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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친일파청산 끝나지 않는 전쟁

2010.05.17 | 조회 3902

친일파
KBS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

친일파청산 끝나지 않는 전쟁


삼일절 팔십오주년 해방오십구주년 다시 친일파 논쟁이 뜨겁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은 학계의 연구에 맡겨 가지고 지금 60년 전의 과거는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친일 진상규명고발을 둘러싸고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대통령 따님은 지금현재 한나라당의 주자로 부상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혹시라도 공격빌미로 삼기 위해서. 그러한 자들의 배후에 대해서 필요하지도 않는데 나타나는 게 금뱃지 단 국회의원이라니까 친일사전 편찬하자

그러나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열망은 뜨겁다 해방 오십구년 우리는 왜 지금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는가 과연 누가 친일파청산을 가로막고 있는가

지난 1월 부평역 앞 한 지역시민 단체가 가두서명에 나섰다 또다시 한번 시민여러분 힘을 빌어서 친일파 후손들에게 이 땅이 넘어가지 않도록 시민들 공공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힘을 모아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문제가 된 것은 최근 불거진 친일파송병준의 후손에 친일파 땅 찾기소송
(우리 할아버지는 송병준 부평미군기지는 내 땅 7천억이 어디야 룰루 ~ ~)
낯 뜨거운 친일후손들의 행태에 시민들은 적나라하다


박병환 (76) - 그거 나쁜 놈이죠 친일파 한 놈은 다 죽여야 되요 아 우리가 일본놈들 감정이 살아 있는데
한상욱 인천시민회의 - 우리의 민족의식수준이 이거 밖에 안 되는구나 이런 참담함도 있는거구요 그러나 이 기회에 친일파 후손의 소유권주장 자체는 더이상 법적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쇄기를 박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송병준의 후손이 소송을 제기한 땅은 2008년에 반환 예정인 부평구 산곡동 미군기지 13만3천평 중 3000여평 부평시내 노른자위 땅으로 평당 200만원을 호가하는 곳이다
만일 이 소송에 승소할 경우 나머지 땅에 대해서도 승소할 것이 확실해 송병준의 후손이 얻게 될 이익은 무려 4천여억원에 이른다
송병준 한일합방에 결정적 역할을 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강점후 일본 제국주의는 송병준 이완영같은 매국노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오늘날에 화폐가치로 30억이 넘는 막대한 은사금을 내려 내국의 공로를 치하했다.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
법으로 수많은 땅과 이권이 주어졌다 1917년 당시 송병준의 땅은 서울시내에만 스물두개의 필지에 만이천여평 (송병준 → 송종헌) 현재 소송중인 부평의 미군기지 땅을 비롯해 송병준의 땅은 상당부분 매국의 대가였다.

전우용 박사 서울시립대 - 송병준에 대한 일본에 배려라든가 매국노에 대한 보상은 대단히 파격적이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 경영하던 남대문 시장이 1891년부터입니다만 남대문시장을 무상으로 송병준에게 던져 줘 버립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있는 미개간지라고 하는 것도 100만평 단위로 떼 가지고 소유권을 주는 건 아니고요 개간권 영유권을 국유지입니다만은 국유지 이용권을 부여하기도 하고 이 송병준이 1904년에 빈털털이였던 송병준이 1911년에 전국 5위의 부자로 기록이 됩니다.

과연 후손들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이번 소송을 맡은 변호사는 취재진에게 서류 한장을 보여줬다 에너지 개발사업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까지 토지대금 대부분을 공익사업에 기부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주장은 이들의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 이미 시중에는 변호사의 서명까지 된 토지매매계약서가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훈 변호사 송병준후손소송담당 - 토지는 비용들도 들고 하는 겁니다. 재산을 찾는 자체도 그런 것이고요 누가 팔아서 써서 다 소비를 하고 쓰겠다고 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내가 어떤 가책을 받는다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간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에는 토지브로커들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직도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친일파들의 땅 승소만 한다면 거액의 이권을 거머쥘 수 있는데다 현행법에는 이완용의 후손처럼 승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창록 교수 부산대 - 일제강점기 때 형성된 법률관계에서 해방이후에는 해방이후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독립국가의 관점에서 다시 검토를 했어야 했습니다. 근데 그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거죠 해방이후에 그리고 지금 현재의 법은 또 그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 강남구 포이동, 하지만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후손들은 지금도 일제에 유산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 그거는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고 구한말에 역사 학자이지 언론가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덕남 신채호 며느리 - 자기가 자기 아버지 호적을 찾기 위해서 수도 없는 관계기관을 찾아 다녔어요 이걸 어떻게 해야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되겠느냐 그래서 가정법원 호적과로 막 질의를 했는데 그 때마다 다 좌절됐어요
이유가 뭡니까 - 이유는 아버지가 말하자면 호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죽고 없으니까 사망자니까 취적도 될 수 없고 여기 보면 신채호박사의 아들로만 되어 있지

