판정의 판관, 검찰관, 서기관 등 일본인들의 간담을 놀라게 하고 써늘케 하였다.
 
 당시 법정에서 진술을 들었던 일본관료 미조부치는 “지금 진술을 들으니 당신은 정말 동양의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소. 당신 같은 의사는 절대로 사형 받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진심어린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에 안중근은“내가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 없소. 단지 이 뜻을 일본왕에게 속히 알려 이토의 못된 정략을 고쳐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요”라고 말했다. 의거 5개월 후, 이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노예가 되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해인 1910년 3월 26일 그는 차디찬 여순(뤼순)감옥에서 일생을 마감하고 천상으로 돌아간다.
 
 안중근 의사는 독실하고 경건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의 글과 말 중에, 천지의 주인인 천주님이 이 땅에 세계평화 실현의 천명(天命)을 내려주셨다고 굳게 믿는 구절들이 엿보인다.
 
 1907년 11월경 그는 의병투쟁을 전개하던 간도관리사 이범윤에게“이토가 극악해져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백성들을 함부로 죽여 신의를 저버리고 세계를 위협하니, 그야말로 역천(逆天)한 자이므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일본을 치는 것이 천명입니다. 원하건대 속히 큰일을 일으키시어 시기를 놓치지 마십시오”하며 거병을 촉구했다. 이처럼 그는 거병을 천명에 근거하여 주장하고있다. 이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핵심적 부분이기도 하다. 안의사가 동양과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불의한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은 이런 천명에 대한 깊은 자각심의 실천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조선은 일찍이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준 스승의 나라이다. 안의사는 그런 조선을 잡아먹으려 하는 일본이 배사율(背師律)의 큰 죄를 범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스승국을 배반하는 큰 죄, 배사율의 원흉 이등박문을 쓰러뜨림으로써, 대한국 조선의 혼이 살아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최근 밝혀진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의하면, 만주 하얼빈은 동방문명의 뿌리이자 우리대한의 뿌리인 천자국(天子國) 단군조선의 첫 수도(도읍지)였다. 왜 하필 여기서 그는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의 심장을 쏘게 되었을까? 우연이었을까? 혹시 뿌리역사의 민족혼을 크게 각성시키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근본뿌리를 잡아먹으려 했던 일본제국의 앞잡이 이등박문의 불의(不義)를 밝히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의한 제국주의자 이등박문은 이름 그대로 영원한 2등일 뿐이요, 2등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건 1등밖에 없다. 천지의 주인이시며 주재자이신 하나님(상제님)을 섬겼던 동방문화의 뿌리로서 동아시아 신교문화의 천자국이었던‘대한조선이 천지에서 1등의 나라’임을 안의사의 불멸의 혼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끝으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천주님, 증산 상제님께서 천지와 인류역사의 모든 불의함을 심판하는 상징적 사건인‘이등박문 제거 공사’에 관한『道典』성구를 들여다보고 말씀의 깊은 뜻을 깨우쳐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김삼웅,『 안중근 평전』, 시대의 창, 2009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그 시대』, 경인문화사, 2009
 
 
 〈안중근 의사 약력〉
 ● 1879년 9월2일 - 순흥 안씨 가문에서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남. 이름을 중근(重根), ‘ 몸에 북두칠성 점이 있다’하여 자(字)를 응칠(應七)이라 함.
 ● 1884년 (6세) - 조부, 부친을 따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
 ● 1894년 (16세) - 부친을 도와 동학을 빙자한 폭도들을 진압.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둠. 동학 혁명이 일어난 이 해에 백범 김구와 안중근 가문이 첫 만남의 인연을 가짐.
 ● 1897년 1월 (19세) -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여‘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고 전도하러 다님.
 ● 1905년 12월 (27세) - 일본제국의 불법적 조선침략을 세계각국에 호소하는 운동을 함. 그해 부친 별세.
 ● 1906년 3월 (28세) -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家産)을 들여 삼흥,돈의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영재(求國英才) 양성.
 ● 1907년 8월 (29세) - 정부 군대의 해산을 보고,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를 다니던 중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 1908년 7월 (30세) - 연추 지방에서 이범윤 등과 의병군 양성. 의병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에 진입작전 감행.
 ● 1909년 3월 (31세) -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단지혈맹(斷指血盟) 맺음. 이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할 것을 하늘, 땅에 맹세.
 ● 1909년 10월26일 - 하얼빈 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총살로 응징함으로써 세계 인사들로부터‘대한국의 혼이 살아 있다’는 찬사를 받음.
 ● 1910년 2월14일- 여순(뤼쑨) 법정에서 6회 공판 끝에 사형 언도.
 ● 1910년 3월26일 상오 10시 - 안의사에 대한 사형 집행.“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말을 남기고 천주님께 기도 드린 후, 10시15분에 순국. 향년 32세.
 
 
 ■천지의 일등일꾼 출세 공사■
 무신(1908)년 겨울 상제님께서 대흥리에 계실 때
 하루는 청수를 모시고 마루에 쪼그려 앉으시어
 내성에게 명하시기를“내 몸을 결박하라.”하시니, 내성이 겁에 질려 아뢰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당신님의 몸을 묶을 수 있겠습니까?”하매, 말씀하시기를
 “내가 명하거늘 어찌 망설이느냐! 단단히 결박하라.”하시니라.
 내성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들어 옥체를 꼭 묶으니,
 상제님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내성아, 큰 몽둥이로 내 몸을 세게 치며‘일등방문(一等方文)이 제일이냐,
 이등방문이 제일이냐? 일등방문이다!’하고 소리쳐라. 도수이니 빨리 쳐라!
 만일 이행치 않으면 신명들에 의해 큰 해를 당하리니 사정없이 쳐라!”하고 호령하시니라.
 이에 내성이 어쩔 수 없이 상제님의 몸을 치는데 차마 세게 치지 못하고
 때리는 시늉만 하거늘,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호통치시며
 “너 이놈 죽을 테냐! 뒤꿈치를 딸싹딸싹하며 쳐라.
 그렇지 않으면 천지에서 너를 죽일 것이니라.”하시니라. 내성이 엄명에 눌려
 “일등방문이 제일이냐, 이등방문이 제일이냐? 일등방문이 제일이다!”
 하고 크게 소리치며 있는 힘껏 옥체를 세 번 내리치니,
 상제님께서 떼굴떼굴 구르시며
 “아이고, 이놈이 나를 죽이네! 이룰 성(成) 자로 이름을 고쳐 줬더니 나를 죽이네!”
 하고 비명을 지르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껄껄 웃으시며
 “이제 되었다. 이등방문이 넘어가니 일등방문인 네가 낫다.”하시니라.
 다시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담뱃대를 들고 나를 향해 총 쏘는 흉내를 내며 꼭 죽인다는 마음으로‘탕탕’소리를 내라.”
 하시니 내성이 명에 따라 총 쏘는 흉내를 내거늘,
 이에 한 성도가 여쭈기를“이제 이등박문을 폐하시는데 어찌 내성을 쓰셨습니까?”하니,
 말씀하시기를“안성(安姓)을 썼노라.”하시니라.
 이 공사를 행하신 뒤에 수부님에게 무당 도수를 붙이시니라.
 (道典5편 3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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