교과서에 등재된 독립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신채호 선생은 수십년간 국적이 없었다. 아들 신수범씨는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로 기록되어 있었다. 신수범씨는 지난 86년에야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국적을 회복한 것처럼 과장 보도했지만 지금까지도 신채호 선생은 여전히 무국적자로 남아있다.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기까지 신수범씨는 평생을 탄원서 속에서 가난과 싸워야 했다. 가난 때문에 46살에 결혼을 했던 독립운동가의 아들 70년대까지만 해도 신수범씨는 오히려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오명 속에 숨어 다니기도 했고 먹고 살기 위해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이덕남 신채호 며느리 - 지금도 간간이 그런 얘기를 해요 부두일도 했다고 고추장사도 했다가 어떤 때는 배가 너무 고프니까 미싱가지고 있으면 부자였으니 미싱수리공으로도 살아 봤고

그러나 며느리 이덕남씨에게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았다. 남편인 신수범씨가 신채호의 아들인 사실은 인정받았지만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호적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덕남 - 성역화를 할라면 이 어른의 도장이 필요한데 없으니까 우리가 등기를 해서 손자가 등기를 하는거죠 등기를 해서 넘겨 줘야 되는데 등기소에 신청을 했다 말이예요 하니까 신채호 선생의 손자인지를 인정을 못해서 등기를 못해주겠다.

충청북도 청원군 보령신씨 일가의 집성촌이던 이 곳에 아직도 신채호선생의 생가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난 2001년 청원군은 이 일대에 신채호선생의 기념 묘역을 조성하겠다며 땅을 기증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후손들은 이 땅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덕남 신채호 며느리 후손 - 4년 동안 12번이 붕괴되었어요 새로 하고 새로 하고 올해만 하더라도 지난해만 하더라도 이게 네번째 다시 봉분을 올려 놓은거요 이렇게 되어 있으니 어른이 국적이 없으니 묘소도 제대로 옮길 수 없잖아

이장을 하려 해도 법적으로는 남의 산소를 이장하는 격이 돼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모두 신채호선생의 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덕남 -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일본놈들 밑에서 호적을 안 했기 때문에 국적이 당연히 없는 거거든요 허니까 해방되면 그 어른들을 호적을 부활을 해서 전부 찾아 줬어야 맞는데 일본놈 법 그대로 지금까지 오니까 우리 아버님도 뭐 누구든 지금까지 호적이 없는거죠

단재 신채호 우리 역사에 확고한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다 구한말 성균관의 박사였고 조선상고사를 쓴 역사학자 일제의 조선병합에 반대하여 펜을 휘둘렀던 언론인 1910년 일제가 조선반도를 집어 삼키자 **도 황국신민으로 살지 않겠다며 중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1936년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순국하기까지 평생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독립투사였다.
하지만 해방 6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그는 호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무국적자다. 후손들이 신채호선생의 땅을 물려 받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등기에 생가터와 묘소는 신채호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호적이 없기 때문에 땅 주인 신채호와 신수범의 아버지 신채호를 동인인으로 볼만한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김항구 관리계장 - 제가 판단하기는 신채호선생의 호적이 없다는 말씀 아니예요 그죠 그러면 주소등록은 안되는 거죠
대법원 호적계장 - 호적을 안 만든 상태에서 사망한 경우 사실 그런 사람들은 힘들죠. 호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그러면 그런 분들은 우리나라에서 재산권행사 같은 건 못하겠네요? - 그렇다고 봐야 되겠죠. 어쨌든 소명이 안된다면서요.

40년의 노력끝에 아버지 신채호의 국적을 찾았다고 믿었지만 호적상에 부활된 것은 단지 신수범의 아버지 신채호였을 뿐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아니었다.

이복남 - 거기다가 이완용이와 송병준이의 땅은 찾아 준다고 할 때 나는 너무 통곡하겠다 이거지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일본놈한테 땅덩어리를 팔아 먹고 매국노 짓을 했으니까는 일본 밑에서 호적이 있다 말이예요 호적도 영관이라고 대한민국의 귀족이야 호적이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이 사람들은 호적이 계통이 다 정리되어 있으니까는 땅덩이가 자기 민족이나 말이지 나라까지 다 팔아먹고 지 개인 땅은 찾아 주면서 우리는 독립운동한다고 목숨도 갖다 바친 어른들이 목숨뿐입니까 가족도 다 접어 버렸잖아 당신이 지녔던 거 모조리 포기하고 오직 독립을 한다고 목숨바친 어른들을 이 모양으로 한다고 국적도 안 해주고

(조선 민사령 1912년)민법상 효력이 있는 현행 호적은 일제가 1912년에 만들었던 조선민사령에 기초한다. 하지만 신채호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호적에 등재되기를 거부해 무국적자가 되었다. 해방이 된 후에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법령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법령으로 계승되었다.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있지만 제헌헌법 100조에 따라 일제시대의 법률은 헌법에 충돌하지 않는 한 효력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한상범 위원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법학박사 - 그 당시에 우리가 친일파를 처벌했으면 또 친일파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으면 오늘날 이런 일이 없죠 그렇질 못했어요 못하고 48년 헌법부측 100조에서 구법령의 효력을 인정한다 다만 조건부로 인정을 하는데 이 헌법과 충돌이 안 되는 한 인정한다 그러니까 충돌이 되는가 여부는 누가 어떻게 심사하는 지도 모르고 뭐 어떻게 맞는가 규정도 없고 모르죠 그러니까 일제 법령이 그대로 넘어 가는 겁니다.

1945년 8월 해방은 이뤄졌다. 하지만 그것은 주어진 해방이었다. 일본제국주의 대신에 들어선 미군정은 독립국가에 건설보다는 통치하기 편리한 체제유지를 원했다. 미군정하 과도입법위원에서 처벌 보류된 친일파 처벌법안은 1948년 정부수립 후 제헌의회에서 반민족처벌법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반민족행위 처벌법 공포) 그에 따라 반민족행위자 특별처벌위원회 곧 반민특위가 구성된 것이 1948년 10월 각 도별로 설치된 조사위원회에는 시민들의 투서가 빗발쳤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백건의 서류가 접수되었고 삼일운동 당시 33인 중에 한명이었으나 변절하여 친일활동을 한 최린을 비롯하여 악명높은 친일파들이 속속 구속되었다. (박중양) 화신재벌의 총수로 일제에 비행기를 만들어 헌납했던 박흥식, 대표적 친일문인이었던 최남선과 이광수 등 총 오백쉰아홉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고 이원용 1993년 증언 반민특위 총무과장 특별조사관 - 과거에 못살게 굴던 악질 친일파를 숙청하는 기관에서 그 피해자를 잡아다가 첫번째 재판을 한다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흥분이 되어가지고 박수 갈채를 보내고 죽여라 살려라 해가지고 그 재판장에 담을 뛰어 넘어서 보겠다고 그 광경을 굉장했습니다. (조속완료를 요망 이대통령 특위에 권고)
하지만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던 이승만은 처음부터 반민특위의 활동에 비판적이었다.
48년 10월 하순엔 경찰과 친일파가 공모해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하려든 계획이 폭로되기도 했다.

김준형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 아들 - 이승만 박사가 적당히 하십시오 아버님께서 기억하시면서 저한테 한 말이 김위원 적당히 하십시오 이 박사가 저한테 한 말에 적당이라니요 이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당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대로 밀고 나가겠습니다. 그랬을 때 이승만 그 때 당시 대통령이 저의 아버님에게 바른 자세를 하시면서 내가 하라는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느냐

당시 국무회의록은 이승만이 반민특위 해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비밀조사하야 선처하라 국무회위록 49년2월) 일부 친일국무위원에게 반민특위의 처벌을 받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하여 선처하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악명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이 체포됐을 때는 정부가 보증하여 보석하도록 요구했고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 국무회의록, 49년3월)
조사관을 체포하여 감시 반민특위 조사관들을 비리혐의로 체포하고 감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대통령각하는 불법조사관 이명지휘자를 체포하여 위법처리하며 계속 삼시지령하시다 국무회의록, 49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기반인 한민당과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49년 6월에 국회 프락치사건과 반민특위 습격사건까지 이어지며 반민특위는 49년 8월에 결국 와해되고 만다 (박흥식 반민법 위반 검거 1호)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 48년 6월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정세가 급변하면서 친일파 청산은 유야무야 되었을 뿐 아니라 친일파는 아주 강고한 정치세력 권력층 경제세력 사회문화세력을 형성하면서 이제는 친일파를 처단하자 라고 주장하는 것을 계란을 가지고 바위에 던지는 그런 식의 힘없는 주장 밖에 되지 못했다는 얘기가 오십년대 육십년대 칠십년대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강수 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사 - 애국과 매국이 친일파냐 아니냐가 아니라 공산주의냐 아니냐 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바뀌는 아수라장 속에서 친일파들이 반공이라는 것을 덥석 무는 겁니다.
반공으로 계속해서 주장을 하는 거죠 즉 자기네들은 공산주의자를 때려 잡는 애국자라는 둔갑을 하기 시작한 거죠 공산주의자를 반공만 얘기하면 애국자가 되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매국노가 되는 거니까

53년 뒤인 지난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13명의 위원들은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자 칠백여덟명의 명단과 친일행적을 전격 발표했다.
반민특위이후 최초로 발표된 공식적인 친일파의 명단 문제가 된 것은 추가로 발표된 16명
문화예술계 김은호 심형구 현제명 홍난파 이능화 정만조
언론계 김성수 방응모 장덕수
현제명 홍난파를 비롯해 동아일보사주 김성수 조선일보사주 방응모 김활란 모윤숙 등 거물급 인사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성계 김활란 고황경 모윤숙 박인덕 송금선 황신덕
종교계 권상노
그것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각 신문사들은 선정기준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특히 창업주인 김성수와 방응모가 친일파로 거명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반발은 극심했다.

서상섭 국회의원 - 민족적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한테 의사확인을 각 신문사에 했단 소리를 들었어요 많은 사람은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서명을 거부한 사람도 있었고 이런 정치환경 속에서 언론과 정치인에 관계로 미뤄서 부적절한 관계로 만들 필요가 있느냐 해서 주저한 사람도 있었던게 사실이에요

논쟁의 대표적인 인물인 인촌 김성수 그는 제일공화국의 부통령이자 일제치하 동아일보를 설립했던 언론인 고려대학과 중앙학원을 설립한 교육자이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해방이후 우리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거물이었다.
지난 91년 탄신 백주년을 맞아 동상 제막식에는 전두환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대중 이기택등 삼당 대표와 정주영등 재벌총수들이 총 출동할 정도였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 김성수하면 한국 민족언론의 대변인 민족교육의 선구자라고 그렇게 가르켜 왔거든요 어떤 의미에서 과대하게 평가가 되어있고 포장이 되어 있는 거죠 근데 실체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김성수 1938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하지만 일제말기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데 앞장섰다. 조선인 징병제는 전반도인의 영예인 동시에 문약한 역사를 극복할 제2의 기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기풍을 조장하라.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전반도 청년의 영예 매일신보 43. 8.5)
조선인 학병과 징병을 일대 쾌사로 지칭하며 이 중대한 사업에 절대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절대로 협력, 학병들을 위하여 또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금후 출정할 반도출신 장병들을 생각할진대, 이번 조선금융단에서 20만원을 제공한 것은 일대 쾌사가 아닐 수 없다. 매일신보 43.12.7)
또한 그는 국민연맹 총동원 명령 발기인이자 이사로서 신문방송과 전국강연을 통해 수많은 조선인을 전쟁터로 내 몰았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은 해방과 더불어 잊혀졌다.

유석춘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 총독부가 너 이거 해라 본인 입장에서는 뺐겠죠 그러다가 뭐 나는 못쓰겠다 해도 자꾸 하라고 하니까 본인은 안 쓰고 그 책에 보면은 매일신보 기자가 대신써 가지고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 인촌 김성수는 매일신보에 친일논서를 쓴 것도 있지만 각종 친일단체에서 간부로서 활동을 했고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 1940년 폐간될 때까지 동아일보에서도 친일보도를 많이 한 책임도 있습니다.
(사이토 총독에게 보낸 편지 -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로 후정을 입었습니다. 경성방직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 않으며 깊이 감사말씀 올립니다. 김성수)
(이번에 간독한 당신의 편지와 기국을 기증받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귀중히 하겠습니다.)
임기후 일본으로 돌아간 전 총독 사이토에게 보낸 김성수의 편지는 두 사람의 긴밀했던 관계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해방후 김성수는 유관순열사보다도 한단계 위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는다.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 공이 있다고 해서 일제말기에 인촌에 개인적인 친일이라든지 동아일보의 친일보도가 덮어지는 건 아니죠 해방 후에 공적이 있다면 그 공적은 다른 것으로 포상해야 되겠죠 그러나 인촌이 엄연하게 친일행적이 있는데 건국훈장을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지난 93년에도 김성수의 친일행적은 도마 위에 올랐다. 보훈처가 김성수를 포함한 여덟명에 대해 서훈취소를 검토했던 것이다.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1993년)
하지만 일부 국회 보사위원들은 김성수의 친일행위가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다며 오히려 이병태 보훈처장을 질책했다. 이병태 보훈처장이 미숙한 업무처리로 사태는 일단락되고 만다.
당시 보훈처에 서훈취소 대상자 중에 한 명이었던 이갑성 민족대표 33인중에 한 명이며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그에 대해서도 친일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1967년 고위 임시정부 사람들이 이갑성의 변절을 신문광고로 게재하면서 논쟁은 시작되었다. 핵심은 일제만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했으며 상해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한 혐의가 짓다는 것

윤경빈 전 광복회장 - 독립대표 33인 중에 한 분입니다. 정말 우리 민족이 우리 국민이 추앙해야 할 훌륭한 분이다. 그런 분이 창씨개명을 했다. 그리고 만주척식회사에 전무에 추대되었어 만주척식공사라는게 일본놈이 만주 침략에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동족들을 착취하는데 거기 전무에 취업을 했다 그건 뭐 세상이 다 아는거예요 나도 명함을 다 보았으니까 창씨개명을 하고 그거만 봐도 그 사람은 우리 대한민국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난 이렇게 봅니다. 또 광복회 회장을 할 자격이 없지 않느냐

이갑성 측에서는 즉각 사실무근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창씨개명도 일정활동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광복회장의 자리를 둘러싼 반대파들의 흠집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현기 회장 -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 33인 중에 세분이 친일하신 것은 691명 친일한 인명록에 나와있지 않습니까 박희도 선생님 최균선생님 그 다음에 전춘수 선생님 33인 중에 서른 분은 어떠한 행위에 무엇이 있더라도 신사참배 안했습니다. 창씨개명도 안했죠 이갑성선생은 안했어요 이아모토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호적등본가서 떼 보세요

과연 이갑성은 창씨개명을 한 적이 없는 것일까 취재진은 직접 주소지의 구청으로 확인해 보았다.
확인 결과 이갑성의 호적엔 실제로 창씨개명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76년에 새로이 정리된 호적이었고 또다른 경로로 입수한 원적엔 이아모토란 이름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었다.

내용은 확실한 거죠 이갑성씨가 창씨개명을 한 내용이 있었다는 것은요
호적관계자 - 그걸 확인했어요 76년도에 다시 만들었다고 나오거든요 그 때 먼저 쓰던 호적을 우리가 보관하고 있으니까

논란 속에서 지난 1981년에 세상을 떠난 이갑성 그는 지금도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애국열사로 모셔져 있다.

김우전 광복회장 - 근거없다고 제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습니까 단정을 할 수 없죠 모든 것은 단정으로 제가 얘기할 수 없죠 제가 광복회 회장이 아닐 때는 좀 얘기를 했는데 광복회 회장으로서 그런 걸 얘기를 안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화여대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소개하는 사람
(김활란 동상) 김활란 이화여대 이대총장이자 대표적인 여성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 여성박사 1호로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 YWCA와 주부연합클럽 등 여성단체를 이끌며 여성에게 빛을 안겨 준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고청화 이화여자대학교 4학년 - 여성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한국 땅 여성들이 눌려 있고 억눌려 있고 갇혀 있던 그런 여성들에게 빛을 주시고 교육의 기회를 주시는데 크게 공헌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김활란 -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방송선전협의회, 애국금차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연맹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그러나 일제말기 김활한은 친일단체인 애국부인 금차회등을 조직해 전쟁물자동원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으로서 한 몸을 바치겠다고 맹세까지 한 임전특위회등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리며 적극 활동한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동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그 책임을 다 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신시대 42년12월)
황국신민으로서 전장에 참여한 영광을 안은 것을 찬양하고 징병에 협조할 것을 독려했다.
그녀는 또 조선여성의 대표로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뒷 일은 우리가 학도출진의 북은 울렸다. 가라 마음 놓고! 뒷 일은 총후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제군들은 오늘 이 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양미강 일본교과서바로잡기 운동본부 운영위원 - 김활란 선생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강연을 많이 하시고 했는데 거의 1945년 8월까지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 그 분의 명단이 나와요
어디 강연을 하거나 무슨 조직에 명단이 나와요 제가 보기에는 상당 부분 해방이 되는 마지막까지 명단이 나오는 걸 봤을 때 이분이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다는 것을 심증을 갖게 됐습니다. 제가 자료를 보면은요
해방 후 반미주의자에서 친미주의자로 변신한 김활란은 이승만 박정희 두 정권과의 밀월관계 속에서 한국여성과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여성의 빛 김활란을 기리기 위해 이화여대가 추진했던 김활란 상은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지만 여성단체협의회는 지금도 김활란 지도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은방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 그것도 제가 중심이 되어서 제가 우겨서 그렇게 한 것은 제가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상도 없었더라면 김활란씨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친일파로 남아서 그분의 그래도 아름답게 산 인생인데 그게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여협에서 후배로서 잘했다는 자긍심을 가져요 제가

강정숙 교수 영남대 여성학 - 그가 사실 이 세상을 뜰 때까지 권력자와 밀착관계 늘 보였다라는 것이죠 우리가 단순히 여성박사 1호 라는 측면이라든지 아니면 여자 대학교라든지 여성교육을 하는 기관을 유지하는데 학장을 성공적으로 했다 라는 측면만 본다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치관이라든가 우리사회에서 과연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했는가 라는 것을 그 이름의 비중만큼이나
그러한 문제를 김활란에게 묻는다면 과연 김활란을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일각에서 지속적으로 김활란의 친일행적으로 지적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김활란은 아직도 한국의 대표적인 위인이다.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 속에 김활란의 친일행적이 언급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초등학교 위인전 - 여성 기독교 단체 등을 통해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 해방 후에는 애국 부인회, 주부클럽 연합회 등을 이끌면서 여성 운동에 힘썼습니다.)
심지어 김활란은 일제의 협조에 거부한 독립운동가로 그려져 있다.

은방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 규명요 문건이 남아 있는 자체가 규명된 거 아닙니까 그 이상 뭐를 찾아요 내가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나타난 현실대로 그냥 놔 두면 돼요 50년 전의 일을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그럴 필요가 있으까요?

지난 해 시월 마산에서 있었던 조두남 기념관 개관기념식장 개관은 개관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지난 해 12월 마산음악관으로 재개관하게 되었다.
반대의 이유는 선구자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진 조두남이 실은 친일 작곡가였다는 것이다.
40년대 친일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윤혜영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며 내선일체 황민화정책등 일제의 ㅁ문화정책에 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노동은 교수 중앙대학교 국악대 - 창씨개명을 한다던가 내선일체에 여러 가지 문화를 한다던가 또 신사를 구축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거기에서 날마다 동원시켜서 경배를 시킨다던가 그런 것들이 바로 황민화 정책이죠 이 양고리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정책이었어요 그러니까 전선쪽으로 동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쪽에 신사참배와 더불어서 사람들의 정서를 바꾸고 가창대를 운영을 하고 늘 음악들을 통해서 그것들을 정당화 시켰던 것이죠

봉선화를 작곡한 우리나라 양악의 대부 홍난파, 홍난파 사후 양악계의 거부로 서울대 음대를 창시한 현제명도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이광수 최남선의 시에 곡을 붙이고 각종 음악회를 통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내용들을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기독신문 1938.6.18) 홍난파와 현제명은 1938년 기독신문에 공개적으로 사상 전향서를 발표하고 일본천황에 충성을 다짐하기까지 했다. 대중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혈서지원, 백년설, 박향림, 남인수노래 -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네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되기 소원입니다. )
하지만 해방 후 우리는 그들의 죄과를 밝혀 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훌륭한 문화예술인으로 존경받고 기념되어 왔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 해방 후에 그들의 핵심은 친일했던 행위를 은폐하고 감추는 수준으로 보면 안되고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을 때는 망각을 강요했다 이제 친일을 과거시절이죠 요즘 사람들 모르고 있잖아요 망각 다음 단계는 미화의 단계로 가는 거죠 지금은 그래서 해방 후에 그들은 각 종 상을 받거나 일지시대에 친일을 했기 때문에 해방 후에 그대로 기득권이 이어져 온 거 아닙니까?

해방이 되어서도 일제식민지정책에 앞장섰던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후 우리나라 지배층의 구성을 살펴 보면 해답은 자명해진다.
해방 직후 인 46년 서울시내 경찰서장의 일제 시대의 경력을 살펴 보면 10명의 경찰서장 중 아홉명이
일제 경찰출신이고 나머지 한명도 일제고급관리출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육사출신에 관동군 장교였고 최규하대통령은 일제하 만주국에서 관료로 봉사했다.
건국이후 78년까지 역대 서른일곱명의 내무부장관중에서 일제고등문관출신등 부일혐의가 있는 사람이 모두 스물두명이다 삼분의 이에 가까운 수치다
군대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역대 육군참모총장의 일제시대 경력을 살펴 보면 건국이래 21대까지 모두 일본군 장교출신이다. 해방이후 대부분의 부일경력자들은 우리사회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런 상황아래서 친일파 청산은 불가능했다.

한상범 위원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법학박사 - 우리 사회에 제일 문제가 정치 부패 돈 어쩌고 하지만요 핵심은 정직이 통하지 않는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신뢰할 수가 없냐 정의가 설 수가 없어요 정의를 주장한 놈은 다 바보가 되고 왕따를 당해 그러니까 전부 너도 나도 살아 남기 위해서 불의를 묵인해 또 더 잘 살기 위해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 불의에 앞장서 이런 것을 그대로 놔 두면 우리의 장래 21세기 세상이 바뀌는 사회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이거야
나쁜 짓 한 놈은 다 백년 먹이를 갖고 있고 정직하게 살면 알거지가 되어 있고 그러고서는 합쳐라 우리는 따라라 안됩니다. 예 그래서 과거청산 친일청산 일제잔재청산이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현재의 문제다.

하지만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국민적 열기는 식지 않았다. 지난 12월 국회는 친일인명사전발간을 위한 예산을 오억원을 삭감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성금모금에 나섰고 불과 십여일 만에 오억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조문기 이사장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가 - 이번에 네티즌들이 성금모금 열기보고 깜짝 놀랬어요 아휴 죽지 않았구나 깨어 있었구나 희망은 있구나 나도 힘이 북받치고 자신이 생기고 그러는데

애국지사들에게 우리가 죽지않고 기필코 반민특위에 편에 섰다는 것을
지난 1월 19일 명동 국민은행 앞 성금모임에 참석한 네티즌들의 공개모임이 열렸다.
(반민특위 터 - 이 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이것은 바로 55년 전 반민특위 사무실이 있던 바로 그 자리 반민특위는 사라졌어도 그 뜻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이 빛을 볼 수 있기 까지는 한 민간연구소의 존재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평생을 친일 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의 끈질긴 연구와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 내년이면 해방 60년을 맞이합니다. 한 민족이 나라 국가를 구성해서 살아 오면서 자기 민족과 국가를 완전히 깡그리 없애려고 했던 그 세력들을 무시하고 어떻게 그걸 청산안하고 내려왔느냐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 우리가 미래를 이야기 할려면은 적어도 과거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정리를 하고 넘어갈 때 비로소 미래를 더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과거가 어떻던가 덮어 둔다면 언제든지 과거의 잘못된 순간들은 어느 순간에 또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12월 국회에서는 친일 반민족특위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국회의원 백쉰일곱명이 발의한 이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법안의 핵심 내용은 대통령 직속으로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친일행적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외교통상부장관 - 일본하고 우호관계를 통해서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다고 보는데 그렇지 않고 이런 법안이 통과가 되면 갑자기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이 갑자기 왜
함승희 의원 - 일본을 왜 의식하는데 그 자들은 우리를 의식 안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데
외교통상부장관 - 그렇게 안하고 할 수 있는데 분위기를 냉각 시키면서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제2의 반민특위로 기대를 모았던 특별법안 하지만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이유로 반대의견을 피력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회의는 첫회부터 파행으로 치달았다.
열이틀 뒤에 열린 이차 회의 이번엔 행자부차관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김주현 차관 행정자치부 - 반민족행위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조사과정에서 조사대상자 및 그 후손들이 강력한 반발이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점이 하나가 있고 조사하는데도 어려움이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정부가 직접 역사의 평가작업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법안재정에 반대하는 행자부차관의 발언에 국회의원들이 항의가 쏟아졌다.
위원장 - 심의 못합니다. 심의 안 해요 이런 식으로 떼를 부리고 때깡만 부리고

장내 소란을 이유로 법사위 위원장이 퇴장하면서 회의는 결국 유회 되었다.
어디서 조정이 되어서 이런 내용이 나왔나 국무총리실에서
나라를 팔아 먹은 놈에 대해서 처벌은 커녕 규명하자는 것도 못하게 하는 나라가 이게 나랍니까

김희선 의원 - 과거에 36년간에 일제의 압제당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규명을 하자는 건데 처벌하자는 게 아닙니다. 48년도에 나왔던 반민족법은 처벌조항입니다. 이거는 규명을 하자는 건데 그러면 이거는 규명하자는 것도 안하잖다 어떻게 국민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지난 2월 29일 오전 열시 삼십분 아홉시에 열릴 예정이던 법안심사 소의장은 비어있다
의원들이 참석하지 않아 유회된 것이다. 그러나 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의원들은 30분 뒤에 열린 대통령 법사위에는 참석했다. 9시에 예정되었던 회의는 특검법안이 뒤에 오후 2시 반으로 연기되었지만 위원들이 참석하지 않아 끝내 무산되었다.

김용균의원 - 친일파의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서 전국민이 대상이 될 위험성이 있다.
그거 하고 또 하나는 현재 60년이 지난 상황에서 증거 구증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걸 어떻게 잡을 것이냐 그런 문제하고

김희선의원 - 결국에는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친일반민족진상규명법을 통과시킬 의지가 없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지난 6월 2일 법안심사소의가 다시 열렸지만 여전히 난항을 거듭했다.

김용균의원 - 이법안의 자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과거 일제의 암울한 시기에 본인의 선천을 친일파로 몰아가면서 이 법안의 통과를 강요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전체회의장 법사위소의는 일제시대에 면장을 지낸 장시간에 걸쳐 항변했다. 지난 수개월간 법안이 통과되기를 바래온 독립유공자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법안은 좀처럼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차창규 광복회이사 - 아홉시에 나와가지고 엉뚱한 소리만 하다 엉뚱한 소리 에 도둑놈들이 도둑놈 잡는다고 엉뚱한 소리만 지껄여대다가 싸움하다가 가가지고 필요한거 할라고 하니까 나타나지도 않는 이게 금 뱃지 달은 국회의원이라니까 대한민국이 얼로 가는건지 참 한심합니다.

김삼열 독립유공자 유족회회장 - 친일파의 후손의 반발이 우려스럽다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도둑놈을 잡는데 도둑놈의 유족들 그 가족들의 반발이 무서워서 도둑놈을 잡지 말자 이런 논리하고 똑같거든요 이건 정말 말이 안되는 겁니다 앞뒤도 맞지않고

2월 26일 국회 법사위 회의는 거의 한달 만에 다시 열렸다. 하지만 김용균의원에 고함으로 시작되었다.

조상대상이 되는 일본군 장교범위를 어디까지 하자 중좌로 하자는 김용균의원 이 문제 하나만 되어 있습니다.
김희선의원 - 중좌라는 직책이 없었어요 우리나라 사람은요 그걸 여기다 넣는다는 의미는 중좌이상으로 없는 사람을 뭘 여기다 넣습니까 그러자면 차라리 10번항을 없애자고 하는게 맞지

조재환의원 - 박정희 대통령의 딸은 지금 현재 한나라당의 주자로 부상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혹시라도 공격빌미로 삼기 위해서 정략적인 발언이 아닌가

급기야는 법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되었다.
출석위원 과반수이상을 얻었음으로 중좌이상의 장교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나머지 부분 모두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친일진상규명 특별법안은 제한 6개월 만에 가까스로 법사위를 통과했다. 문제가 된 일본군 장교부분은 중좌이상으로 축소되었다. 조사대상이 되는 친일행위도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삭제 - 창씨개명 주창, 신사건립 지원행위,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역사왜곡 말살행위)
우여곡절 끝에 제2의 반민특위라고 할 만한 친일진상규명특별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튿날 한나라당 지도부가 검토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해 이 법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과거특별법안의 본회의 상정이 무산된 후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은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왔다.
부부만 살고 있는 20평짜리 임대아파트 조문기 이사장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투사다
45년 7월 조문기는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조선인의 참전을 독려하던 친일파의 강연회장을 폭파시켰다. 이른바 구민관 폭파사건의 주인공이다.

조문기 이사장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가 - 당연히 뭐 안그러면 못하는게 그거죠 이거하다 잡히면 죽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하면 못하죠 또 독립운동 전체가 그래요 다 목숨 걸어야 하는 거지 목숨 안걸고 하는 독립운동은 할 수가 없는 거고 해방이 된 후에도 광복회 회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일재의 잔재청산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독립운동으로 받은 국가유공자증과 독립헌장은 언제나 장롱위에 먼지를 쓴 채 놓여 있다.
그에게 있어 우리나라는 아직 해방되지 않은 나라다

이거를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생전 내 놓지를 안해요 그러니까 먼지가 쌓였지
조문기 이사장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운동가 - 독립이 된 거는 친일파들이 독립이 되었어요 친일파들이 해방이 되었어요 민족은 하나도 해방이 안되었어요 친일파들이 해방이 됐다는 것은 친일파들이 일제가 있을 때는 일제라는 상전이 있어가지고 일제라는 상전에 지시 받고 상전의 눈치보고 이렇게 했지만은 팔일오 이후에 일제가 간 뒤에는 상전이 없잖아요 나라는 저희들 손에 떨어졌다고 친일파 손에 떨어졌다고요 그러니까 해방이 된 건 그 사람들이지

그는 친일파가 청산이 되어야만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올해 이른여덟에 노 독립운동가는 해방된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80평생 길고 외로웠던 독립운동의 여정에서 그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친일파 청산 그 오랜 전쟁을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믿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을 원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열망이 어긋난 역사를 펴 나가기 위한 물꼬를 터 나갈 것이라고 그 희망과 믿음이 있었기에 친일파청산이라는 그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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